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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이제는 내 뜻대로 살겠소 (3) (165/250)


165화 이제는 내 뜻대로 살겠소 (3)
2022.07.15.



“현정 사형. 표정이 왜 그래요? 오랜만에 왔는데 좋지 않아요?”

청해와 달리 현정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신마교에 의해 화산파가 무너졌던 악몽 같은 그날,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뚫고 유일하게 빠져나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는 아직도 사형제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눈앞에서 모두가 죽었어. 바로 이곳에서 말이야…….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명운 사형을 보니, 문파를 재건하려는 모양이던데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왜? 무엇을 위해서?”

“화산파의 명예나 긍지? 뭐 그런 거요.”

“명예와 긍지라……. 그런 허상을 좇다가 죽으면 그게 바로 개죽음이야. 목숨은 하나뿐이잖아? 어떻게 살다 죽을지는 내가 결정할 거야.”

“뭘 하고 싶은데요?”

현정은 고개를 올려 창공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의 양떼구름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맑게 빛났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거. 전장에서 우리가 구해준 백성들이 고맙다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있어. 그때보다 내 가슴이 뜨거운 순간이 없었거든. 변하는 세상 속에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

“확실히 사형은 무림인보다 관군이 체질에 맞는 것 같네요.”

“청해 사제는 돌아가고 싶어? 매화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며?”

“저는 파문당했잖아요. 애초부터 선택할 수가 없었다고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화산파의 대연무장을 지나쳐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의 추억을 자극해왔다.

“저곳이에요.”

청해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매화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연무장이 하나 있었다.

“매검지는 왜?”

매검지(梅劍地). 화산의 최정예인 매화검수들의 수련장소로, 일반 제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이대제자였던 현정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청해는 이미 경험이 있었다.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한번 가봤다가 매화검수들한테 죽도록 맞았어요. 무공을 훔쳐볼 의도는 없었는데…… 파문까지 당하고.”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현정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때의 사건은 화산파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

현정이 청해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좀 너무하는데? 매화검수나 되는 자들이 막내 항렬을 단체로 때리다니 말이야.”

“억울하지만 제가 잘못한 거니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아니, 그래도 좀 심했어. 왈패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때였다.

돌연 현정과 청해의 안색이 동시에 굳어졌다. 그들의 측면에서 일단의 무리가 접근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왈패보다 못하단 얘기네.”

청색 깃이 장식된 흰 도복과 매화 문양이 새겨진 장검. 화산파의 일대제자이자 매화검수들이었다.

청해가 다가오는 네 명을 향해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사, 사형들…….”

“파문당한 놈은 사형이라 부르지 마.”

청해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매화검수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현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중 항렬이 가장 높은 인물이 한 걸음을 다가왔다.

“무림맹에 있던 우리를 제외하곤 모두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사형제들이 죽어갈 때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이대제자들은 모두 도망치라는 문주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저도 겨우 빠져나온 겁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어째서 혼자만 살아남았는지 사실대로 고해.”

“제가 그들 중 가장 강했기 때문입니다.”

매화검수들이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그중 한 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왔다.

“그럼 무림맹으로 와서 사형들에게 합류할 생각은 안 하고 왜 군부로 간 거지? 설마 네가 우리 화산을 배신한 것은 아니더냐?”

현정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애써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제가 모시던 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문주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스승님까지. 그래서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뿐입니다. 이제는 제 의지대로 살겠습니다.”

“화산파가 오고 싶으면 오고, 나가고 싶으면 아무 때나 나갈 수 있는 동네 삼류 문파인 줄 알아?”

현정은 더는 눈앞의 사형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말을 섞다 보니 무림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금분세수라도 하길 원하십니까?”

금분세수(金盆洗手). 무림인이 강호를 떠나기 위해 하는 공식적인 은퇴식으로, 이것을 무사히 마치면 무림의 은원관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화산에서는 그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꿇어.”

“싫습니다.”

현정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매화검수들은 점차 분노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지켜보던 한 명이 검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자가 제지하며 속삭였다.

“아칠 사형, 저놈은 어쨌거나 관원입니다. 죽이면 곤란해집니다.”

“관원이기에 앞서 화산파의 이대제자 현정이다. 사문의 일은 관에서도 관여할 수 없다.”

현정은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듯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매화검수 한 명이 그의 무릎을 연달아 걷어찼다.

“꿇어, 새끼야!”

퍼억-! 콰직-!

현정의 다리가 꺾일 듯 흔들거렸지만, 굽혀지지 않았다. 입에서는 조금의 신음도 나오질 않았다.

“버텨보시겠다?”

“밟아!”

좌우에서 두 명의 매화검수가 발길질을 날리기 시작했다.

퍼퍽-! 퍼억-! 뻑-!

현정의 신형이 쉴 새 없이 휘청거렸다.

쓰러질 듯 위태로웠지만,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

옆에서 지켜보던 청해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참다못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비틀거리던 현정이 오른손을 다급히 내뻗으며 소리쳤다.

“너는 나서지 마!”

지금 이 순간에도 두 명이 그를 걷어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또 한 명의 매화검수가 눈이 뒤집히며 달려들었다.

“정신 못 차렸네?”

