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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3) (183/250)


183화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3)
2022.08.02.


진회가 돌아가고, 장양과 소무는 여전히 남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기회만 생긴다면 우리 소나라도 공격할 인물입니다.”

장양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지금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기에 함께하고 있지만, 믿을 수 없는 자일세. 그나저나 포나라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겠군.”

“저도 전쟁은 반대이지만, 그냥 방관한다면 훗날 진회의 말대로 위험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은 외교적으로 국교를 맺어보는 것이 좋겠군. 얘기가 잘 되면 군사지원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소무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다음은 그들의 차례일 테니, 남의 일이라고 지켜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알겠네. 외교관을 한번 보내보지. 그리고 희소식이 하나 있네.”

“……?”

짐작되는 일이 없었던 소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장양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맹진항에서 구출했던 기술자들이 무사히 도착하여 위원현에 정착했다고 하네. 자네가 빌려주었던 대장군의 명패는 추밀원에서 돌려받을 수 있을 걸세.”

소무의 입가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다행입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암, 목숨 걸고 이곳까지 왔는데 잘 보살펴주어야겠지. 그리고 그들이 조선소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네.”

전함을 만드는 숙련된 공인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술자가 부족해 함선 건조에 애를 먹고 있었기에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소나라가 보유 중인 함선은 장강의 지류인 한수(漢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장안에서 낙양으로 통하는 위수(渭水)에는 기술자들이 타고 온 소수의 전함이 전부였다.

“잘되었습니다. 위수에 수군을 편성할 수 있다면 우리가 좀 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일세. 우리 병사들은 훈련이 잘되어있지만, 숫자로는 적들의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하지. 그런 상황에서 특수 전력을 보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 자네 덕분일세.”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장양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허허. 겸손할 것 없네. 위수에 함대 구성이 완료되면 적운 제독을 소환하여 지휘하게 할 것이네.”

추혼이검(追魂利劍) 적운. 무림 출신으로 한때는 용강수로채의 채주였으며, 양양전투를 기점으로 소무가 포섭한 인물이었다.

“무력과 전술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가 지휘한다면 휘나라의 수군을 상대로 한 치의 밀림도 없을 것입니다.”

“암, 자네의 안목을 믿네. 이제 회룡포의 완성만 기다리면 되겠구만.”

앞서 소무는 낙양에서 회룡포의 제작도면을 탈취해온 바가 있었다. 소나라는 지금 이 신형 투석기의 분석이 한창이었다.

회룡포가 완성된다면 장안에서 수륙양동작전으로 낙양을 포위하고 타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애초에 완안후이가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한 작전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준비했던 전략이 칼날이 되어 역으로 돌아오는 셈이었다.

“낙양을 함락시킬 수만 있다면 다음은 휘나라의 수도인 개봉입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쉽지는 않겠지. 비밀리에 연합군단도 구성해야 하고, 이것 외에도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걸세.”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허허. 나보다 더 바쁜 자가 어찌 날 돕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자네가 지금 쫓고 있다는 그 노파는 어찌 되었는가?”

소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추적하고 있지만, 워낙 교활한 자라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자가 자네의 가족을 노리고 있다니 걱정이로군. 어서 빨리 잡으시게.”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 * *

함량전으로부터 백여 장이 떨어진 어느 전각.

비어있는 이 어두운 공간에 두 개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살문의 문주 백리현과 부문주 소소였다.

“훌륭하다. 조금만 더 짧게 끊어서 공격해 보아라.”

소소는 백리현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소검(小劍)을 내질렀다.

단전을 향해 파고들던 검 끝이 돌연 진로를 바꾸어 목젖으로 솟구쳐 올랐다. 살문의 검술답게 급소만을 노린 초식이었다.

다람쥐처럼 재빠르고 간결한 동작에 백리현은 내심 감탄했다. 한 손을 뒷짐 진 그는 태도를 가볍게 휘두르며 일 합을 마주쳤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동시에 백리현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스르르륵-!

소소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기척을 찾아보았다.

잠시 후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그림자를 느끼고는 황급히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카앙-!

그 순간 소소의 두 발이 보법을 밟았다. 동시에 어둠 속으로 감쪽같이 스며드는 그림자.

스르르륵-!

“놀랍구나. 벌써 암보(暗步)를 흉내 내다니.”

이미 검성의 기술인 섬전비영보와 마교의 천마환영보까지 터득한 아이였다. 살문의 암보를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히히. 나 어디 있게요?”

그러나 아직은 흉내일 뿐, 살왕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어느새 백리현은 소소의 옷깃을 낚아채어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소소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웃으며 말했다.

“다른 것도 알려주세요.”

아이를 바닥에 내려준 백리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이의 자질이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살문의 맥을 계승하기엔 최고의 적임자였다. 게다가 배우려는 의지까지 뭐 하나 빼놓을 것이 없었다.

“우리 살문의 상승무공은 강한 자와 싸울수록 빛을 발한다.”

“왜요?”

“살수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기전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지. 진기를 폭발하듯 태우며 신체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살문의 절학을 펼친 이상에는 반드시 상대를 격살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당하는 것은 자신이 될 터이니.”

살왕 백리현. 그는 과거 대나무숲에서 검성과 싸울 때 순간적으로 현경의 속도를 뿜어내며 그를 당황 시킨 전력이 있었다. 결국엔 패배했지만 말이다.

“그럼 내가 일광 삼촌도 이길 수 있어요?”

