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셋을 세겠다 (2)
(173/250)
173화 셋을 세겠다 (2)
(173/250)
173화 셋을 세겠다 (2)
2022.07.23.
연설화는 거처의 옷가지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얼마 뒤에는 이사를 가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전부 가져갈 필요는 없겠지.’
주거지를 옮기더라도 이곳은 아이의 무공 수련 장소로 계속 이용해야 했다.
무엇보다 팔 성에 이른 소소의 용격사자후(龍擊獅子吼)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을 즉사시킬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다. 인적이 없는 이곳이 아니라면 수련할 곳이 없었다.
한참 준비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뭐 하고 있어?”
소무였다. 그의 복장이 평소와는 달랐다. 사복 차림에 머리에는 죽립을 쓰고 무림인으로 위장한 모습이었다.
“보시다시피. 근데 어디 가려고?”
“잠시 휘나라에 정찰 좀 다녀오려고. 요즘 너무 조용한 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아내야겠어.”
설화는 앞서 백묘진을 심문하다가 들었던 내용을 기억해냈다.
“황제 놈이 개봉으로 천도한다며? 그래서 정신없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근데 영 석연치가 않아. 경계를 강화한 데다, 움직임이 완전히 중단되었거든. 무림맹을 공격하던 신마교도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하여간 수상해.”
“나는 우리 낭군님이 더 수상한데? 부하들은 뭐하고 왜 대장군이 직접 가?”
소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탐꾼들이 모두 죽었어. 개방의 정보까지도 모두 차단되었고. 위험을 계속 감수하는 것보다는 내가 한 번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제 나흘 남았어.”
혼례를 나흘 남겨두고 그 안에 국경을 넘어 적국을 염탐하고 온다니? 그녀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다.
“알잖아. 나흘이면 중원대륙의 끝까지도 다녀올 수 있어.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지.”
소무는 고작 이틀 안에 옛 송의 수도였던 절강성의 임안까지 주파해낸 적이 있었다. 설화가 그의 능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소소가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더라. 그러라고 했어.”
“그렇게 해.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출발해야겠어. 소소한테는 적당히 얘기 좀 해줘.”
“걱정하지 마. 우리 딸은 내가 잘 살필 테니까. 그리고…….”
설화의 붉은 입술이 소무의 귓가에 서늘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늦으면 어떻게 될지 알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나도 연매한테 죽고 싶지는 않아.”
둘은 잠시 포옹을 하고는 짧은 작별을 고했다. 설화는 소무가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가 남겨놓은 향취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 낯익은 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왔다.
붉은 매화가 수놓아진 단아한 옷을 입은 여인. 자신의 동생인 연초희였다. 설화원의 수업을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오늘은 일찍 끝났네.”
“응. 혼례 준비는 잘 되어가?”
“준비할 게 뭐가 있겠어. 여기서 조용히 형식만 차릴 건데.”
설화는 예복조차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다. 소무나 그녀나 나이가 적지 않았기에, 거창한 의례보다는 형식적으로만 끝낼 참이었다.
하지만 초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오늘 소소가 친구들 초대했는데.”
“나도 알아. 애들 오면 맛있는 음식들이나 먹여주려고.”
초희는 마루 맡에 앉아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부 다 오라던데?”
“……응?”
“설화원의 친구들을 전부 다 오라고 했다고.”
연설화의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렸다.
“……뭐?”
설화원의 아이들을 모두 합치면 얼추 천 명이 넘는다.
연설화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갑자기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려왔다.
“계십니까?”
“실례합니다~”
이곳에 손님이 찾아올 리가 없었기에 설화도 어리둥절했다.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은 아는 인물이었다. 태웅방의 장안 지부장이 직접 온 것이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태웅방입니다.”
지부장의 뒤에서 네 명이 장식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최근엔 거래를 요청한 적이 없었기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죠?”
“혼례 소식을 듣고 축하선물을 좀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태웅방의 특별 고객께 드리는 작은 마음이오니 부담 갖지 마시고, 부디 받아주십시오.”
“……어떻게 알았습니까?”
지점장은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오늘 따님이 저희 지점에 찾아와서…… 자랑하고 갔습니다.”
“…….”