다가선 매화검수의 신형이 왼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회전했다.

동시에 벼락처럼 솟구쳐 오르는 오른발. 현정도 알고 있었다. 화산파의 퇴법 중 하나인 매화승천각(梅花昇天脚)임을.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비틀어졌다.

파앙-!

신발이 현정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바람을 뿜어냈다. 고작 이대제자가 매화검수의 퇴법을 피해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감히 피해?”

또다시 현정을 향해 더욱 거센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하지 않으려는 듯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복부에 주먹이 정통으로 꽂혔다. 내력까지 담겨 있는 일격이었다.

뻐억-!

“크윽.”

상체를 숙인 그의 뒤에서 두 명이 동시에 무릎 뒤를 걷어찼다.

파직-! 콱-!

굳건히 버티던 현정의 신형이 기어코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네 명의 매화검수는 그의 주위에서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퍼억-! 콰직-! 콰앙-!

현정의 상체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보였다.

지켜보던 청해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그의 오른손은 어느새 검집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순간 정신없이 두들겨 맞던 현정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동생은 나서지 마!”

언제나 사제라고 부르던 현정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동생이라 불러준 것이다.

“……현정 사형.”

당장에 검을 뽑고 싶었지만, 차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파문을 당했던 그 날의 아픈 기억. 자신의 모습과 현정이 겹쳐 보이기까지 했다.

청해의 뺨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매화검수들의 폭행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의 신음조차 내지 않다니. 상황이 이쯤 되자 때리던 자들이 오히려 기가 질리고야 말았다.

“오늘은 이쯤 하죠?”

“지독한 놈.”

“다시는 눈에 띄지 마라.”

악담을 한마디씩 퍼부은 매화검수들은 손을 털고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청해가 재빨리 현정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사형, 괜찮아요?”

“응……. 잘 참았어.”

“사형이야말로 왜 그냥 맞고만 있었어요?”

현정은 소매로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몸이 불편한 듯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화산에 진 빚은 이것으로 모두 갚은 거야.”

“그럼…… 다음번엔 그냥 패버려도 되죠?”

삼대제자가 매화검수들을 때린다니 어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픈 것도 잊은 듯 현정은 피식하고 웃었다.

“만약 네 차례까지 온다면.”

* * *

화산파의 양허각(陽賓閣).

이곳에선 지금 무림맹의 원로들과 군부의 장수들 간의 토론이 계속되고 있었다.

“양양성의 전투가 끝난 이후로 신마교의 활동이 완전히 정지했습니다.”

찻잔을 움켜쥔 소무는 입을 한 번 적셨다. 그러고는 제갈수영을 지그시 응시했다.

“휘나라의 군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군하고는 다시 공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요. 무엇인가 속셈이 있을 것입니다.”

“예, 틀림없습니다. 휘나라와 신마교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럴 때일수록 방심하지 말고 더욱 대비해야 합니다.”

소무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방비를 강화해주시고, 정보가 있다면 바로 우리에게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지원이 필요하면 서로 도와야 하지요. 우리 무림맹은 섬서의 관군들과 운명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소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림맹의 군사가 국가를 통칭하는 게 아닌, 섬서를 특정해서 지목했다. 속내가 뻔히 보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한중의 민심을 보니, 절도사께서 나라를 개국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요. 그래서 우린 그분께 걸기로 했습니다. 진회의 송나라나 원규의 포나라보다는 믿을 만하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내부에서도 불과 얼마 전에 거론되었던 부분이었다. 가능성만 제기되었을 뿐이거늘, 무림맹은 이미 그다음 수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세나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다시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그들이었다.

“지금 이것을 논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군요. 그러니 다음번에 제가 궁성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언제든지요.”

더는 이곳에는 볼일이 없었다. 인사를 마친 소무는 일광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각을 벗어나 양허각의 화원을 거닐 때쯤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 무림의 고수들을 처음 보니 어때?”

“몸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어.”

“저들 중에 네가 이길 수 있는 자는 절반도 안 될걸?”

“대장이 날 아직 몰라서 그래.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힘을 다 써본 적이 없어.”

소무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일광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을 보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일광의 표정이 굳어졌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을 본 것이다.

“얼굴이 왜 그래? 어떤 새끼한테 처맞았어?”

현정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별거 아니에요, 형님. 신경 쓰지 마세요.”

일광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닥치고 당장 안내해. 어떤 놈들인지 오늘 이빨을 전부 뽑아버릴 테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광은 화가 난다는 듯 계속 씩씩댔다. 어디서 얻어맞고 온 친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모습이었다.

그때 소무가 앞장서서 걸으며 말했다.

“상처를 보니 저항하지 않았군. 청해는 멀쩡하고 말이야.”

일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현정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미쳤어? 왜 그냥 맞고 와?”

“…….”

일광은 현정의 모습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눕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때 앞서 걷던 소무가 다시 물어왔다.

“기분이 어때?”

“후련합니다. 드디어 마음속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요.”

소무는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뒷짐을 쥔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기념으로 객잔에 들러 한 잔 마셔야겠군. 괜찮겠지?”

불어터진 현정의 얼굴이 씩 미소를 그렸다.

“후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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