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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민공(民供). 백성을 받드는 자 (1) (166/250)


166화 민공(民供). 백성을 받드는 자 (1)
2022.07.16.



“우리 대장님이 객잔의 주방장이었다고요?”

현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불어터진 얼굴로 놀란 눈을 한 모습이 자못 우스웠다.

그동안 일광과 청해가 다른 대원들에게 함구한 이유는 소무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그 봉인이 풀린 것이다.

“그렇다니까? 내가 그 집 단골이었어.”

일광이 술잔을 비우며 입맛을 다셨다. 소호객잔의 고기국수를 떠올리자 군침이 돌았다.

“세상에……. 상상이 안 되네요.”

소무가 피식 웃으며 부하들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청해도 단골이었어. 파문당하고 매일 혼자 찾아와 술에 취해 징징거리곤 했지.”

묵묵히 눈치를 보던 청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휴. 대장 형, 그걸 얘기하면 어떻게 해요?”

“뭐, 이제는 숨길 이유도 없잖아.”

그때 일광과 현정이 동시에 터지고야 말았다.

“하하하! 이 녀석,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청해 사제가 그런 시절을 보냈다니, 의외인걸? 지난 일이니 이제 잊어버려.”

소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맞아. 현정 말대로, 잊고 싶은 기억들은 이 한 잔의 술로 모두 털어내는 거야.”

일광과 현정. 그리고 청해도 동시에 잔을 높이 치켜세웠다.

“동시에 마시는 거다!”

“물론이죠.”

“자, 마셔요!”

술잔을 비운 이들 네 명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올라 있었다.

이들은 연거푸 다섯 잔을 더 들이마셨다. 그리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을 때쯤이었다. 소무가 홀로 술잔을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군. 천천히 마시다 와.”

일광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가려고, 대장?”

“손님이 찾아온 것 같아서. 이따가 막사에서 봐.”

일광이 안광을 빛내며 객잔 밖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정순하면서도 이질적인 기(氣)의 흐름이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았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은한 기운. 오늘 무림맹에서 만났던 고수 중 하나였다.

청해가 궁금한 듯 물었다.

“왜 그래요, 일광 형?”

“누가 찾아왔어. 아미파의 장문인 같은데?”

“우리 대장님을요? 무슨 일로요?”

“내가 그걸 어찌 알아. 신경 쓰지 말고 우린 술이나 마시자고.”

남은 셋이 다시 술잔을 기울일 무렵.

소무는 계산을 마치고 객잔의 문을 나섰다. 한 여승이 고목처럼 서서 합장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이거 서운한데? 나한테도 초면인 것처럼 대하다니.”

소무는 소리 없이 웃으며 그녀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잘 알잖아. 나는 이제 그쪽 세계의 사람이 아니야.”

소무는 금정사태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무림맹의 다른 원로들을 대할 때보다는 말투가 좀 더 부드러웠다.

“소식은 들었어. 옥화신녀하고 살림을 차렸다며?”

무림맹의 간부들만 비밀리에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대뜸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소무는 조금 당황했다.

“……아직 같이 사는 것은 아니야.”

“그럼 혼인도 하지 않고 딸부터 먼저 낳았다고?”

소무는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근데 승려가 속세의 일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아?”

금정사태는 마치 심술이 난 듯 미간에 내 천(川)을 그리고 있었다.

아미파의 문주인 그녀는 평소 기백과 위엄이 넘쳤으나, 지금은 그저 투정 부리는 한 여인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잠시 고민하던 소무는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그러고 보니 너와 연매는 앙숙이자 경쟁 상대였지. 예전에 둘이 한 번 붙은 적도 있었다며? 어떻게 됐지?”

서로 반대 세력에서 싸워왔던 금정사태와 옥화신녀. 두 여인 모두 성질이 대단했기에 내심 그 결과가 궁금했다.

연설화에게는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

금정사태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결코 승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겠군. 노련한 정파의 검후(劍后)가 마교의 젊은 신예에게 밀렸으니.”

“그 얘기는 그만하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으니까.”

“연매도 나처럼 강호를 은퇴했으니,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마.”

“이제는 연인이라고 편까지 드네. 언제는 강호에서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는 나밖에 없다면서?”

“이제는 시대가 변했어. 상황도 말이지.”

금정사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소무의 시선이 반짝 빛나는 그녀의 머리에 고정되었다.

한쪽 측면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연설화의 흑룡신장이 남긴 흔적이 분명해 보였다.

“……왜? 대머리 처음 봐?”

소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화가 많아졌군. 이제는 성질 좀 죽이고 살아. 승려가 이리도 참을성이 없어서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금정사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요즘 내가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아……. 우리 아미파에 골칫덩이가 하나 있거든.”

“문주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응.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난 아이가 있어.”

천살성(天殺星). 무공에 엄청난 자질을 보이지만, 천성적으로 강한 살기를 갖고 있기에 광마(狂魔)가 될 운명으로 알려져 있다.

“불가의 문파에 천살성이라니, 그것참 기구한 인연이로군. 그래도 아미파에서 잘 이끌어주면 되잖아?”

“말처럼 쉽지 않아. 고작 열한 살인데 일대제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해. 최근에는 대련 중에 실수로 상대를 죽이기까지 했어. 그것도 두 명이나……. 정말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상해보던 소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무공 수련을 중단시키고, 불문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게 하는 것이 좋겠군.”

“그래야겠지.”

말과는 달리, 금정사태는 그러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이 년 뒤에 열리는 후기지수들의 비무대회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불문 따위를 공부할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불광일선지를 포함한 아미파의 비전절학을 모두 전수할 계획이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둘은 어느덧 작별을 준비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딸이 기다리고 있거든.”

