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거기 딱 기다려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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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거기 딱 기다려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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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거기 딱 기다려라 (3)
2022.08.05.
은화파파를 숨어서 지켜본 지 한 시진이 지났다.
폭포수 아래 가부좌를 튼 눈앞의 노괴는 미동조차 없었다.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자들은 명상을 통해 수련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기에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느낌이 석연치 않았다.
그때 소무의 고개가 좌측 어딘가를 향했다.
근처를 정찰하고 온 살왕 백리현. 그가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으로 기막(氣膜)을 둘렀다.
“이 주변엔 아무것도 없소.”
만약 주변에 매복 따위의 함정이 있다면 살왕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터.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집을 움켜쥐었다.
“음. 괜한 우려였단 말인가?”
“하지만 아직 살펴보지 못한 곳이 한 군데 남았소.”
“……?”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폭포수에 가려진 절벽을 향했다.
“저 노괴가 앉아 있는 폭포 주변은 정찰이 어렵소. 살문의 암보(暗步)를 극성으로 펼치더라도, 이 장 거리 이내에서 탈마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소무는 안광을 빛내어 백리현이 말한 곳을 살펴보았지만, 특이한 부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군.”
“결정하시오. 선공은 내가 암습으로 하겠소. 갚아줄 것도 있으니.”
어둠 속에서 날리는 살왕의 첫 번째 일격은 소무조차도 긴장해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망설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시작하지.”
백리현은 허리춤의 태도를 천천히 뽑아 들며 말했다.
“노괴의 흉마살혼조를 조심하시오. 그렇게 강한 무공은 내 평생 본 적이 없었으니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소무.
그 순간, 백리현의 전신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유령처럼 변해갔다.
소무도 검집을 움켜쥔 채 하체를 낮추어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살왕이 일격을 내지르는 순간 전력으로 내달려 끝장을 볼 속셈이었다.
백리현이 은화파파의 등 뒤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소무가 다급히 그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 잠깐 기다리게.
걸음을 멈춘 백리현은 어둠 속에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무의 시선은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새에 고정되어 있었다. 은화파파의 머리 위를 향해 낮게 날고 있었다.
그러길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날아가던 새가 절벽 속으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등골이 서늘해진 백리현은 다시 소무의 옆으로 돌아와 기막을 둘렀다.
“……폭포수 주위로 기문환영진이 펼쳐져 있소.”
기문환영진(奇門幻影陳). 돌이나 나무 등 기물 등을 이용하여 천지의 조화로 환영을 만들어내는 진법이다.
삼라만상의 조화를 이용해 외부와 내부를 단절한 결계(結界)이기도 하며, 내부에 일어나는 변화는 기문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다.
살문에도 이러한 수법이 몇 가지 있지만, 눈앞의 기문진은 수준 자체가 달랐다.
“저런 형태의 기문진은 처음 보는군.”
“아마도 당대 무림의 것은 아닌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는 검성과 살왕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교묘한 환영진이었다.
소무는 두 눈을 감고 신체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감지능력이 십 리 밖에서 지저귀는 새의 지저귐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해졌다.
그의 신경은 폭포수 주변으로 흐르는 기(氣)의 흐름에 집중되어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기문진의 중심이 은화파파의 단전으로 이어져 있다니. 그러니 눈치채지 못할 수밖에.’
백사십 년 이상을 다져온 노괴의 단전. 그 안에 축적된 내공은 한계를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 힘을 근본으로 펼쳐진 기문진이었다.
그리고 그때. 아주 찰나였지만, 폭포수 뒤로 보이는 절벽에서 미세한 마기(魔氣)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절벽 내부에 별도의 공간이 있을 터.
“기문진 안에 매복한 녀석들이 있군.”
“어느 정도나 있겠소?”
“들어가 보기 전에는 파악할 수 없네. 우리 둘을 동시에 유인해도 자신 있을 만큼은 준비했겠지.”
역시나 연설화의 직감대로였다. 무턱대고 공격했다가는 낭패를 당할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저 노괴는 조력자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분명 소무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기존의 마교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기에 은화파파를 도울 수 있는 조력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노파를 따르는 잔챙이들도 앞서서 모두 쓸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원군이라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검성과 살왕을 동시에 유인할 정도면 어설픈 전력이 아닐 터. 그것이 가능한 세력은 오직 한 곳밖에는 없었다.
소무는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신마교와 손을 잡았단 말인가…….”
은화파파는 무너진 마교의 정통계파였으며, 오래전에 교주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현재의 신마교는 성향이 다른 반대계파로 서로 협력할 수 없는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정통계파인 은화파파가 그들의 손을 잡는 것은 자신의 일생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자존심을 버리는 행위였다.
하지만 원한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지만 물러가는 것이 좋겠소. 불확실성을 안고 시도할 필요는 없으니.”
기문진 안에 얼마나 많은 초인이 숨어있을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살수의 직감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무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이번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그럼 무슨 방법이 있다는 말이오?”
소무는 폭포수를 지그시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노파가 지원군을 불러왔으니, 우리도 어느 정도 머릿수를 맞춰줘야겠지.”
“지원군이라면……?”
“우선 돌아가서, 내 아내가 돌아오길 기다려보자고. 며칠 동안은 계속 저러고 있을 테니.”
* * *
하늘을 꿰뚫을 듯 높게 솟은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불교의 성지중 하나인 아미산(峨眉山)이었다.
랑아대의 백부장인 현정과 청해.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는 여자아이 하나가 양손을 붙잡고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소는 이렇게 높은 산은 처음 와보지?”
