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거기 딱 기다려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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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거기 딱 기다려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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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거기 딱 기다려라 (1)
2022.08.03.
평화로운 시간 속에 특별한 사건 없이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소무는 추밀원에 마련된 개인 집무실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하는 자신만의 수련 방식이었다. 휘나라의 대장군 완안후이. 그와의 대결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무아지경 속에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숨과 함께 감겨있던 눈이 서서히 뜨여갔다.
“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의 승률이 더 높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변수가 발생하면 역으로 패배하는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상만으로는 한계가 있군.’
소무는 머릿결에 감춰진 자신의 이마를 슬쩍 문질러 보았다.
낙양성에서 있었던 한 번의 격돌. 그리고 그의 검이 남긴 상처 자국이 옅게 남아있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직접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을 허락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완안후이에 의해 처음으로 깨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수련의 욕구가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면 전쟁이 소강상태인 지금이 적기라 할 수 있었다. 군단이 출진하기 위해선 겨울이 지나야 했기에 다음 전투까지는 반년 이상이 남았다.
문제는 지금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취를 감춘 은화파파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쿵쿵-!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들어와.”
추밀원 소속의 직속 휘하장교였다. 그는 재빨리 다가와 서신 한 장을 건네었다.
“무림맹에서 장군께 보내온 서신입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림맹은 관군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리라.
소무는 씁쓸한 표정으로 밀봉된 서신을 뜯었다. 역시나 지난번과 크게 다른 내용은 없었다. 안부를 담은 형식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무림맹의 군사가 직접 친필로 쓴 서신이었기에 소무 또한 답신을 보내야 했다. 앞으로 다가올 전투에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지난번처럼 작성해서 답신을 보내줘.”
“예, 알겠습니다.”
소무가 무림맹의 서신을 그에게 건네려는 순간이었다. 내미는 손이 갑자기 정지했다.
장교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장군?”
소무는 한쪽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그를 조용히 시켰다.
어디선가 멀지 않은 곳에서 강렬한 기(氣)의 파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 숨 막힐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 그리고 또 하나는 서릿발같이 차갑고 냉랭한 기운이었다.
‘은화파파……?’
노괴(老怪)가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딸도 함께 있을 터이니.
찰나의 순간 소무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솟구쳐 올랐다.
콰앙-!
추밀원의 전각 지붕이 터져나가며 소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는 약 이백오십여 장. 그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조금만 버텨라.’
그가 경공을 전력으로 펼치자 마른하늘에 돌풍이 불어 닥쳤다.
머지않아 시야에 목적지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궁성의 외곽에 자리한 인적 없는 공터였다.
소무는 다시 한 번 날아오르며 그곳을 살펴보았다.
상처를 입은 듯 살왕 백리현이 왼쪽 어깨를 움켜쥔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출혈이 보였지만, 다행히 심각해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정작 은화파파와 딸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납치라도 당한 것일까? 살왕이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타앗-!
지면에 내려선 그는 백리현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보기 좋게 당했소. 흉마살혼조라니…….”
흉마살혼조(兇魔殺魂爪). 천 명의 정기를 흡수해야 완성이 가능한, 금지된 무공이었다. 과거에 그것을 수련하던 은화파파를 중도에 막아내었으나, 기어코 완성한 모양이었다.
어디에서 그것을 익혀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살왕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아니었다.
“내 딸을 찾으러 가야 하니, 어서 방향을 알려주게.”
소무의 두 눈에 매서운 살기(殺氣)가 서렸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가 이렇게 분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럴 필요 없소. 그래도 아이는 지켜냈으니.”
“…….”
어리둥절하던 소무는 긴장이 탁 풀리고야 말았다. 경황이 없던 나머지 지척에서 느껴지는 작고 익숙한 기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나 여기 숨어 있어요.”
소소는 살문의 암보(暗步)를 펼치고 있었다. 찾고자 한다면 눈치 못 챌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수준이 제법이었다.
위치를 감지한 소무는 허공을 휘저으며 딸아이를 그림자에서 빼내듯 안아 들었다.
“잘 숨어 있었다. 다친 데는 없어?”
“마귀 할머니가 왔어요. 근데 아저씨가 날 지켜주다가…….”
많이 놀랐는지 안색이 다소 창백해 보였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백리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쓸 것 없다.”
소무가 백리현에게 다가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이 빚은 꼭 갚겠네. 은화파파를 놓친 것이 좀 아쉽군. 이렇게 쉽게 물러갈 줄이야…….”
“아직 아쉬워하기엔 이르오. 노괴의 신체에 추혼향을 뿌려두었으니.”
그의 말에 소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살문의 추적용 소품으로 특급살수만이 이 향을 맡을 수 있다.
“추혼향의 지속시간은?”
“열흘이오. 씻어도 지워지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소.”
그렇다면 아직 기회가 남아있었다. 시간도 넉넉했다.
“우선 상처부터 좀 추스르시게. 내일 내가 자네를 찾아가지.”
“알겠소.”
소무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성내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안도와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일다경이 지나고 담장을 둘러싼 대문이 열렸다.
벌컥-!
마당에 웅크리고 있던 산군이 벌떡 일어섰다. 소소의 안색을 보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다롱아…….”
산군은 어른의 몸통만 한 얼굴로 소소의 전신을 비벼댔다. 마치 새끼를 위로하듯이 말이다.
그때 부엌에서 연설화가 주걱을 움켜쥐고 나왔다.
“우리 딸,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이래?”
“힝. 엄마…….”
설화는 하체를 구부려 아이를 안아주며 소무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달라는 눈빛이었다.
“노파가 나타났어. 많이 놀란 모양이야.”
