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1) (181/250)


181화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1)
2022.07.31.


소무는 집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잠시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버지, 나 어디에 있는 줄 알아요?

딸아이의 전음.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누가 현경의 반경 삼 장 이내에서 기척을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소소는 집 천장에 박쥐처럼 매달려 웅크리고 있었다. 살왕에게 살수들의 잔기술을 몇 가지 배운 모양이었다.

“도저히 모르겠구나. 우리 소소가 어디에 숨었을까?”

딸아이가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소무는 여전히 모르는 척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길 잠시 후. 누군가가 밖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컥-!

연설화였다. 그녀는 거대한 통을 손에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롱이 식성이 보통이 아니야. 먹어대는 양을 보니 살림 거덜 내겠더라.”

“얼마나 먹는데?”

“오늘만 닭을 스물세 마리 드셨어.”

상상만으로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식비도 만만치 않지만, 준비해서 먹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터. 그녀의 수고를 어찌 모르겠는가.

“내일부터는 내가 할 테니 그냥 놔둬.”

설화는 고개를 내저으며 마당에 웅크린 산군을 슬쩍 바라보았다.

“신경 쓸 것 없어. 내가 주는 먹이를 먹을 자격이 있으니까.”

만약 산군이 없다면 은화파파가 언제 집으로 들이닥쳐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집을 잘 지키고 있으니, 기특한 영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설화가 허리를 숙여 통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소무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잽싸게 낚아챘다.

“왜, 왜 이래?”

당황한 설화는 얼굴을 붉히며 소무를 바라보았다. 딸 아이가 위에서 쳐다보고 있는데 애정행각을 벌이다니.

“소소, 어디 갔는지 알아?”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눈을 몇 번 끔뻑이던 설화는 잠시 후 소무의 눈빛에서 의중을 알아챘다.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나도 못 봤어. 어디에 숨었지?”

“우리 딸, 어딨어?”

그 순간 천장에서 거미줄이 내려오듯 작은 인영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소소는 아버지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타고 앉아 까르륵 웃었다.

“나 여기 있어요~”

“어이쿠, 아버지 기습당해서 죽을 뻔했구나.”

아이랑 놀아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왼손으로는 부인의 허리를 안고, 오른팔로 딸아이를 잡아주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정의 화목함. 난생처음 느껴보는 행복에 소무의 가슴이 따듯해졌다.

그때 그의 시야가 무엇인가에 고정되었다.

소소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소검의 손잡이. 거기에 각인된 미세한 문양이 그의 시선에 포착된 것이다.

모를 수가 없었다.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중원 역사상 최고의 살수 집단으로 군림한 살문의 표식이었으니.

“잠깐 내려와 보자.”

“왜요?”

소소는 부모님들 앞에 마주 앉아서 어리둥절했다. 눈치 빠른 연설화도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소소는 아버지한테 비밀 없지?”

“아니요.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있는 거래요.”

자신이 농담 삼아 했던 말을 고대로 써먹고 있었다.

소소는 아버지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살문에 들어갔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소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연설화가 먼저 나서서 물었다.

“혹시 호위해주는 아저씨한테 속아서 살문에 가입한 거니?”

“…….”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아마도 그가 비밀로 하라고 말했으리라.

설화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소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 딸이 탐이 나셨나 보네. 겁도 없이 말이야.”

소무는 부인의 등을 한 번 토닥이고는, 딸을 향해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비밀을 지키려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만, 원래 가족한테는 다 얘기해도 되는 거란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 소소 편이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얘기해보아라.”

상황이 이쯤 되자 소소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숨는 거 배우고 싶으면 살문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이제 살문의 부문주래요.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어떡해요?”

살문에 가입한 것도 모자라 부문주라니. 소무와 설화는 기가 막혀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설화가 내기를 끌어올려 안광을 빛냈다. 그녀는 주변을 살펴보며 소무에게 말했다.

“내가 음침한 녀석이라고 말했잖아. 지금도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이곳엔 없어. 나랑 있을 때까지 호위가 필요하진 않으니, 내일 일출 때 찾아올 거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소소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아저씨 좋은 사람이에요.”

이미 소무는 가부좌를 틀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살문은 문도를 받는 조건이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왜 소소에게 마음을 열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감히 자신의 딸을 꾀어내다니.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의 심성으로 볼 때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고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은 좀 황당하지만, 은화파파로부터 우리 소소를 호위해줄 수 있는 자는 살왕밖에 없어. 연매 생각은 어때?”

극마의 정점에 있는 설화와 마찬가지로, 살왕 백리현 또한 화경의 극을 이룬 인물이었다.

게다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능력자가 아니던가. 소무와 삼백 장 이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이를 호위할 수 있는 인물은 그가 유일했다.

“무공만 배우는 거라면 손해 볼 것 없잖아? 일단 살문의 무공을 다 배우게 한 다음에 무효로 만들어 버리지 뭐.”

살문에는 연설화는 물론 소무마저도 탐나는 기술이 있을 정도였다.

휘나라의 관군과 신마교가 함께 펼친 천라지망(天羅地網)에서도 유유히 포위를 뚫고 나온 백리현이었다. 소소가 그의 기술을 전수받는다면 최고의 생존능력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우고 나면 문파를 나올 수 없을 거야. 그게 무림의 규칙이잖아.”

