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어둠 속에 사는 자들 (3) (180/250)


180화 어둠 속에 사는 자들 (3)
2022.07.30.


소무는 자신의 관복에 숙련된 살수만이 맡을 수 있는 추혼향(追混香)을 뿌려놓은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든 살왕이 거리를 잴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소소의 움직임이 허락되는 공간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부터 삼백 장 이내였다. 양주산에서의 사자후 수련도 당분간 중단되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예외는 없었다. 소무가 즉시 달려올 수 있는 거리 삼백 장. 이 거리를 벗어나려고만 하면, 언제나 어둠이 아이를 끌고 갔다.

궁성 어딘가의 인적 드문 공터.

자라처럼 목을 뺀 소소는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했다.

“심심해……. 너무 심심해…….”

설화원은 삼백 장을 벗어나 있었으며, 추밀원에 있는 아버지도 낮엔 바쁘다고 놀아주지 않았다.

“에휴. 아저씨, 나랑 같이 놀래요?”

“…….”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소소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주변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아저씨, 어디에 숨어있어요? 내가 찾으면 나랑 놀아줄래요?”

다시 한번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목표를 설정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으니.

소소는 주변을 이 잡듯이 뒤지며 그를 찾아다녔다.

근처의 전각들을 살펴보았으며, 지붕 위에도 모두 확인해 보았다. 그러길 일다경이 지났음에도 어떠한 흔적조차 찾아낼 수가 없었다.

“……어디 갔지?”

팔짱을 낀 소소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허리춤에서 퉁소를 뽑아 들었다. 최근에 배운 기술을 써먹을 생각이었다.

풀잎처럼 얇은 아이의 입술이 퉁소로 파고들며 은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합일성소(心合一聲召). 선음지체(仙音之體)의 체질로 신선의 오감을 타고난 자만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었다.

퍼져나가는 음파에 자신의 감각을 싣고, 그것은 다시 되돌아와 주변의 모든 것을 연주자에게 낱낱이 전달해준다. 음파가 전달되는 곳이라면 개미의 움직임조차도 감지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반각이 지난 후. 소소가 방긋 웃으며 어딘가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갔다.

근처에 있는 전각의 담벼락 아래였다. 걸음을 멈춘 소소는 양팔을 벌려 음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찾았다! 히히.”

아이의 팔에 안긴 무엇인가가 연기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곧 흑의를 입은 한 사내의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

그는 적지 않게 놀랐다. 자신이 누구인가. 어둠 속의 존엄인 살왕이 고작 어린아이에게 발각되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저는 소소예요. 우리 아버지가 두 번 웃으라고 지은 이름이래요.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알 거 없다.”

살왕은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한 마디만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치. 너무해.”

소소는 삐진 얼굴로 등을 돌려 주저앉았다.

다리를 오므리고 얼굴을 파묻고 있길 잠시 후. 근처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다시 일어서서는 그것으로 전각의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조금씩 형태가 드러났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무섭게 생긴 얼굴이었다. 누굴 그린 것인지는 옷 모양에서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친구 한 명도 없는 나쁜 아저씨.”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던 소소는 기분이 조금 풀리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어딜 보아 저렇게 흉악하게 생겼느냐.

머릿속으로 들려온 목소리. 전음이라는 기술이었다.

소소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왜요? 똑같잖아요.”

그때 담벼락 옆으로 그림자가 꿈틀대며 살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한번 보아라. 친구 없다는 말은 참아도, 내가 저렇게 생겼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겠구나.”

살왕은 날카로운 인상 속에 남자다운 기개가 서린 얼굴이었다. 그는 외모에 대해 특히 민감했다.

“잠깐만요.”

소소는 다시 돌멩이를 쓱쓱 움직이며 그림을 몇 번 덧대었다. 그러자 벽에 그려져 있던 인상 쓴 얼굴이 어느새 폭소하는 얼굴로 뒤바뀌었다.