“……잡았어?”
소무는 고개를 가로로 한 번 내저었다.
“내가 오기 전에 그냥 물러갔어. 살왕이 추혼향을 뿌려놓았으니, 내일부터 함께 추적할 거야. 부상을 입었더라고.”
“살왕이 부상까지? 음침한 녀석이긴 해도 쉽게 당할 실력이 아닐 텐데?”
“얘기를 들어보니 기어코 흉마살혼조를 완성한 것 같아. 그래도 다행히 소소를 잘 지켜주었어.”
설화는 굳어진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한 번 달싹였다.
“안에 들어가서 얘기 좀 할까?”
소무와 설화는 아이를 방에 눕혀준 이후 따로 나와 마주 앉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연설화의 눈초리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확실히 조금 부자연스럽긴 해.”
“독사 같은 할멈이 간만 보고 그냥 갔을 리가 없잖아? 자신을 노출시키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말이야.”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은화파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내 짐작대로라면 할멈은 이미 당신이 달려올 줄 알고 있었을 거야. 어쩌면 역으로 유인하려는 것일 수도 있어. 함정을 파놓고서 말이지.”
“듣고 보니 그렇군. 역시 연매는 마교 출신이라 그런지 이쪽 방면으로는 예리하단 말이야.”
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무를 노려보았다.
“방금 그거 칭찬인 거지?”
“……물론이지. 아무튼 은화파파를 쫓지 않을 수도 없어. 어디로 숨어들었든 이번엔 끝까지 추적해서 악연을 끝내야 해.”
팔짱을 낀 설화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살왕도 함께 갈 거지? 만약 그게 할멈이 노린 거라면?”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
소무와 백리현이 함께 자리를 비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은화파파가 노리는 것이 자신인지, 아이인지 짐작이 안 되었다. 어쩌면 연설화나 다른 대상을 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정적이 계속 흐르고, 다시 일각이 지나서야 소무가 말했다.
“소소를 당분간 아미파에 숨겨놓는 게 어떨까 해. 그곳에 있으면 안전할 거야.”
“아미파에? 우리 딸을 비구니로 만들겠다는 말이야?”
“아니, 아미파의 제자가 될 필요까지는 없잖아. 식객의 신분으로 잠시 머무르게 하는 게 좋겠어.”
소무는 아미파의 장문인인 금정사태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신분을 고려하면, 오히려 그쪽에서 두 손 들고 환영할 터였다.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
은화파파를 잡을 수 있는 기간을 물어본 것이다. 적어도 그전에는 돌아올 수가 없을 테니.
“목표는 열흘이지만, 확신할 수는 없어.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고. 기왕 가는 김에 한 달 정도는 머무르면서 또 다른 세상을 배우고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난세에 경험만큼 값진 재산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번 기회에 불가의 문파인 아미파에서 불도를 닦으며 여러 경험을 하고 온다면 얻는 것이 많을 거라 생각이 되었다.
설화도 소무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내심 서운한지 얼굴에는 여전히 아쉽다는 표정이 떠나질 않았다. 매일 같이 아이와 합주를 해오며 행복을 느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고작 한 달을 떨어져 있는 것이지만, 마치 일 년 같은 느낌이었다.
“혼자서 한 달이라니…….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응. 씩씩한 아이잖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독립심을 키워줄 필요도 있어.”
소무와 설화는 말없이 포옹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어느 순간 정적을 깨고 설화가 물었다.
“식객이니까 머리는 안 밀어도 되겠지?”
소소가 머리를 전부 민다고 생각하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미파의 장문인인 금정사태가 결정할 일이었다.
“그건 모르겠어. 그래도 우리 소소는 두상이 예쁘니까 잘 어울릴 거야. 머리는 금방 자라잖아.”
하지만 설화는 결단코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섬뜩한 중얼거림이 소무를 소름 돋게 했다.
“내 딸의 머리카락 하나만 건드려 봐. 금정사태인지 은정사태인지, 머리가죽을 벗겨 줄 테니.”
소싯적 그녀와 아미파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금정사태의 대머리에 설화의 흑룡신장이 남긴 상처가 남아있었을 정도였으니.
소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말했다.
“후. 어쨌거나 날이 밝는 대로 준비하자고. 할멈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이동시켜야 해.”
* * *
날이 밝고 딸아이를 설득하느라 꽤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처음엔 안 간다고 버텼으나, 진심을 담은 대화를 통해 겨우 동의를 받아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소소는 자신이 떠나기 전에 보고 싶은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문제는 아미파로 떠나는 것이 극비라는 것에 있었다.
은화파파가 눈치라도 챈다면 모두 물거품이 될 터. 그렇기에 소무와 설화는 딸이 지목하는 인물들을 은밀히 집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특수작전을 방불케 했다.
“다음은 누구 차례지……?”
“아마 일광일걸.”
소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문으로 듬직한 체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우리 조카 왜 이렇게 눈이 퉁퉁 부어있어?”
“삼촌, 나 이제 어떡해요……. 흑.”
일광은 소소를 안아 들고는 토닥여주었다.
“뚝! 삼촌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야. 우리 소소가 부러워 죽겠네.”
“다녀오면 삼촌 나랑 다시 대련하고 놀아줄 거예요?”
“당연하지. 가서 친구들 때리지 말고, 많이 배우고 와.”
“네…….”
소소랑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일광은 작별을 고하며 궁성으로 돌아갔다. 장양의 호위를 맡아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 명 남았지?”
소소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버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지목한 인물은 바로 살왕 백리현이었다.
비록 석 달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계속 붙어 있다 보니 정이 든 모양이었다.
살왕이 고작 아이의 부름을 받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조금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수락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