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누가 더 악인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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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누가 더 악인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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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누가 더 악인인가 (1)
2022.08.06.
태상각(泰上閣). 아미파의 원로들이 평소 대소사를 논의하는 전각이다.
이곳에서 문주 금정사태와 장로 금혜사태가 흐뭇한 미소를 띠고서 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춤에 날이 없는 소검과 퉁소를 차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그래, 이름이 소소라고? 예쁘게도 생겼구나.”
“네…….”
“편하게 지내거라.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고맙습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소소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상상했던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안 온다고 버텼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삼촌들은 한 달이 지나야만 데리러 올 터였다.
그때 금정사태가 내공이 실린 음성으로 밖에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혜인아. 잠시 들어와 보아라.”
젊은 여승 하나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들어와 금정사태 앞에 합장했다.
태상각을 지키는 일대제자 중 하나였다.
“말씀하십시오, 문주님.”
“한 달 동안 머무를 귀한 식객이니 불편한 것이 없도록 잘 챙겨주거라. 막내들이랑 같이 지낼 수 있도록 안내부터 해주는 것이 좋겠구나.”
막내란 아미파의 어린 삼대제자들을 지칭한 말이었다.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혜인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귀한 손님이라면…… 철부지들보다는 이대제자들 사이에서 보살핌을 받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아이들은 응당 또래와 어울려 지내며 성장해야 하거늘.”
“하지만…….”
혜인은 말끝을 흐렸다.
문주를 포함한 원로들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들이었다. 사실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던 혜인은 말문을 돌렸다.
“삭발식부터 진행하는 것이 좋을지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소는 큰 눈을 끔뻑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아이의 얼굴을 지켜보던 금정사태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두상을 보니 잘 어울리긴 하겠다만, 굳이 식객의 머리까지 밀어서 뭣하겠느냐? 얘기 끝났으면 어서 물러가거라.”
“예, 문주님.”
혜인은 소소의 등을 감싸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정사태가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검성의 딸이란 말인가? 어린 것이 기(氣)를 숨기고 있음에도 기세가 굉장하군. 적어도 삼대제자나 이대제자 중에서는 당해낼 아이가 없겠어.”
금혜사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요. 화령이하고 비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아이만큼은 예외겠지. 화령이는 이미 일대제자들의 수준을 넘어섰어.”
그때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금혜사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화령이의 수련에 저 검성의 딸이 도움 되지는 않겠는지요? 좀 더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을 테고.”
금정사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마. 혹여 다치기라도 한다면, 내가 아무리 검성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뒷감당을 할 수가 없어.”
“……알겠습니다, 장문인.”.
무림맹의 핵심 문파들은 삼 년 뒤 비무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우승한 아이는 각파의 최고수들에게 절세무공을 전수 받고, 무림을 이끌어갈 지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화령은 천살성(天殺星)의 기운을 타고난 무골로, 아미파에서 모든 것을 걸고 키우는 비밀 병기였다.
“후…….”
“왜 한숨을 내쉽니까?”
화령이라는 이름이 거론된 뒤부터 금정사태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내가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실수한 것 같아. 그 아이의 살심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지…….”
“이미 비무대회에 우리 아미파의 불광일선지를 내걸었지 않습니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으니,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우승을 차지해야 합니다.”
금정사태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두 눈을 감고 불호를 외쳐댔다.
“아미타불. 화령이 그 아이는 반드시 금강경(金剛經)을 함께 공부하도록 살펴줘야 하네. 천살성의 기운을 누르지 못한 상태에서 화경에 접어든다면 무림에 재앙이 불어 닥칠 수 있어.”
* * *
“법의가 잘 어울리네.”
혜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승려복을 입은 소소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저도 머리를 깎아야 해요?
“그러지 않아도 된대. 마음이 불편하면 법모로 한번 가려볼까?”
미리 준비해온 식객용 법모를 머리에 씌어주자, 제법 그럴싸한 동자승의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모자를 선물 받아서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소소가 보조개를 피워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히히.”
혜인은 소소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숙소에 먼저 가볼까?”
“네. 언니.”
손을 맞잡은 둘은 아미파의 중심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막내 항렬인 삼대제자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소소는 처음 보는 문파의 모습이 마냥 신기한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불가의 문파답게 부처상들이 즐비했으며, 아미산의 장관과 어우러진 웅장한 전각들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잠시 후 소소의 시선이 좌측의 연무장에 고정되었다.
오십여 명의 어린 비구니들이 대열을 맞추어 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곳은 아미파의 삼대제자들이 수련하는 곳이란다. 실력이 제법이지?”
