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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2) (182/250)


182화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2)
2022.08.01.


지객전(知客殿). 이곳은 궁성을 찾아온 외부의 귀빈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본래의 웅장했던 지객전은 찻집으로 개조되어 백성들의 휴식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고, 지금은 서고였던 작은 전각을 지객전으로 대신 쓰고 있었다. 소박하고 볼품없는 규모였다.

모든 사람이 동등함을 강조하는 장양이었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타국의 사신이라고 하여 특별대우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당사자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재상께서 직접 오셨는데, 이런 푸대접이라니. 일국의 사신들을 이렇게 접대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송나라의 고위관료가 내시처럼 두 손을 모으고는 연신 분통을 터트렸다.

그자 앞에는 진회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찻잔을 움켜쥐고 있었다.

“신경 쓸 것 없다. 폐하가 직접 오셨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게지. 쓸 만한 전각들을 고작 의원이나 고아들의 보육원 따위로 사용하고 있다니 말이야. 아무래도 장양이 제대로 미친 것 같군.”

그때 객당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문이 움직이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진회는 영문을 알고 있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방묘야.”

그 순간 진회의 일 장 거리 앞으로 검은 연기가 모여들더니 한 인영으로 변모해갔다.

전신을 붕대로 칭칭 휘감고 있는 인물. 그의 호위무사인 암영추혼(暗營錐魂) 방묘였다.

“예, 어르신.”

“궁성을 정찰해보니 어떻더냐.”

방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말했다.

“조금 이상합니다. 가는 곳마다 민간인과 관원들이 뒤섞여 있으니, 일국의 지도자가 거주하는 곳이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광경이지. 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모두가…… 웃고 있었습니다.”

진회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는 오래 못 갈 것 같구나.”

“……어째서입니까?”

“개와 주인이 같은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면 어찌 될 것 같으냐.”

“……?”

“몽둥이로 길들여놓은 맹견은 굶어 죽더라도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허나 위아래를 확실히 해놓지 않은 개들은 배가 고프면 주인을 물어뜯는 법이지.”

“하지만…… 이곳엔 저희 송나라처럼 굶주린 자들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진회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십 년 뒤 이곳이 어찌 변해 있는지 보고 다시 판단하거라. 이 진회의 판단이 틀렸다면, 내 무엇이든 너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마.”

“……예, 어르신.”

진회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물었다.

“군영도 살펴보았느냐?”

“말단 병사들조차 우리 금군을 뛰어넘을 만큼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 ”

금군은 무공을 수련하는 황실 직속의 정예부대였다. 말단 병사가 그들을 뛰어넘는다니? 진회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정도란 말이더냐……?”

“예.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강군이 확실합니다.”

진회는 염소수염을 쓱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하긴.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버틸 수가 없었겠지. 병력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대장군으로 보이는 자가 군영을 순시하고 있었기에, 더는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자가 그 정도로 조심해야 할 인물이더냐?”

암영추혼이 누구인가. 진씨가문의 호위로 키워지는 전설적인 살수로 화경을 이룬 고수였다. 그런 그가 접근조차 부담스러운 상대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단지 경지를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마치?”

“한세충 장군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진회는 굳어진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송나라 역대 최강의 무장, 진 만인적 한세충. 지금의 그는 자신조차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군부의 권력자였다.

어쨌거나 현경의 고수인 그와 비슷한 느낌이라니. 살수의 직감은 적중률이 매우 높았으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방묘의 직감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소나라에 대단한 고수가 한 명 있다더니, 설마 현경에 이른 인물이었단 말인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는 암묵적인 우방국이었으니 당장은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적국이 될 수도 있는 관계였으니, 상황과 판도를 다시 계산해야 했다.

그렇게 침묵 속에 일다경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모시러 왔습니다, 재상.”

장양이 접견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방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진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보필하던 문관이 문을 열어 보니 십여 명의 관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송나라의 관료들도 미리 나와 합류해있었다.

“마차는?”

“걸으셔야 합니다. 환자를 제외하고는 성내에서 마차 사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진회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올 때는 몰랐으니 준비를 못 했다고 쳐도, 지금은 이러한 대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

“법이 그러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보행자들에 대한 사고 위험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재상인 자신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한마디를 쏘아붙이려던 그는 이내 체념하고 뒷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분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은 도움을 받으러 온 처지였으니,

“어서 안내나 하게.”

이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일식경이 지나 도착한 곳은 함량전이었다. 물론 이름만 거창할 뿐 볼품없는 전각이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진회는 송나라의 관료들을 뒤로한 채 홀로 걸어갔다. 모두가 입장하면 비좁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충분하니, 모두 이곳에서 대기해.”

진회는 허공을 향해 손짓하며 방묘도 밖에 대기시켰다. 만약 내부에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이 있다면 존재가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회는 모르고 있었다. 소무가 이미 자신의 호위무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안에는 이미 두 명의 인물이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진회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공을 자처하는 장양. 그리고 소나라의 군부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군 소무였다. 군사 진유소는 모종의 임무로 출타 중이었기에 이 자리에 없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대장군 소무입니다.”

진회도 포권을 건네며 공손히 말했다.