일순간 살왕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져버렸다.

“아저씨, 웃으니깐 그림하고 똑같아요.”

살왕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웃어본 적이 없다.”

“거짓말하지 마요. 방금 내가 분명히 봤어요.”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소소는 벽에 자신의 그림을 그려 넣고 있었다. 먼저 그려놓은 살왕의 바로 옆자리에 말이다.

“아저씨는 근데 왜 친구가 없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살왕의 눈빛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항상 조용히 있잖아요. 우리 평화반에도 있어요. 아저씨처럼 혼자서 조용히 있는 친구요. 그래서 내가 간식도 나눠주고 놀아줬어요.”

아이가 마치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친구 해줄까요?”

“필요 없다.”

고개를 다시 돌린 소소는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에 열중했다. 일각이 지날 때쯤 그럴듯한 작품 하나가 완성되었다.

“다 그렸어요. 어때요?”

살왕은 팔짱을 끼고 무심한 표정으로 그림을 훑어보았다.

자신과 아이가 손을 잡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실력이 꽤 괜찮았다.

“생각보단 제법이구나.”

생각지도 않았던 칭찬에 싱글벙글해진 소소는 돌멩이를 그림 아래에 붙이고 연신 재촉했다.

“그림 밑에 이름을 써야 해요! 빨리 말해줘요.”

살왕은 잠시 머뭇거렸다. 무시할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한테 이름을 알려준다고 한들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백리현.”

“히히. 이름이 멋있네요. 성이 백 씨예요?”

“아니다. 아저씨는 백리세가 출신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그는 오래전 멸문한 것으로 알려진 백리세가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어쨌거나 그런 내막은 소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말동무가 생겨 신이 나는지 입이 귓가에 걸려있었다.

“완성!”

백리현은 그림 밑에 써진 글귀를 읽어보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소소 친구 백리현이라……. 이름만 쓴다더니.’

“아저씨, 지금 또 웃었어요!”

숙련된 살수는 어떤 순간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화들짝 놀란 백리현은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웃은 거 아니다.”

“그럼 운 거예요? 이따가 아버지한테 얘기해줘야지. 히히히.”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이었다. 검성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이 전해진다면 그보다 더한 망신이 없을 터.

“얘기하지 마라.”

“음. 아저씨 하는 거 봐서요.”

소소는 당황해하는 백리현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재밌는 놀이라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전각 안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돌계단을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이 정사를 논하는 신성한 자민전의 벽에 낙서하는 거야!”

“흐잇!”

화들짝 놀란 소소는 후다닥 도망쳤다. 그러나 도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벽면에 인상착의와 이름까지 큼지막하게 써놓은 상태인 것을.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나이가 지긋한 관원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벽면의 낙서를 살펴보았다. 동시에 분노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소소랑 친구 백리현! 요 녀석들, 내가 아버지한테 다 이를 거다!”

재빨리 도망친 소소는 근처의 다른 전각 뒷마당에 숨었다. 그러더니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물었다.

“아저씨, 이제 우리 어떡해요? 다 이른대요.”

백리현은 황당하다는 눈빛이었다.

“우리라니? 낙서는 너 혼자 했는데, 왜 나까지 걸고넘어지느냐.”

“친구는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함께하는 거랬어요.”

“나를 공범으로 만드는구나.”

소소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의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뭐가 말이냐.”

“요렇게 그림자에 숨는 거요. 나도 알려줘요. 아버지랑 숨바꼭질할 때 써먹을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공을 알려달라고 하고 있었다. 사슴처럼 순수한 눈망울로 말이다. 무림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살문이 아니라면 전수할 수가 없다.”

“그럼 나도 살문 할래요~”

“어려서 그런지 겁이란 게 없구나. 살문이 뭐 하는 곳인 줄 아느냐?”

