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거기 딱 기다려라 (2) (185/250)


185화 거기 딱 기다려라 (2)
2022.08.04.


구름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은 날이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돌연 거처의 앞마당으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 닥쳤다. 그것은 분명 자연이 만들어낸 바람이 아니었다.

설화가 소무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우린 잠시 자리 좀 비켜줄까?”

“그러는 것이 좋겠군.”

곧이어 소소의 측면에서 바람이 아지랑이 피며 흑의를 입은 한 사내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인상에 남성미가 넘치는 이목구비. 무림의 전설적인 살수로 이름난 살왕(殺王) 백리현이었다.

“부문주가 이렇게 울면 사람들이 우리 살문을 어떻게 보겠느냐.”

살왕이 주변으로 기막(氣膜)을 펼쳤기에 외부에서는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소소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는 그의 허리춤을 부여잡았다.

“문주 아저씨, 나 어디 다녀와야 한대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슬퍼할 것 없다. 지금의 경험이 네가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니.”

“나 없으면 아저씨는 이제 누구랑 놀아요?”

“……누구랑 놀다니?”

살왕은 황당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친구 없어서 외로우면 우리 다롱이랑 놀아주세요.”

“그래, 알았다. 너도 비구니들하고 섞여 있다고, 사문을 잊어선 안 된다.”

“네. 아저씨도 잊지 않을 거예요.”

한쪽 무릎을 꿇은 백리현. 그의 투박한 손이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부문주 소소. 그곳에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여라.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네가 살문의 무공 중 하나를 완성했다면 더없이 기쁘겠구나.”

“두 개를 완성하고 올게요…….”

“그래, 너의 자질이라면 충분할 게다. 그리고 우리 문파의 무공을 수련하는 걸 누가 훔쳐보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인 소소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풀러 앞으로 내밀었다. 아버지가 사준 첫 번째 선물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노리개였다.

“제가 가장 아끼는 거예요. 다시 올 때까지 문주님한테 맡길게요.”

일순간 백리현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살수들의 왕이 노리개를 가지고 다니다니? 심정이 착잡했지만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였다. 흡사 전낭을 축소해놓은 모양새였다. 안에는 손톱만 한 구슬 하나가 들어있었다.

“나도 이것을 네게 맡기마. 하나밖에 없는 살문의 보물이다.”

“보물이요?”

보물이란 말에 소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유환이라고 한다. 내공을 증진 시켜주고, 내상을 즉시 치유해주는 효과가 있지. 허나 사용할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란다.”

물물 교환을 마친 백리현은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주변에 펼쳐놓은 기막을 걷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무의 전음이 들려왔다.

- 놀랍군. 무림을 공포에 떨게 한 살왕이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상함이라니.

백리현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가 잠시 서렸다가 금세 증발했다.

볼일을 마친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더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연설화가 산군의 목줄을 풀며 중얼거렸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로구나.”

소소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머뭇거렸다.

“할아버지는 못 봐요? 할아버지도 보고 싶어…….”

장양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일국의 지도자인 민공을 이곳으로 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소무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지금 바빠서 올 수가 없겠구나. 아버지가 안부 전해줄게. 우리 소소 씩씩하게 잘 지내고 올 수 있지?”

“네……. 근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소무는 아이를 따듯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그럼 언제라도 달려오너라. 지금처럼 아버지가 안아줄 테니.”

부녀는 진한 포옹을 하며 작별을 고했다. 앞으로 한 달의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소소는 아버지에게 인사하고는 산군의 등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앞에는 이미 설화가 타고 있었다.

단순히 달리는 속도로만 따진다면 산군을 따라잡을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은화파파를 완벽히 따돌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산군의 고삐를 움켜쥔 설화가 소무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다녀올게.”

“응, 조심히 다녀와.”

마교 출신인 그녀가 아미파까지 마중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현정과 청해가 새벽에 미리 출발하여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설화의 목적지는 그곳까지였다.

“아버지, 잘 있어요!”

소소의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산군의 앞발이 지면을 박찼다. 질주를 개시한 것이다. 눈으로조차 쫓기 힘들 정도로 벼락같은 움직임이었다.

설화와 소소를 태운 산군은 어느새 성벽을 수직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났을 시점에는 시야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무는 뒷짐을 쥔 채 부인과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여운을 느끼듯 한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반각이 지났을 즈음,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하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딸과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아쉬운 모양이오.”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습관처럼 어딘가에 은신해 있는 백리현이었다.

“고작 한 달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하군.”

“그래도 마음이 불안한 것보다는, 잠시 허한 것이 낫지 않소. 아이를 위해 잘 판단한 것이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이제 우리도 할 일을 해야겠지.”

소무와 백리현은 나란히 궁성으로 향했다.

은화파파가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던 곳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부터는 무림 제일 살수로 이름을 올린 백리현의 몫이었다. 하체를 구부린 그는 두 눈을 감고 추혼향이 남겨놓은 미세한 흔적을 추적했다.

“저 방향이오.”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살왕은 앞장서서 방향을 잡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예상대로 추혼향의 흔적은 성 밖으로 이어져 있었다.

소무는 뒷짐을 쥔 채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다녔다.

명성에 걸맞게 그의 추적술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문제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었다. 그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성인 남성이 걷는 속도에 불과했으니.

