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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시장 교란자 (4) (157/250)


157화 시장 교란자 (4)
2022.07.07.


중원의 은자 시세는 태웅방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대한 자본은 다른 소규모 전장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월등히 많다. 그런 태웅방의 장안 지부가 지금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지부 안쪽에 존재하는 비밀 공간.

이곳은 지부장의 집무실임과 동시에 특별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였다.

금빛으로 번뜩이는 고가의 장식물들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쪽엔 보관창고로 이어지는 문이 있고, 입구 근처에는 보안을 담당하는 여섯 명의 무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미쳤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지부장은 황당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지부장님. 이곳에서 보유 중인 은자를 모두 매입하겠다고 했습니다.”

“장안에 황 대인 말고 그런 재력가가 누가 있다는 거야? 돈은 있는지 확인했어?”

점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거듭 보고했다.

“……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그것을 물어보기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눈썰미가 대단한 점원이었다. 그가 허언을 고할 리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부장은 깍지를 끼며 물었다.

“지금 은자 보유량이 얼마나 되지?”

“저희가 소유하고 있던 은자는 미리 처분하였습니다만…… 하한가격에 예약한 고객들의 매도 대기 은자가 육천오백 냥입니다.”

병사들의 일 년치 녹봉을 현재의 은자시세로 환산하면 여덟 냥 정도였다. 그야말로 이례적인 규모였다.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우선 안으로 모셔와.”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예? 거래가 정말 성사된다면 황 대인께서 섭섭해하실 것입니다.”

“재력만 있다면 최고의 고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이지.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점원이 거래소로 이어진 비밀문을 나섰다.

심호흡을 내쉰 지부장. 그의 분위기가 갑자기 돌변했다. 무표정했던 얼굴이 함박웃음을 머금고는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대고객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반각이 지난 뒤 화려하게 장식된 문짝이 열렸다.

“이쪽입니다. 특별고객만을 위한 장소이오니 편히 이용해 주십시오!”

낯선 여인이 한 걸음씩 다가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화광이 비추듯 실내의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어 버렸다.

지부장은 눈알을 굴리며 재빨리 상대를 파악해보았다.

눈꽃 문양이 수놓아진 붉은 비단 한복. 고려에서 수입되는 의상으로 쉽게 볼 수 없는 고급품이었다.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은 마치 황후와도 같았다. 게다가 걸음걸이마다 넘치는 기품까지. 한 손에는 비단에 감싸진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파악을 마친 지부장은 상체를 굽히며 극진히 안내했다.

“저희 태웅방을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비단이 깔린 탁상과 금빛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자였다.

자리에 앉은 설화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물었다.

“태웅방의 총 은자 보유량은?”

“예, 부인. 육천오백 냥의 은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수수료를 포함한 가격은 개당 엽전 백이십 냥입니다.”

“본점의 은자까지 합친 보유량을 물어본 것입니다.”

지부장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착각마저 들었다.

그가 머뭇거리자 설화가 들고 온 비단 뭉치를 휙 풀어냈다.

일반인들은 구경조차 힘들다는 화폐. 엄청난 양의 지폐들이었다.

“선금으로 이십만 냥입니다.”

눈을 끔벅이던 지부장은 정신을 차리고는 점원을 불렀다. 이어서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본점에서 전서구 도착했지? 상황이 어때?

- 시세는 백이십삼 냥으로 이곳보다는 약간 비쌉니다. 다만 거래가 많이 없어서 보유량은 사천도 안 될 것입니다.

태웅방은 한중의 본사와 장안지부 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전서구를 날려 시세를 맞추고 있다.

그리고 최근 장안의 거래횟수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하여 지부의 은자 보유량이 더 많아진 상황이었다.

지부장은 설화를 향해 최대한으로 웃어 보였다.

“본사의 은자 보유량은 약 사천이며, 시세는 개당 백이십삼 냥 정도입니다.”

설화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녀의 거처가 그려진 양주산의 약도였다.

“본점과 지부에서 보유한 은자 모두를 매입하지요. 잔금은 이곳으로 운송해주면 그 자리에서 지급하겠습니다.”

지부장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태웅방이 생겨난 이래 역대 최고의 거래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수수료만 따져도 어마어마했다.

“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선금을 주셨으니 계약서를 곧 작성해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저희를 어찌 믿으시고.”

설화는 소매 사이로 드러난 흰 손을 뒤집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천천히 움직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탁상 위에 놓인 지폐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입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무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움찔거렸다.

펼쳐지던 지폐는 다시 차곡차곡 쌓이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설화는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러고는 등 뒤로 나직이 말했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내일부터 태웅방으로 들어오는 모든 은자는 가격에 상관없이 매일 오후 같은 장소로 배달해 주시지요.”

지부장은 아직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부인. 살펴 가십시오!”

그 순간 문을 나서려던 설화의 발걸음이 갑자기 정지했다.

갑자기 실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으며,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 이곳에서 꼬마 하나를 쫓아냈지요? 또다시 내 딸에게 그리한다면 중원에서 태웅방의 이름을 지워버릴 것입니다.”

설화가 나가자마자 긴장이 풀린 경비 무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지부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위험한 인물입니다. 거래에 있어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자네도 당할 수 없을 정도인가?”

“태웅방의 모든 고수를 소집해도 어림도 없습니다. 방금 펼친 격공섭물의 수준이라면 현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정도였단 말인가? 여하간 조심해야겠군. 그런데 방금 언급한 그 꼬마는 누구지?”

“아침에 황 대인 때문에 내보내야 했던 아이일 것입니다.”

지부장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확실히…… 어느 줄을 잡아야 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군…….”

