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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셋을 세겠다 (3) (174/250)


174화 셋을 세겠다 (3)
2022.07.24.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은 소무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반경 백여 장에 걸쳐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져 있었다. 멀쩡한 시신은 한 구도 없었다. 공통점은 일격에 당한 듯 상흔이 모두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소무의 앞에 오십여 명의 병사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 처음부터 싸우기를 포기한 징집병들이었다.

비록 정예부대는 아니었지만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단 한 명에게 초토화를 당했다. 그 무서운 광경을 지켜보고도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약속대로 목숨은 살려주겠다. 왼팔과 오른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라.”

온전히 보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군단에 합류하거나 무고한 백성들에게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징집병들은 오히려 고맙다는 표정으로, 사용하지 않는 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무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느새 그는 징집병들의 사이를 폭풍처럼 휘어 감고 있었다.

휘리리리릭-!

팟-! 파파팟-!

가늘고 짧은 핏줄기가 사방에서 튀어 올랐다.

“큭!”

“으윽!”

징집병들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비집고 나왔지만, 비명을 지른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팔이 잘려나간 것이 아니라, 손목의 힘줄만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일각 안에 이곳을 떠나거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벼락처럼 빠른 검술. 그것을 마주한 징집병들은 항거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와 경외심을 느꼈다.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맹진항을 벗어나기 위해 내달렸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한쪽 손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상 다시 휘나라의 부대에 편입될 일은 없을 터였다.

소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조선소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쩡한 선박들이 하나씩 황하의 강물 위로 빠르게 진수되고 있었다. 조선소의 기술자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탈출을 서둘렀다.
잠시 후 첫 번째 전함이 출발을 앞두고 갑판으로 몰려들었다.

“고맙습니다, 대장군!”

“장안에서 뵙겠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예 생활을 탈출하고 낙원으로 떠나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진심이 묻어나있었다.

소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한가롭게 이곳에 계속 머물 수가 없었다.

맹진항에 봉화가 오른 이상, 하루 이틀이면 낙양까지 기습 소식이 도착할 것이었다. 그 전에 정찰을 끝마쳐야 했다.

소무는 낙양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남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가는 도중에 마을 몇 개를 마주칠 수 있었다. 이곳은 섬서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빈곤한 삶을 사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눈에 생기가 없고 병들어 있었다.

소나라와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같았다.

‘이들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찌해야 저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소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어찌 낙양뿐이겠는가. 이미 휘나라는 중원의 절반 이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몽골초원에서 서장 고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세상을 전부 지배하려는 듯 끝없이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들의 광기에 수많은 백성이 고통받고 있을 터.

‘전쟁으로 휘나라의 영토를 되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평화를 위한 천하일통은 개인의 야망을 포장한 학살자의 망상일 뿐, 오히려 민초들의 고통만 더욱 거세질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싸우지 않고 천하가 태평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지.’

휘나라의 황제를 만나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정보는 지금도 오리무중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기만 했다.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먼 곳으로 낙양의 성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소무는 인기척을 죽이고 그곳을 살펴보았다.

장안이나 한중은 백성들이 성문을 분주히 오가며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반면, 이곳은 그러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완전히 통제되어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도시였다.

성문을 오가는 자들은 대부분이 병사들이었다. 또는 그들이 부리는 노예들이 전부였다.

‘쉽지 않겠군.’

성벽 위의 경계 또한 빈틈이 없었다. 넘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문제는 이곳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완안후이와 오룡상장들이었다. 이곳에선 눈에 띄지 않고 몸을 사려야 했다.

성 밖에서 무려 한 시진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먼 곳에서부터 먼지가 일며 일단의 보병부대가 등장했다. 그들의 뒤로 수백 명의 백성들이 줄줄이 끌려오고 있었다.

“빨리 안 걸어?”

“뒤처지는 놈들은 뒈질 줄 알아!”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마을에서 잡아 온 주민들인 듯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손목이 밧줄로 묶여 있었으며, 몰골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는지 걸음걸이마다 힘겹게 느껴졌다.

그때 중간쯤에서 남자아이 하나가 넘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 하나가 달려가 아이의 배를 걷어찼다.

콰직-!

“아얏!”

“빨리 안 일어나? 또 한 번 요령 피우면 죽인다.”

아이는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서 바동거렸다. 그 때문에 행렬이 늦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눈치를 보던 병사가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살기(殺氣)가 가득한 눈빛. 그가 뭘 하려는지 모두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자들이 경악하는 순간이었다.

노예들의 틈새를 비집고 누군가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아직 어린애이지 않소? 내가 업고 가겠소.”

은밀히 노예들의 틈새로 합류한 소무였다. 그는 위장을 위해 진흙을 옷과 얼굴에 묻혀놓은 상태였다.