“나도 다 알아요. 지켜주는 거잖아요. 할아버지도 지켜주고, 나도 지켜주고.”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전문적인 암살집단이었다. 무림의 역사상 살문의 실력이 제일이었다. 수년 전 휘나라와 신마교의 협공으로 멸문을 당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살왕 백리현은 살문 최후의 생존자였다.

“손에 피를 묻히는 길이다. 관심 두지 마라.”

“나는 피를 안 묻히고 할 수 있어요.”

쪼그만 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있었다.

백리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먼 곳을 응시했다. 그 또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게 된다면 살문의 이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 살문에게 필요한 것은 암살자가 아니라, 문파의 명맥을 이어줄 수 있는 전승자다. 최고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아이가 분명하지만…… 그전에 검성의 딸이 아니던가.’

백리현은 소소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가 없었다. 중후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 환골탈태를 거쳐 무공을 펼치는 데 최적화된 신체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타고난 근골과 선음지체의 자질까지.

살문의 유지를 이어받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아이였다. 어찌 고민이 되지 않겠는가. 죽을 때까지 더한 적임자를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문제는 아이의 아비인 검성이 허락할지 확신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소소가 백리현의 옷깃을 흔들며 다시 물어왔다.

“나 살문하게 해줄 거예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이요?”

백리현은 아이의 얼굴을 은근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한테 비밀로 하겠다면, 살문의 일원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겠다.”

일단 일을 벌여놓고 볼 참이었다.

나중에 검성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무림의 규칙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에 무턱대고 무효로 돌리려고 하지는 않을 터.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명예 단원으로 남겨놓으면 그뿐이었다. 이후 자신이 죽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살문의 전승자가 되는 셈이었으니.

소소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백리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좋아했다.

“알았어요. 비밀로 할게요. 히히.”

“일단 장소를 좀 옮겨야겠구나.”

이곳에서 거사를 치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궁성을 산책하는 주민들이나 순찰을 다니는 순라군의 관원들까지. 이곳은 보는 눈이 많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비어있는 전각이 하나 있었다. 수확기가 지나면 비축창고로 사용될 공간이었다. 넓은 공간이었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소와 마주 보고 선 백리현은 뒷짐을 지고는 말했다.

“살문의 입단식이다. 내게 삼배지례(三拜之禮)를 올리거라.”

“삼배지례요?”

“문주에게 세 번을 절하라는 얘기이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생각보다 매우 간단한 일이었기에 소소는 냉큼 세 번을 절했다.

“잘했다. 이제 너의 검을 내게 줘 보아라.”

소소는 허리춤에서 소검(小劍)을 꺼내어 내밀었다. 비록 금속이었지만, 막대기라고 해도 될 만큼 장난감 같은 모양새였다.

“소소의 보물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준 첫 번째 선물!”

백리현은 얇고 가벼운 소검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날이 없으니 벨 수가 없고, 끝이 뭉툭하니 상대를 관통할 수도 없다. 살수들의 기준에서는 최악이로군. 허나 네게는 관계가 없겠구나. 검술이 경지에 이른 자들은 무슨 검을 들든 관계가 없는 법이지.”

조금 전 아이가 검을 잡는 동작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검성의 딸답게 소소의 검술은 이미 상당 수준이었다. 그것은 살문의 기술을 익히기에 차고도 넘칠 만큼 기본이 탄탄하다는 것을 뜻했다.

“내 검에 뭐 하는 거예요?”

백리현은 자신의 태도를 꺼내어 소검의 손잡이에 작은 문양을 새겨넣고 있었다. 노리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위치에 말이다.

“살문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문양을 새기는 것이란다.”

얘기를 듣자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대신 채워졌다.

“예쁘게 그려주세요~”

원래는 신체에 각인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아이의 아버지가 눈치챌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임시방편이었다.

잠시 후 백리현은 소소에게 검을 돌려주며 나직이 말했다.

“살문은 무공으로 서열을 결정한다. 서열 이 위 소소. 네가 지금부터 살문의 부문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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