어둠 속에서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인물이었다. 대장군인 소무의 부관으로 화경을 이룬 고수가 아니던가. 아직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의 성장 속도는 무서울 정도였다.

“깨달음을 가진 자이니 지금의 너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치. 그럼 배워서 뭐해요?”

소소는 살문의 무공에 흥미를 잃으려고 했다. 표정에 그것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다급해진 백리현이 다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살문의 무공이라면, 이기지는 못해도 잠시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금세 다시 흥미가 생긴 듯 소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요?”

“물론이다.”

“그럼 빨리 배우고 싶어요.”

백리현은 뒷짐을 지고는 소소의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과거 우리 살문에는 삼백 명이 넘는 살수들이 있었다. 일급살수만 오십 명을 상회했지. 무림의 그 어느 세력도 감히 우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근데 지금은 아저씨랑 나랑 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 그래서 네가 나의 절학을 전수받게 된다면 공식적으로 살문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다.”

소소는 그가 뭘 얘기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승자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해요?”

“훗날 내가 은퇴하거나 죽는다면 네가 살문의 유지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 너는 다시 살문의 이름과 기술을 후대에 계승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알았어요.”

대답이 너무 쉽게 나왔기 때문일까? 백리현은 소소가 알고 대답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에 한 번 떠보기로 했다.

“너의 사문을 말해 보아라.”

“살문이요.”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 마음이 흡족해진 백리현은 절도있는 몸짓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 네가 준비되었을 때 아버지의 무공을 이어받겠지만, 그보다 앞서 살문의 계승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아저씨. 알겠어요.”

“둘만 있을 때는 문주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네, 문주님!”

소소는 빨리 새로운 기술을 배워 일광 삼촌한테 써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인 전승으로만 전해지는 살문의 비전절학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추혈살무(追血殺舞)라는 초식이지.”

이름만 들어도 멋있었다. 굉장한 기술 같았기에 소소는 손뼉을 부딪치며 좋아했다.

“와~ 어서 보여주세요!”

백리현의 왼쪽 발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그의 손에 움켜쥔 태도가 움직임을 발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파앗-!

어둠 속에서 서늘한 빛살이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두 개의 빛이 나타나 허공을 그어댔다.

파팟-!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점점 빨라지는 백리현의 몸짓. 그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태도는 허공을 수십 번씩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다.

소소도 백팔식광풍쾌검을 익힌 상태였지만, 눈앞의 추혈살무에 비교하면 그 위력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절정으로 치닫던 추혈살무는 필살의 일격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멍하니 벌린 소소의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온전한 추혈살무는 이것보다 두 배는 빠르다. 네가 볼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한 것이니라.”

소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초식이라면 일광 삼촌에게 대련에서 맞은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배울 수 있어요?”

“물론이다.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려면 화경에 이르러야 하지만, 이 정도는 지금의 너도 가능할 것이다.”

백리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주변으로 짙은 운무가 차올랐다. 게다가 짙은 꽃향기까지. 호기심이 생긴 소소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꽃 냄새가 나요.”

백리현의 위치를 찾기는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만개하는 꽃 향에 매료되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 순간 소소의 주변이 번쩍번쩍 빛났다. 그것은 마치 천둥이 꽃잎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으로 보는 아름다운 광경에 소소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와…….”

잠시 후 초식이 끝나자 운무가 점차 사그라졌다.

모습을 드러낸 백리현은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살문의 또 다른 절학인 만화살무(萬花殺霧)이니라.”

“괜찮아요, 아저씨? 정말 대단해요.”

“막대한 기력을 소모하는 필살의 초식들이다. 실전에서는 하나도 벅찰 테니 모두 익힐 필요는 없다. 둘 중에 어느 것을 배워보겠느냐?”

턱을 괴고 고민하던 소소는 잠시 후 검지와 중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두 개의 손가락을 앞으로 접어 보이며 말했다.

“둘 다요.”

백리현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욕심이 지나치구나. 무리하다가 몸에 무리가 올 수 있으니 하나만 선택하여라.”

소소는 고개를 내젓고는 백리현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둘 다 알려 주세요. 힝~”

머뭇거리던 백리현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야 말았다.

“……이것 참. 우선 생각을 좀 해보마.”

“헤헤. 정말이죠? 아저씨, 근데 배고프지 않아요?”

“숙련된 살수는 식욕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음식을 탐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 따위는 소소가 알 바 아니었다. 온종일 무공을 배우며 체력을 소모했더니, 배가 꼬르륵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숙련된 살수가 아니라서 괜찮아요.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쓰러질 것 같아…….”

어느새 소소는 자신의 배를 붙잡고 죽는시늉을 하고 있었다.

백리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문의 절학은 만금의 가치보다 귀하다. 어찌 가치를 환산할 수 있겠는가. 절세의 무공을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 밥까지 사줘야 한다니.

“휴. 무엇이 먹고 싶으냐.”

“저는 오리고기를 좋아해요. 문주님은요?”

“밥을 사준다니까 호칭이 자동으로 변하는구나. 네가 먹고 싶은 음식으로 고르거라.”

백리현은 말을 하는 내내 뭔가가 어색했다. 그가 객잔이나 음식점에서 밥을 먹어보는 것은 십수 년 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히히히. 알았어요.”

고개를 한번 끄덕인 백리현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운기조식부터 끝내고.”

은화파파가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에, 신체를 항상 최적화된 상태로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켜보던 소소도 그의 옆에 매미처럼 붙어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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