한 시진이 지난 후 답답해진 소무가 등 뒤에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래서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검성이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구려. 조급해하지 마시오. 인내는 살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

“나는 자네처럼 살수가 아니야. 가만히 지켜보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닌데, 살문도 이제는 방식을 좀 바꿔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나는 묵묵히 본분에만 충실할 뿐, 그런 것은 관심도 없고 뭘 바꿔야 하는지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소. 하지만…… 나의 다음 세대에서는 무엇인가가 바뀔지도 모르겠구려.”

다음 세대가 누굴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소무였지만, 모르는 척했다. 단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은근슬쩍 물었을 뿐이다.

“어떻게 바뀔 것 같은가.”

“살문의 모든 규정은 문주가 정하는 것이오. 그러니 문주의 성격에 맞게 변화하지 않겠소?”

“그렇겠군.”

그들은 어느새 장안성을 멀리 벗어나 강가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흔적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노괴가 강을 건넌 것 같소.”

강의 폭은 백여 장에 이른다. 그리고 근처에 나룻배 하나가 보였다. 허나 유람을 하듯 그것을 타고 강을 건널 만큼 한가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소무와 백리현의 신형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타앗-!

둘은 마치 경쟁을 하듯 나란히 물수제비처럼 나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 맞은편으로 건너왔지만, 이들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저쪽 숲속으로 들어간 것 같소.”

이곳에서부터는 짙은 풀 내와 짐승들의 배설물 때문에 추적이 쉽지가 않았다.

둘은 별다른 성과 없이 밤이 되도록 계속해서 숲속을 헤집고 다녔다.

“비가 내릴 것 같군.”

소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방울의 비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소낙비가 되어 후두두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차 굵고 거세졌다.

투투투투툭-!

폭우가 그들을 덮치고 있었으나 옷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기(氣)에 빗방울이 튕겨지고 있는 것이다.

소무와 백리현은 일 장 거리를 두고 각자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백리현은 원래 말수가 없었고, 소무 또한 쓸데없는 잡담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소무는 품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거기엔 설화가 챙겨준 육포가 한 장 들어있었다.

찌이익-!

절반을 찢어낸 소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육포는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곡선을 그리며 백리현의 코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덥석-!

“……?”

“먹을 만할 거야. 아내가 직접 만들어 준 거거든.”

두 명의 사내는 또다시 입을 닫으며 조용히 육포를 뜯기 시작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며 더욱 거세져만 갔다.

반시진이 더 지난 후 소무의 무거운 음성이 빗줄기를 뚫고 메아리쳤다.

“그런데 어쩌다가 살수의 길을 걷게 되었나.”

“나도 모르겠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나는 이미 살인 훈련을 받고 있었소.”

빗줄기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백리현의 눈이 서글픈 모양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살문의 살수로 길러져 일생을 문파에 헌신해왔다. 최연소의 나이에 특급살수에 올랐으며, 문주를 누르고 살왕의 칭호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였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그리고 의식의 흐름대로 그리하고 있을 뿐.
그때 소무의 중얼거림이 또다시 들려왔다.

“추억이 별로 없겠군.”

어디 추억뿐이겠는가. 어떻게 웃는지도 잊었을 정도였다.

“나에겐 살문이 전부였소.”

소무는 그의 표정에서 외로움을 읽었다.

“내가 판단할 부분은 아니지만, 듣기만 해도 쓸쓸한 인생이로군. 그래도 친구 하나쯤 있으면 그리 외롭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백리현의 시선이 비 내리는 하늘을 향했다.

‘……친구라.’

그러고 보니 한 명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친구가 말이다.

무표정한 백리현의 얼굴이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평소에 웃는 경우가 없으니, 그 모습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그렇기에 조금의 가식도 없는 순백의 미소처럼 보였다.

“그래. 그렇게 웃으니 보기 좋지 않은가.”

“…….”

어색해진 백리현은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소무는 피식하고 웃고는 화두를 돌렸다.

“그런데 추혼향을 어떻게 그 노괴에게 뿌릴 수 있었나.”

“운이 좋았을 뿐이오.”

“불구의 몸일지라도 오래전 탈마를 이룬 노괴일세.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백리현은 당시의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추혼향은 구슬 형태의 암기에 담겨 있다. 은화파파는 충분히 그것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파괴하여 뒤집어쓰는 것을 택했다.

단순히 순간적인 판단 실수라고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소 형 말대로 어쩌면 우리가 유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무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검성과 살왕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 감히 누가 이들을 동시에 유인한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아내도 그것을 우려하더군.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지.”

직접 가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어느새 소나기가 물러가고 다시 눈부신 햇살이 이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살왕이 다시 앞장서서 숲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길 반 시진. 숲은 이름 모를 야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사람이 진입할 수 없는 험준한 산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거의 다 온 것 같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소무는 기척을 완전히 갈무리했다.

더는 완벽할 수 없는 은밀함. 이들의 걸음걸이에서는 낙엽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폭포수였다.

소무와 살왕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각이 지난 후 둘의 걸음이 동시에 정지했다.

- 노괴가 저기 있소.

백리현의 전음이었다. 이미 소무도 그곳을 보고 있었다.

절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폭포 아래. 그 거센 물줄기의 중심에 한 노파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백발이 무성한 뒷모습이었지만, 은화파파임을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노괴의 신체에 닿지 못하고 갈라지는 폭포수. 그리고 마두임에도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절단된 것으로 보이는 한쪽 팔까지.

- 우선은 좀 지켜보는 게 좋겠군.

살왕과 함께 퇴로를 차단하여 덮친다면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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