“황 대인의 세력과 연줄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라면 방금 그 여인과는 절대 척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부장은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일각이 지난 이후였다.

“꼬마가 다시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 찾아오면 최고등급으로 대우해 주라고 해. 그리고 이 순간부터 황 대인을 상대하는 것은 원칙대로만 한다. 단, 첫 번째 계약이 성사되는 것은 확인해야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중에 전서구를 보내 아버지한테 협조 요청 좀 해줘.”

한중의 본점을 지키는 태웅방의 주인. 그는 바로 지부장의 아버지였다.

“예. 그리고 운송은 청운표국에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해. 당연히 그래야지.”

청운표국은 태웅방의 전각과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은자 수송 임무를 위임하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계약이 체결된 직후. 이날의 은자 시세는 하한가격에서 바로 상한선까지 폭등하고야 말았다.

한편 거처로 돌아온 설화는 원두막에서 칠현금을 튕기고 있었다.

앞에는 지폐가 가득 든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교주로 있었던 시절 빼돌렸던 마교의 재산. 그중에서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소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음이 멈추었다. 기다리던 은자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열 명의 쟁자수가 상자 다섯 개를 나누어 들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이십여 명의 표사들까지 보였다.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가용 가능한 인력이 총동원된 것이다.

“어디에 내려놓을까요?”

“그 자리에 놓고 가십시오.”

쟁자수들은 상자들을 최대한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설화를 바라보았다. 받아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표두가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차로 은자 육천오백 냥을 가져왔습니다. 그럼 선금을 제외하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화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쿠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원두막에서 상자 하나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쟁자수들의 중심에 정확히 내려앉았다. 그 순간 표사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침묵 속에 잠시 긴장감이 흘렀다.

“일차로 지폐 삼백만 냥. 우선 그 금액이 떨어질 때까지 은자를 계속 배달해 주십시오. 이후부터는 금자로 계산하지요.”

“알, 알겠습니다.”

* * *

콰앙-!

“도대체 어떤 미친X이야!”

구양회의 회주 황기.

그는 태웅방의 특별객실에 앉아 연신 씩씩대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대인. 환전하시고자 하는 은자가 모두 체결되었으니,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황기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살집에 눌린 의자가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내가 정말 그 가격에 환전하려고 했을 리가 없잖아! 손해가 얼마인지 알아? 지부장은 어디 갔어?”

“본점에 다녀오시겠다고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아마도 당분간은 뵙지 못할 것입니다.”

황기는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어디 사는 X인지나 말해.”

점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장은 신뢰가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고객에 대한 신상 정보는 절도사께서 오셔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못 알아낼 것 같아? 나 황기야. 어느 손을 잡을지 잘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저희 태웅방은 언제나 중립에서 원칙대로만 할 뿐입니다.”

황기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흥, 어디 한번 두고 보겠다. 너희들이 믿는 그년이 얼마나 태웅방의 뒤를 봐줄 수 있을지 말이야.”

“살펴 가십시오, 대인.”

황기가 사라지고 난 뒤 특별객실의 뒤쪽에 있는 비밀 문이 드르륵 열렸다.

장안으로 출타했다던 지부장이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다는 얘기가 있지. 근데 저건 돼지 새끼라 그런지, 사람보다 더 심한 것 같다니까.”

“하하. 맞는 말입니다, 지부장님. 그런데 황 대인이 왜 저리 격분하는 것입니까?”

“황기는 애초부터 은자를 환전할 생각이 없었어. 가격을 최대한으로 눌러서 낮은 가격에 다시 쓸어 담으려 했던 거야. 근데 다른 사람이 선수를 쳐서 허위 매물을 모두 쓸어갔으니 격분할 수밖에.”

“시세에 관여하던 황실이 사라지니 별 해괴한 일들이 다 일어나는군요. 여하간 재력가들끼리 붙었으니 앞으로가 재밌겠습니다.”

“우리야 수수료만 챙기면 그뿐이지만. 내 직감대로라면 둘 중 하나는 파멸을 맛보게 될 것 같아.”

“흥미진진하군요. 근데 얘기 안 해줘도 괜찮은 겁니까?”

“뭘?”

“황 대인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상대가 무림고수라는 말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닐지요?”

자리에 앉은 지부장은 찻잔을 채우며 나직이 말했다.

“오늘 표행을 다녀온 청운표국이 더는 의뢰를 받지 않겠다는 걸 겨우 설득시켜 놨어. 중립적인 입장에서 함께 침묵을 지키는 조건으로 말이지. 그러니까 절대 나서지 마.”

“표국이 의뢰를 안 받겠다고 했다고요?”

“그럴 만도 해. 지난번에 있었던 일향찻집 사건 알지?”

“장안이 뒤집혔던 사건인데 모를 리가요? 백발의 마두에게 주민 수백 명이 죽었지 않습니까? 관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던 걸 다른 마두가 나타나서 개 패듯이 제압해서 끌고 갔다고 들었지요. 근데 설마……?”

“그래. 그분이시란다. 오늘 표행을 갔던 표사 중에 일향찻집 사건의 목격자가 있었다더군.”

점원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중 무엇인가를 기억해내고는 재빨리 말했다.

“소문으로는 랑아대의 대장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들어본 것 같아. 무력에서도, 연줄에서도 황기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사천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던 갑부였다지만, 이곳 섬서에서는 어림도 없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다른 점원들 입단속 시켜놓고 특별히 조심하겠습니다.”

지부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서 내가 널 가장 신뢰하는 거다. 여하간 당분간은 은자 값이 계속 오를 테니, 너도 모아놓은 돈이 있으면 미리 바꿔놔.”

“흐흐흐.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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