검을 휘두르려던 병사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뭐야? 손목에 밧줄은 언제 풀었어?”

“저절로 풀렸습니다.”

“이 새끼가 나랑 지금 장난해?”

병사의 발길질이 무릎을 향해 다가왔다. 내키진 않았지만 맞아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콰직-!

“크윽!”

충격은 전혀 없었지만, 소무는 신음을 내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를 향해 발길질이 연달아 이어졌다.

퍼억-! 퍽-! 뻐억-!

“으윽!”

딸아이를 제외하면 누군가에게 맞아본 것은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대본 자가 없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병사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이게 뒈지려고 어디서 말장난을 해.”

그가 어찌 알겠는가. 자신이 지금 적국의 군정장관을 걷어차고 있다는 것을. 그는 다른 노예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려는 듯 한참이나 때렸다.

공격이 멈추고 난 이후 소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닥치고 네 자리로 돌아가.”

병사는 다시 그의 손을 묶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도망갈 기력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소무는 아이를 안은 채 절뚝거리며 대열의 후미로 걸어갔다.

자리에 도착하자 어깨 위의 아이가 눈물을 훔치며 고마움을 표했다.

“고, 고맙습니다…….”

“아저씨는 멀쩡하니 신경 쓸 것 없다. 몇 살이지?”

“여덟이요…….”

“내 딸과 같은 나이구나.”

“정말요?”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선 너와 이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고 데려가고 싶다만, 지금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구나.”

“…….”

“잠시 힘든 일을 겪게 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란다. 버텨낸다면 반드시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해주겠다.”

아이는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말이 따듯한 위로가 되는지,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그때 대열의 선두가 성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뒤따르던 소무는 성내를 살펴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거리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머릿수만 보더라도 이곳의 병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들의 사이사이에는 가축처럼 끌려다니는 주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어딜 가나 다르지 않구나.’

휘나라는 점령한 도시의 사람들을 가축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했지만,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돼지 사육장 같이 생긴 넓은 공터였다. 바닥에는 짚단이 깔려 있었고, 찢어진 천막으로 주위를 두른 모습이었다.

“어서 들어가!”

“빨리!”

소무는 구석에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휴식은 길지 않았다.

일식경도 되지 않아 병사들이 다시 찾아왔다.

“너, 그리고 너! 그리고 저놈도.”

십인장으로 보이는 자가 손가락으로 십여 명을 지목했다.

공교롭게도 소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연설화가 챙겨줬던 육포를 꺼내어 남몰래 아이의 옷자락에 넣어주었다.

“아저씨가 한 말 명심해라. 당장은 힘들겠지만, 버티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이 악물고 살아남아야 한다.”

“네, 아저씨……. 고맙습니다.”

소무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작별을 고했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죽고 싶어?”

“지금 갑니다.”

그는 병사들을 따라 성내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궁성이 있는 방향이었다. 소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특이점이 있는지 계속 살펴보았다.

‘훈련 수준이 제법이군.’

소나라의 정예병사들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싸워왔던 적병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런 병력을 가지고도 뜸을 들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잠시 후 소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한쪽에 산처럼 쌓인 시체더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괴롭힘을 당하다가 불쌍하게 죽어간 백성들의 모습이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내가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궁성으로 진입하자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노역 장소였다. 수많은 인파가 벽돌을 나르고 전각을 세우고 있었다.

“너는 저기! 너는 저곳으로 가!”

소무는 지시받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채찍을 움켜쥔 감독관이 그에게 작업을 지시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옮겨! 오늘 작업량 못 채우면 전부 굶을 줄 알아!”

“알겠습니다.”

다른 자들처럼 등 뒤로 벽돌을 움켜쥔 소무는 왕복하며 주변을 살폈다. 노역 일은 다양했다. 군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업은 노예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도 그의 흥미를 끄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도 특별한 것은 없군. 다른 곳을 확인해봐야겠어.’

기회를 엿보던 소무의 시야로 감독관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비어있는 전각이 보였다.

“너, 왜 일 안 하고 요령 피우고 있어?”

“허리가 아파서요. 조금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감독관은 황당한 얼굴로 소무를 바라보았다. 그는 비어있는 전각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이놈이 처 돌았나.”

채찍을 움켜쥔 채 씩씩대며 소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감독관. 한 호흡이 더 지났을 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털썩-!

소무는 재빨리 그의 옷을 벗겨내어 갈아입었다. 그의 시신을 구석에 은폐시킨 후 전각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둘러야겠군. 날이 어두워지면 통금이 시작될 것이니, 행동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어졌다. 낙양성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찰하길 반 시진.

공방이 밀집한 장소를 벗어나는 순간 소무의 발걸음이 멈춰 세워졌다. 넓은 분지 안에 분주히 움직이는 수많은 인파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엔 소무의 관심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저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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