“별말씀을. 환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회는 표정을 관리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댔다.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달리,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진회의 입장에서 장양은 반란군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중앙군이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기에 칭제를 방관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칭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 또한 간신배 진회가 아니던가. 앙숙이 만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가볍게 몇 마디 인사가 오간 후 장양이 본론을 꺼내었다.

“재상께서 직접 이곳까지 오신 연유가 무엇이오?”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급한 문제가 있을 공산이 높았다.

“어디 말씀해보시오.”

“현재 저희 송나라는 계속된 전란의 여파로 굶주린 자들이 넘쳐나고, 아이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반면 소나라는 풍년을 맞아 저희보다 상황이 괜찮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함께 휘나라에 맞서는 이웃 국가로서 비축미의 지원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소무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응시했다. 진회가 백성들을 위하는 척 말하는 모습이 너무 역겨워 쳐다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진회가 필요한 것은 병량이었으며, 백성들에겐 쌀 한 톨도 돌아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우리가 송나라보다 풍족한 것은 풍년 때문만이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그간 꾸준히 토지를 개간하고 둔전을 운영해오지 않았습니까. 아쉽게도 우리는 그러한 준비를 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장양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것도 아니오. 지금 송나라는 병사들을 무리해서 징집하는 것도 모자라, 도성 주변으로 장벽을 쌓는다고 수많은 백성을 노역에 동원하고 있지 않소. 그러다 보니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는데 백성들은 무엇으로 배를 채우며, 군량미는 무슨 수로 조달한단 말이오?”

“황실에서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무책임하게 말하는 진회의 모습에 장양이 격분했다.

“민생을 살펴야 할 황실이 전란 속에서도 호화로운 사치를 계속 누리고 있으니,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슨 수로 예측한다는 말이오?”

탁상 밑에 감춰진 진회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이 누구인가. 일국의 재상이기에 앞서 송나라의 실세였다. 이렇게 꾸중을 듣고 있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장양은 한마디를 더 쏘아붙이려다 관두었다. 더는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두를 돌렸다.

“식량을 지원해주면 송나라는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소?”

“원하는 것을 말씀하십시오. 비단이든 황금이든 원하는 양을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러한 사치품은 필요하지 않소.”

“그럼 무엇이 필요합니까?”

잠시동안 정적이 흐른 뒤 장양이 또박또박 말했다.

“백성들을 주시오.”

백성을 달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궁녀를 한 명도 보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진회는 그의 말뜻을 잘못 이해했다.

“쌀 세 석당 궁녀 한 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장양의 이마에 핏대가 곤두섰다. 고작 한 명의 백성을 쌀 세 석에 팔아넘기려 하다니. 마음 같아선 호통을 치고 싶었으나, 상대는 송나라의 실권자였다.

호흡을 고르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장양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성들이 송나라와 소나라를 마음껏 오갈 수 있도록 국경을 개방해주시오. 그리한다면 수확기가 끝나는 대로 남는 비축미를 지원해주겠소.”

단지 양국의 백성들에게 통행의 자유를 주는 것뿐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손해 볼 게 없었지만, 찜찜함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으니.

진회는 장양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식량 지원을 못 받는다면 송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관료들끼리 협의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시오.”

진회는 고개를 돌려 벽면에 걸려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좌측 아래로 향했다.

“현재 우리 양국은 어깨를 맞대고 휘국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병력 대부분이 전선에 집중되어 있지요. 만약 후방의 포나라가 기습공격이라도 해온다면, 버텨낼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절도사 원규가 칭제하여 세운 포나라의 영토는 사천을 중심으로 운남과 귀주까지였다.

송나라와 소나라의 뒤쪽에 있는 그들은 휘국으로부터도 안전한 위치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제안하고 싶은 것이오?”

“휘국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했으면 합니다. 우리 양국이 힘을 합쳐 후방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타국을 먼저 침공하는 것은 장양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묵묵히 소무를 한 번 바라보았다.

소무는 이미 포나라의 군사력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마친 상황이었다.

“포나라는 현재 그럴 만한 병력이나 여유가 없습니다. 당분간 타국의 영토를 넘볼 가능성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포나라에게 필요한 것은 영토 확장이 아니라 내정의 안정화였다. 황제 원규는 정통성이 없는 상태에서 관료들의 지지까지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회는 즉각적으로 반문했다.

“당분간이라면 차후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로군요. 다시는 이러한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우리가 협공한다면 손쉽고 빠르게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소무는 실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얼마 전에 정찰해본 휘나라의 낙양성은 침공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저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만약 진회가 그곳을 직접 보았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휘국을 앞에 두고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겠다니,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우리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소무와 진회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지켜보던 장양이 그들을 중재하고 나섰다.

“포나라를 포함하여 모든 수를 계산해야 하고, 조금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하지만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소. 더는 민초들이 또 다른 전쟁으로 고통받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진회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이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전쟁과 희생 없이는 평화를 쟁취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소. 전쟁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오.”

진회는 장양이 망상가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고방식을 계속 보고 있자니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더는 말이 통하지를 않았기에 결국 두 손을 들고야 말았다.

“민공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며칠 더 머무르다 떠날 예정이니,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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