“그럼 명예 장로로 놔두라고 하든지. 그것도 싫다면 우리를 적으로 맞아야 할 거야.”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소무는 은근슬쩍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거친 것을 보니, 일이 틀어진다면 바로 눈물을 터트릴 기세였다.

한숨을 내쉰 그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해보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직 살왕의 의중이 뭔지는 모르지만, 당장 손해 볼 건 없겠지. 우선 연매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그래, 일단은 모른 척하고 잘 지켜봐. 허튼수작은 안 부리는지.”

경직되어 있던 소소의 얼굴이 금세 웃음기를 가득 머금었다. 부모님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허락이 떨어졌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심각했던 가정의 분위기가 다시 화목을 되찾을 찰나였다. 집으로 손님 한 명이 찾아들었다.

“어이쿠, 깜짝이야!”

일광이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산군이 자신을 향해 앞발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반가움의 손짓인지, 무엇인지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얼떨결에 그도 오른쪽 손바닥을 마주 내뻗으며, 산군의 발바닥과 소리가 나도록 마주쳤다.

짝-!

“누렁아, 설마 방금 나 때리려던 거 아니었지?”

일광의 왼손엔 종이에 둘둘 말려진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거기에선 화로에 구워낸 닭고기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일광 삼촌!”

소소가 신발도 안 신고 방 안에서 마당으로 도약하여 그의 품에 안겼다.

“우리 조카, 삼촌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소소 간식 사 왔어요?”

“오냐. 네 방에 가서 먹고 있어. 삼촌은 어른들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히히. 나는 일광 삼촌이 제일 좋아요~”

직화에 구워진 노릇노릇한 닭 한 마리였다. 입이 귓가에 걸린 소소는 자기 방으로 잽싸게 날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소무가 일광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서 앉아.”

요즘 그는 소무의 요청으로 장양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밤에는 살왕이 다시 교대를 해줬기에 행동이 자유로웠다.

“안녕하세요.”

일광은 머리를 긁적이며 설화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림의 은거고수로 알려진 그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내 동생 점찍었다며? 누가 채가기 전에 빨리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거야. 요즘 여기저기서 혼인 주선이 들어와.”

일광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예?”

“농담한 것 가지고 놀라기는. 초희도 요즘 혼자서 외로울 테니 지금이 기회야. 내가 좀 도와줘?”

그렇지 않아도 대인기피증이 있는 동생을 혼자 놔두고 혼인한 터라 마음이 쓰였던 설화였다. 비록 무식하긴 해도 듬직한 일광이라면 찬성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일광은 최대한 상체를 공손히 모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은,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산만 한 덩치로 당황하며 조아리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초희는 매화꽃을 좋아하더라. 얘기들 나누고 계셔. 차 좀 내올 테니”

설화는 그 말을 끝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일광은 그녀의 등 뒤를 향해 연신 상체를 숙여 보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고, 고맙습니다!”

설화가 사라지자 소무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용기 있는 사내야말로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쟁취할 수 있는 법이지.”

“뭐야, 대장. 먼저 갔다고 훈수 두며 선배 노릇 하기야?”

설화를 대할 때 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비록 소무의 품계가 많이 올랐지만, 둘은 예나 지금이나 사석에서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후후.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

“나도 나름대로 알아봤는데 아무런 정보가 없어. 이미 성을 빠져나간 거 아냐?”

일광은 단순히 장양의 호위만 서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연락책들을 이용해 은화파파에 대한 흔적을 같이 수집하고 있었다.

소무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을 정도로 끈질긴 인물이니까. 소소를 노리고 있으니 분명히 다시 나타날 거야.”

“노망난 노파가 우리 조카를 어떻게 하려고?”

“아이를 인질로 나와 연매를 노리겠지.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마음은 없어.”

“언제 나타날 줄 알고? 매복해서 함정이라도 파놓는 것은 어때?”

일광이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계략이면, 은화파파도 이미 눈치채고 있다고 봐야 했다. 자신의 근처에서 살왕이 아이를 호위하고 있음을.

“이미 그러고 있는데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관군의 정보망은 물론이거니와 개방의 협조까지 받고 있음에도 은화파파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애초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백사십 년 이상 닳고 닳은 구렁이 같은 노파를 어찌 쉽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그때 일광이 무엇인가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맞다. 오늘 민공께서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

“……?”

소무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송나라에서 은밀히 사신이 찾아와서 머물고 있거든.”

최근 군단을 재편하느라 정신이 없던 터였다. 추밀원에만 틀어박혀 있었기에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이다.

“사신으로 누가 왔는데?”

“염소처럼 수염을 기른 놈이었어. 재상이라던데?”

송나라의 재상 진회. 그가 황제를 조종하는 나라의 실세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거물급 인사가 찾아온 것이다.

소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휘나라에 맞서 구축한 연합 전선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지금 얘기해?”

“안 물어봤잖아. 아무튼, 민공께서 내일 함께 만나보자고 하시더라.”

일국의 실권자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 있다는 것일 터. 확인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