팔짱을 낀 금정사태는 코웃음을 쳤다.

“어디에서 기다려? 막사에서? 병사들만 가득한 군영에서 딸을 키우는 아비가 어딨어? 그러지 말고 우리 아미파로 보내. 내가 잘 보살펴 줄 테니.”

소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고개를 내저었다.

“내 딸의 머리를 빡빡 밀고, 비구니로 만들라고? 사양하겠어.”

이미 반응을 예상했는지, 금정사태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녀는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쯧쯧.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장안으로 돌아가는 소무는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그녀와 연을 쌓기 시작한 것은 강호 초출 때의 시기로, 상당히 오래전이었다. 개방의 허규와 더불어 스스럼없이 지내는 인물이었다.

경공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굳건한 장안의 성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성문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에 의문이 떠올랐다.

멀리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평소와는 도시의 분위기가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소무의 얼굴을 알아본 문지기들이 양발을 붙이며 기립했다.

“무슨 일이야? 왜 주민들이 한 명도 안 보이지?”

분명히 평소와는 달랐다. 최근 장안의 인구가 부쩍 늘어났기에, 성문에서부터 왁자지껄한 풍경이 펼쳐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폐허가 된 도시처럼 바람만 휘날리고 있었다.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오늘 한중에서 백성들이 몰려와 소식을 전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장안성의 주민들과 그들이 합심하여 모두 궁성으로 몰려갔습니다.”

소무는 며칠 전에 한중의 중심가에서 보았던 광경을 기억했다. 그들 중 일부가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우선 그곳으로 가봐야겠다.

“잘 알겠네. 고생들 해.”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궁성을 향해 나아갔다. 먼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궁성으로 향하는 주작로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무의 발걸음이 멈추고야 말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드넓은 궁성의 입구에 가득 들어차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구동성으로 무엇인가를 외치는 백성들. 그 광경을 목격한 소무는 가슴이 벅찼다.

“장양 황제 폐하 만세!!!”

“장양 황제 폐하 만세!!!”

“장양 황제 폐하 만세!!!”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심지어 몸이 불편한 자들까지도 보였다. 장안성의 주민들이 모조리 몰려나온 듯했다.

주변으로 병사들이 벽을 형성하여 궁성의 거리를 통제하고 있었지만, 백성들과의 마찰은 없어 보였다.

‘어찌 이런 일이…….’

한중에 소속된 구호대의 의상을 입은 백성들도 보였다. 성 밖의 촌민들도 합류한 듯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무를 발견하고 옆으로 다가왔다. 산와족 출신의 외팔이 무장 백약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어찌 보십니까?”

“백성들이 누군가를 황제로 만들려고 하고 있군. 그것도 강제로 말이지. 역사상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

백약은 고개를 내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껏 이 땅에 수백 명의 황제가 군림하였으나,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곳에 어떠한 세상이 열릴지 궁금하군요.”

“나도 기대되는군. 그런데 왜 장군께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으시지?”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몇 시진째 집무실에서 나오질 않으십니다.”

“그분은 황제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분이네. 게다가 권력에도 욕심이 없으니, 내키지 않으시겠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소무는 묵묵히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길 잠시 후. 돌연 그의 눈동자가 일순간 정지했다. 군중들의 틈새에서 낯익은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만세!”

양손을 번쩍 들고 있는 여자아이는 딸이 분명했다. 옆에는 백상과 백아도 함께 있었다.

소무는 황당한 표정으로 군중을 헤치며 소소에게 다가갔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아버지를 발견한 소소는 방긋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기 있으면 간식 준대요. 히히.”

주변을 둘러보자 주민들이 한쪽에서 만두와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소무는 딸아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관원이 이런 곳에 오면 못 써.”

“힝. 나 아직 간식 못 받았는데.”

“순라군에서 받은 급료는 아껴놨다가 뭐 하게? 사 먹으면 되지 않느냐.”

아버지의 가슴에 파묻힌 소소의 얼굴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요. 그건 안 쓸 거예요.”

“휴. 얼마나 모았는데?”

소소는 뭐가 좋은지 혼자서 키득거렸다.

“몰라도 돼요. 내가 아버지보다 부자예요. 히히히.”

“그것참 부럽구나. 전낭이 두둑하면 마음도 든든해지는 법이지.”

소무는 딸아이를 안고 유유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로 백약 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남아있는 두 명의 아이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 녀석들이, 아버지한테 얘기도 안 하고 여긴 왜 왔느냐!”

그는 하나밖에 없는 오른손으로 아이들의 엉덩이를 한 대씩 때리곤, 막내딸을 안아 들었다.

백아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말했다.

“흐이잉. 소소 언니가 오자고 했어요.”

백약은 한숨을 내쉬며 아들에게도 따라오라고 턱짓을 보냈다.

그러면서 품속의 백아에게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의리 없이 언니를 이르면 안 되지. 배가 그리도 고팠더냐.”

“……네.”

백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휘나라의 무장이었다. 장양에게 투항하던 시점에는 지닌 재산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셋이 함께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백약은 취사 막사에서 끼니를 해결했으며, 아이들은 언제나 설화원에서 주는 무료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오늘은 군단의 무관이 된 그가 처음으로 녹봉을 받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우리 가족이 함께 맛있는 걸 먹어보자꾸나. 앞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 아버지한테 얘기하거라.”

아들 백상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물었다.

“오리고기가 먹고 싶어요, 아버지. 사주실 수 있어요?”

모처럼 백약 부장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날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근데 지금 문을 연 음식점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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