“네…….”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현정을 올려다보는 소소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짙게 남아있었다. 조금 전 이틀 동안 함께 달려온 엄마와 작별했기 때문이었다.
소싯적 무림의 마두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가 아미산에 출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산맥의 중턱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눈앞에 거대한 푯말이 나타났다.
【이곳부터는 아미파의 영역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불허한다.】
현정과 청해는 잠시 망설였다.
“어떡해요, 사형?”
화산파 출신의 대원들이었기에 긴장감이 더했다.
화산파의 도사들이 여승들만 있는 아미산에 오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림맹과 협력관계에 있는 소나라 군부의 장교들이지 않은가.
“소소를 혼자 올려보낼 수는 없잖아.”
“아무튼,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청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사방에서 짙은 살기(殺氣)가 쏘아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백한 경고 신호였다. 그것은 오직 현정과 청해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소소에게는 어떠한 기운도 전해지지 않았다.
현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적이 아니니 살기를 거두시오.”
그때 어디선가 내력이 실린 여인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 돌아가라.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을 불허한다.
자신의 위치를 숨겨 말을 하는 기술인 허공전성(虛空傳聲)이었다.
역시나 순순히 들여 보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소나라에서 온 관원들이오. 아미파의 문주님께 전할 것이 있어서 왔소.”
- 마지막 경고다. 그곳에서 한 걸음을 더 걷는다면 공격하겠다.
예상대로였다. 이곳 아미산은 사천성에 있으며, 포나라의 영역이었다. 타국의 관원들이 이곳에 찾아와 신분을 밝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듯했다.
고민하던 현정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그럼, 마주 보고 얘기 좀 합시다.”
그 순간 길목의 좌우에 자리한 나무 위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날아왔다.
화산파로 따지면 이대 제자 수준쯤 되어 보이는 움직임. 이 정도로는 전혀 위협이 되질 않았다.
현정과 청해는 제 자리에서 한 손만을 움직이며 검집을 휘둘렀다.
캉-! 카캉-!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거리를 벌리는 여승들. 그녀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현정과 청해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말과는 달리 상대의 수준에 놀란 눈치였다. 근처에 매복해 있던 아미파의 고수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진법이라도 펼칠 듯한 기세였다.
이대로 방관한다면 랑아대의 장교들이라 할지라도 위험해질 수가 있었다.
현정은 품속에서 백부장의 명패를 보여주고는, 소무가 건네준 서신을 꺼내어 내밀었다.
“소나라의 대장군께서 작성한 친필서신이오.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이것을 문주님께 좀 전달해주시오.”
배분이 가장 높아 보이는 여승이 다가와 그것을 건네받았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고위 관료의 인장으로 짐작되는 것이 찍혀있었다.
무림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는 국적을 불문하고 관군과의 마찰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서신을 옆에 있는 여승에게 건네었다.
“만약 네 말이 거짓이라면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서신을 건네받은 여승은 경공을 펼치며 아미산의 정상을 향해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정과 청해는 소소의 손을 잡고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반응은 예상외로 빨리 왔다. 고작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신을 가져갔던 젊은 여승이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고수가 내려오고 있었다.
아미파의 여승들이 합장하며 그녀를 맞이했다.
항렬이 가장 높은 제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로님께서 어찌 직접 오셨습니까……?”
아미파에서 항렬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었다.
그녀는 여승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소소를 향해 다가갔다.
“네가 그분의 딸이로구나.”
“안녕하세요…….”
“오냐. 헌데 어린 것이 어찌 기를 갈무리하고 다니느냐.”
소소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친구들이 무서워하거든요…….”
소소는 설화원의 친구들 때문에 항상 기(氣)를 갈무리하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살문의 기술을 익힌 뒤로는 그 기술이 더욱 정교해져 일반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뭐 상관없다. 여하간 문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올라가자꾸나.”
소소는 현정과 청해를 번갈아 보며 머뭇거렸다.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운 모양이었다.
“……꼭대기까지 삼촌들이랑 같이 가면 안 돼요?”
묵묵히 지켜보던 여승들은 금혜사태가 단번에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아미파에 남자가 출입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그것도 원로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금혜사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허락하마. 그리하거라.”
여승들은 물론이거니와 현정과 청해도 놀랐다.
말을 마친 금혜사태는 등을 돌려 무리를 인솔했다.
뒷짐을 쥔 채 물 흐르는 듯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경공은 신비롭기가 그지없었다.
청해가 감탄 어린 표정으로 현정에게 전음을 보냈다.
- 사형, 저게 바로 아미파의 유유신법(流流身法)인가 봐요.
- 그런 것 같군. 명색이 구대문파의 상승 경신법이니 저 정도는 되어야지.
잠시 후 아미파에 도착하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현정과 청해를 보고 어린 비구니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소소 또래의 어린 비구니부터 십 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지금이 아니면 남자를 볼 기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산 자체가 불가능한 어린 비구니들이었다.
랑아대의 젊은 대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환골탈태를 이뤘기에 매끄러운 피부였으며,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잘생겼어…….”
“어머.”
그 순간 금혜사태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동시에 쩌렁쩌렁한 고함이 터져 나오며 아미산을 메아리쳤다.
“이 요망한 것들, 썩 물러가지 못할까!”
화들짝 놀란 비구니들이 새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생각보다 엄격한 모습에 현정과 청해의 얼굴에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사형, 여기 분위기가 영 아닌데요. 정말 소소를 맡겨도 괜찮은 거예요?
- 걱정이네. 고작 한 달이지만……. 잘 적응해야 할 텐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금혜사태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두 분은 이제 이곳에서 하산하시지요. 아이는 저희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