“네, 멋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흥미를 끄는 실력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십여 장을 전진하자 작은 연무장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소소의 얼굴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승려복의 상의를 탈의하고, 가슴을 천으로 칭칭 휘감은 여승이 있었다.
“던져.”
여승이 나직한 한마디를 내뱉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열 명의 다른 여승들이 죽창을 던졌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앙-! 콰콰쾅-!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죽창들. 그 사이에는 상체에 천을 동여맨 여승이 섬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와아…….”
소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여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세 살 정도는 많아 보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휘감은 천 사이로 드러난 상체의 근육은 산등성이를 그리고 있었으며,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위협적인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흉기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쟤랑 눈 마주치지 마.”
“……왜요?”
그때였다. 천을 휘감은 여승의 시선이 이곳을 향했다.
맹수처럼 이글거리는 눈빛. 그리고 얼어붙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은 살왕보다 더 냉혹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소소가 인사를 건네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뭘 봐? X발.”
일대제자와 함께 있는데 어찌 막내항렬이 저런 도발을 해온단 말인가. 게다가 불문을 공부하는 여승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단어였다.
명문정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소소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얼굴이 붉어진 혜인이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어디 감히 사저 앞에서 패악질을 벌이느냐?”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던 삼대제자는 등을 돌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랄하고 있네. 처맞으려고.”
작게 소곤거린 한마디였으나, 무공을 수련한 혜인이 그 말을 듣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소소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그냥 가요, 언니.”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있던 혜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소소의 손을 붙잡고 다시 나아갔다.
마음 같아선 달려가서 따귀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서운 아이였다. 일대제자인 자신조차도 말이다.
“소소라고 했지?”
“네.”
“방금 그 아이는 화령이라고 한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니까 절대 가까이 가지 마.”
단순하게 우울증 따위가 아니었다. 화령은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소문나 있었다.
“정신적 문제가 뭐예요? 가까이 가면 어떻게 돼요?”
혜인은 차마 그것을 설명해줄 수가 없었다. 최근에도 저 아이가 사저들을 폭행한 사건이 여러 차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원로들에게 고한다면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을 테지만,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아이였기에 후환이 두려웠다.
게다가 막내 항렬에게 맞았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가 속만 부글부글 끓이는 상황이었다.
혜인도 치를 떨고 있던 참이었다.
“그냥 무서운 언니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관심도 가지지 마.”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이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삼대제자들의 숙소가 밀집한 지역에서 비어있는 작은 전각이었다.
“이곳이니 편히 쉬어. 틈틈이 내가 찾아올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네, 언니. 고맙습니다~”
혜인은 이런저런 안내를 더 해주고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소소는 목재 침상에 누워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불문을 공부하는 곳은 더더욱 싫었다.
“휴.”
한숨을 내쉬던 소소는 벌떡 일어섰다.
심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산책이나 해볼 참이었다. 정식 제자가 아닌 식객의 신분이었기에, 이동이 허락되는 구역은 한정되어 있었다.
인적이 없는 외곽의 산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저 멀리 구름을 뚫고 나온 산등성이 위에 부모님들과 다롱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다시 울적해질 찰나 소소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응……?”
분명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였다.
아무런 인적없는 이곳에 누가 숨어서 울고 있다는 말인가.
호기심이 발동한 소소는 그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단풍나무 아래 한 아이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작은 체구로 보아 비슷한 나이 같아 보였다.
“흐흑.”
다람쥐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모르는 사이라 어색했다.
잠시 고민하던 소소는 허리춤에서 퉁소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해심소(海心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맑고 청량한 음률이 뿜어져 나오자, 울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눈을 마주친 소소는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얼굴 전체가 일그러져 있었다.
징그러워할 만도 했지만, 정작 소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전란 속에서 참혹함을 숱하게 봐온 마당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소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퉁소의 음률에 마음이 평온해졌는지 눈물은 그친 모습이었다.
잠시 후 해심소의 연주를 끝낸 소소가 방긋 웃어 보였다.
“나는 소소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니?”
“나, 나는…… 영영…….”
소소는 퉁소를 허리춤에 꽂고는 한 걸음을 더 다가갔다.
아미파에서 눈높이가 같은 아이는 처음이었기에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친구 할래?”
“……친구?”
영영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는 지금의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듯 당황하고 있었다.
“응. 히히.”
“……나 안 무서워?”
소소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고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응. 근데 영영아, 왜 울고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이미 소소는 살왕에게 배운 대로 영영의 전신을 탐색하고 있었다.
법의에 남아 있는 흙먼지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힐끔힐끔 드러난 상처들까지.
누군가한테 두들겨 맞은 흔적이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었다.
“나랑 친구 할 거지?”
“응?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