연설화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으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혹시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연설화는 상황을 짐작해내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놓고 가십시오.”
“예. 그리고 혹시…….”
“말씀하십시오.”
“오는 길에 보니 군순포에서도 근무 인원을 빼고 전원 참석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날 저희도 같이 참석해도 괜찮을지요?”
군순포에서도 최소한 삼백 명 이상은 온다고 봐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관에서는 수천 명이 올지도 모르는 일.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졌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황이었다. 거기에 물을 몇 방울을 더 얹는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시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나흘 뒤에 뵙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태웅방의 일행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설화가 아무 말이 없자, 옆에 있던 초희가 물었다.
“어떡해?”
설화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나직이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지금부터 딸에게 어미의 능력을 보여줘야겠지. 나 좀 도와줘야겠어, 초희야.”
“응……. 그보다 일단 장소부터 바꿔야겠는데?”
* * *
황하의 물 위를 한 줄기 빛살이 물수제비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물살이 거세 어지간한 고수들은 수상비를 펼칠 엄두조차 못 내는 장소였으나, 소무는 마치 평지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목적지는 낙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낙양을 넘어 휘나라의 도읍인 개봉까지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두 시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곳곳에 포진해 있는 정찰선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개조된 어선들이로군.’
관군의 함선이라고 보기에는 대부분 크기가 너무 작았다. 아마도 휘나라 군부에서 어부들의 배를 몰수한 것이리라. 지금까지는 휘나라가 황하에서 함선을 건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무는 황하의 거친 물살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의 틈새를 빠르게 돌파해나갔다.
정찰선에서 휘나라의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소무의 시야에 맹진항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을 이끈 것은 항구 안쪽에 새로 만들어진 조선소였다. 놀랍게도 이곳에선 지금 수많은 대형 전함들이 건조되고 있었다. 이미 수십 척은 건조를 마친 채 진수를 대기 중인 상태였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로군. 이 함선들이 건조되면 장안이 위험해지겠지.’
소나라는 함곡관과 동관을 사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다. 적군이 수로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란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준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밤 조선소를 파괴한다.’
소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우선 주변을 정찰해 보았다.
한데 붙어서 제작 중인 선박들과 주변에 세워진 망루들. 그리고 천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반 시진 동안 살펴본 결과, 이렇다 할 위험요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동안 휘나라는 자국의 영토가 기습을 받아본 전례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인지 보기보다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
함선의 위치까지 모두 확인한 소무는 근처에 몸을 숨긴 채 날이 어둑해지길 기다렸다.
가부좌를 틀고 무아지경에 빠져 운기조식을 하길 세 시진. 그의 눈이 서서히 떠지며 맹수처럼 가라앉았다.
검을 뽑아 든 그는 호흡을 크게 한 번 들이켜며 자세를 잡았다. 이곳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없는 것을 확인했기에,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파앙-!
섬전처럼 내달리는 그의 신형이 진수를 대기 중인 선박의 측면을 향해 전력으로 다가갔다.
콰아앙-!!!
거센 폭음과 함께 선박의 한쪽이 파괴되며 잔해가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경계병들이 다급히 뛰쳐나오며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다닥다닥 늘어놓은 사십여 척의 완성된 전함들. 함대 구성을 앞둔 이 귀한 선박들이 차례대로 터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앙-! 콰쾅-!! 콰콰콰쾅-!!!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한 줄기 섬전(閃電)이 배의 측면을 갈라내며 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장수 중 한 명이 달려오며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당, 당장 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병사들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소무는 이미 완성된 전함 중 절반 정도를 파괴한 이후였다.
소무는 방향을 틀어 건조 중인 함선이 밀집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고맙게도 한군데 모아놓고 있었기에, 굳이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누가 저런…….”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선박을 한 군데 밀집시켜 건조하던 것이 가장 큰 화근이었다.
망루 위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겼지만, 그의 움직임은 조준하는 속도보다도 빨랐다. 당연히 맞을 리가 없었다.
파파파팟-!
소무가 지나는 흔적을 따라 화살들이 바닥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파괴된 선박의 잔해가 비산하고 있었다.
그의 검에서 뿜어지는 서늘한 검기(劍氣)는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갈라냈다. 공격당한 선체는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히 부서져 나갔다. 아무도 그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보다 못한 장수가 호각을 불며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을 펼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삐이이익-!!!
지휘관들의 신호에 따라 병사들이 조선소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가 선박들의 틈새를 비집고 물고기처럼 휘젓고 다니는 통에, 공격할 방도가 없었다.
콰아아앙-!!!
또 한 대의 선박이 파괴되는 소리였다.
남은 함선은 이십여 척. 그것을 마저 파괴하려던 소무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측면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넓은 막사가 보였다.
그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재빨리 그곳으로 나아갔다.
부아아악-!
막사의 천막이 찢어지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돼지우리 같은 막사에 수백 명이 뒤엉켜 있었다. 조선소의 기술자들이 모여있는 숙소였던 것이다.
이들을 처치하면 자국이 더욱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소무의 검 끝이 전면을 향했다.
“살, 살려주시오.”
“제, 제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소무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그들의 신체에 인두로 그을린 노예의 문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강제로 끌려와 노역당하는 백성들이란 말인가.’
죄 없는 이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소무는 등을 돌려 나가려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장안으로 보내주겠소.”
기술자들은 몸을 움찔거렸으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내가 막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소. 아직 이십여 척의 전함이 남아있으니, 원한다면 황하의 급류를 타고 장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오.”
소무가 말을 하는 동안 기술자들도 상황을 파악해 보고 있었다. 막사 밖의 광경과 소란으로 보아 무엇인가 사달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지옥 같은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면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터였다.
비록 정찰선들이 깔려 있었지만, 대부분이 작은 어선이지 않은가. 전함을 타고 급류를 이용해 나아간다면 그들을 충분히 따돌릴 수가 있었다.
“섬서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제 가족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곳에 더는 미련이 없습니다”
기술자 중 팔 할 이상이 술렁거렸다. 일부 남으려는 자들도 있었으나 강요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당신들 중 대표자는 앞으로 나와보시오.”
강인한 인상의 중년인이 소무를 향해 다가갔다.
“접니다…….”
소무는 품속에서 자신의 명패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소나라의 병사들을 찾아 이것을 보여준다면 당신들을 지원해 줄 것이오.”
한눈에 보아도 귀해 보이는 황금빛 옥패였다. 중년인은 거기에 새겨진 문구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대, 대장군……?”
군의 최고 지휘관이 혼자서 적국에 와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패를 받아든 그는 어쩔 줄 몰랐다.
소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며 그를 재촉했다.
“병사들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채비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소무는 등을 돌려 막사 밖으로 나왔다.
이미 수많은 병사가 몰려와 있었지만, 장애물들이 많아서 진을 펼치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소무는 선박들이 밀집한 곳에서 빠져나와 넓은 공터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병사들은 거리를 재며 그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을 지휘하는 장수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포위망으로 들어와 주니 고마울 수밖에.
잠시 후 걸음을 멈춘 소무는 공터 한가운데에서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겹겹이 포위하며 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순간 죽립 아래로 드러난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나는 소나라의 대장군 소무다. 세간에서는 나를 귀검무적(鬼劍無敵)이라고도 부른다더군.”
그 순간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것이다. 몇몇은 양양 전투에서 직접 그의 무위를 목격하기도 했었다.
소무가 검을 비틀자 검날이 달빛을 머금으며 밝게 빛났다. 검이 진동하며 맑고 청량한 검명을 울려댔다.
찌이이이징-!
시간을 오래 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봉화가 올랐으니 늦어도 이틀 안에는 낙양성까지 소식이 당도할 것이다. 그전에 성내에 잠입하여 정찰을 끝마쳐야 했다.
“혹시라도 너희들 중 강제로 징집된 자가 있다면,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거라. 지금 휘나라의 병사임을 포기한다면 살 수 있다.”
“…….”
포위하고 있는 것은 병사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들 전체가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있었다.
이곳에는 초인을 상대하기 위해 훈련된 부대도 없었으며, 그를 막을 수 있는 내로라하는 장수도 없었다.
“셋을 세겠다.”
/20220723155357131083_EC868CEBACB4ECA084EAB8B0+ED919CECA780+2ECB0A828EC98A4E.png 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