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누가 더 악인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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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누가 더 악인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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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누가 더 악인인가 (2)
2022.08.07.
아미파의 생활공간은 크게 네 군데로 나뉘어 있으며, 항렬에 따라 출입 가능한 곳이 제한되어있다.
소림사 같은 경우는 식객들에게 별도로 제공되는 구역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아미파는 그러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렇기에 소소에게 허락된 공간은 삼대제자들과 동일했다.
“영영아, 배고프지 않아?”
소소는 배를 쓰다듬으며 죽어가는 시늉을 했다.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영영이 반가운 소리를 해왔다.
“그럼 우리 밥 먹으러 갈래?”
“응! 빨리 가자. 쓰러질 것 같아.”
아미파의 식사는 수행을 위해 하루에 한 번으로 제한되며, 오(午)시에서 미(未)시 사이에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영영이 앞장서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공식전(共食殿)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이었다.
열려있는 문 아래로 돌계단이 있었으며, 어린 비구니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소소야, 잠깐만……”
영영은 근처의 다른 전각 모퉁이에 숨어서 공식전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고작 밥을 먹는 곳인데 뭐 하는 짓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영아? 나 배고파.”
안에 있는 인물들을 모두 확인한 영영은 소소에게 손짓하며 신호를 보냈다.
“지금 가서 먹어도 될 것 같아. 빨리 먹자.”
도둑고양이처럼 후다닥 들어가는 영영의 모습이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것저것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안에는 길게 이어진 식탁에 이십여 명의 비구니들이 끼리끼리 모여앉아 있었다. 대다수가 영영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다.
입구에 들어선 소소는 나무를 깎아 만든 밥그릇과 수저를 챙겨 들었다.
대충 훑어보니 군영에서 삼촌들과 먹던 식사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먹고 싶은 만큼 푸는 거지?”
“응.”
그릇에 밥을 한가득 담은 소소는 위에다가 반찬을 수북이 쌓았다.
산나물과 버섯이 대부분이었다. 좋아하는 고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일단은 배를 채우는 게 중요했다.
“맛있겠다~ 어서 먹자.”
둘은 가장 구석진 곳으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소소의 밥그릇을 쳐다보던 영영은 눈을 크게 뜨고 끔뻑거렸다.
“소소야,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여기선 음식을 남기면 안 돼…….”
아미파에서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어쨌거나 소소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미 움켜쥔 젓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입안 한가득 빵빵하게 차오른 볼을 보아하니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마이떠.”
“빨리 먹구 나가자.”
영영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래, 영영아?”
영영은 답이 없었다. 단지 안색이 창백해지며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무엇인가 느낌이 이상해진 소소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열댓 명의 여승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화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여승이 있었다.
왁자지껄했던 식당이 갑자기 조용해지며 한기가 맴돌았다.
잠시 후 화령이 중앙에 앉자, 나머지 비구니들이 호위하듯 둘러싸 앉았다.
묵묵히 젓가락을 몇 번 움직이던 화령이 행동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X발, 밥맛 떨어지네.”
그 순간 화령의 우측에 앉은 비구니가 이쪽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영영이 너, 밥 먹을 때 얼굴 돌리고 처먹으라고 했지?”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진 얼굴. 비구니들은 그런 영영을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무룩해진 영영은 상체를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젓가락질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화령이 흡족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개 들면 처맞을 줄 알아.”
그때였다. 돌연 소소의 미간이 좁혀지며 내 천(川)을 그렸다.
타앙-!
밥상에 손을 내리치며 일어선 소소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언니들이 고개 돌리고 먹으면 되잖아요!”
구석에 앉아 있던 여승들이 화들짝 놀랐다. 화령과 그 일행이라면 일대제자들조차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패거리가 아니던가.
처음 보는 아이. 삼대제자 중에서도 막내급인 영영과 같은 또래가 도전해온 것이다.
안색이 창백해진 영영이 소소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괘, 괜찮아 소소야. 나는…….”
화령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주변의 비구니들에게 물었다.
“쟤 뭐야?”
비구니 한 명이 화령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식객? ……장문인이 직접?”
“응, 건들지 말래. 파문시킨다고 했어.”
화령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놀고 있네.”
아무래도 이 무리는 소소에 대해 따로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말과는 달리 더는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어서 먹어, 영영아.”
소소와 영영이 다시 젓가락을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어이, 꼬맹이.”
옆을 돌아보자 빳빳하게 선 젓가락이 쏘아져 오고 있었다.
마교 최강의 암기술인 마화비전을 익힌 소소가 아니던가. 어딜 노린 것인지 눈에 훤히 보였다. 어깨 위로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겁을 주려는 속셈인 듯했다.
찰나의 순간 소소의 작은 손가락이 그것을 낚아챘다.
터업-!
그 순간 화령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내공이 담긴 젓가락이었다. 그것을 가볍게 낚아챈 것이다.
“나도 할 줄 알거든요?”
굳이 초식을 펼칠 필요까지도 없었다. 소소의 작은 손에서 쏘아져 나간 젓가락은 반월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고작 이 할의 공력만 담았기 때문일까? 화령의 손이 쭉 늘어나는 듯 보이더니, 어느새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것 봐라?”
설마 반격을 가해올 줄 몰랐던 화령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아이가 대드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보긴 뭘 봐요?”
화령이 옆에 있던 비구니를 지목해서 중얼거렸다.
“너, 가서 문 닫아.”
문을 닫고 은밀하게 일을 벌일 수작인 듯했다. 비록 막내 항렬들이 모여 밥을 먹는 곳이었지만, 이따금 아미파의 원로들이 찾아와 식사를 함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입구로 걸어간 비구니가 문을 닫다 말고 행동을 정지했다.
“뭐해?”
“태, 태상장로가 오고 계셔…….”
태상장로는 문파 내에서 금혜사태를 일컫는 칭호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가 금세 뒤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화령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로님 오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금혜사태는 제자들의 모습을 쓱 훑어보았다. 곧이어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화령을 바라보았다.
“화령이도 여기 있었구나. 얘기는 들었겠지만, 여기 잠시 우리 문파에 머무를 아이가 있다. 동생이라 생각하고 네가 잘 좀 챙겨주어라.”
“걱정하지 마세요. 장로님. 제가 보살펴 주겠습니다.”
“음, 그래. 요즘 금강경은 잘 보고 있느냐?”
화령이 방긋 웃으며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어 보였다.
“가지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보고 있어요. 저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가장 행복하답니다.”
“그래, 그래. 잘하고 있구나.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
“네, 장로님.”
금혜사태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다시 소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친구를 사귀었나 보구나.”
“네…….”
주눅이 든 목소리였다. 금혜사태가 소소 옆에 앉아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알고 보면 모두 착한 언니들이니 무서워할 것 없다. 식사 마치고 나랑 어디 좀 가자꾸나. 이곳을 구경시켜 주마.”
“……영영이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좋은 생각이구나. 그리하자.”
잠시 후, 식사를 마친 금혜사태가 소소와 영영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다시 장내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화령의 주위에서 비구니들이 눈치를 보며 끊임없이 소곤거렸다.
“쟤 뭐야?”
“어디서 굴러온 꼬마야? 아직 뭘 모르나 보네. 죽으려고.”
“저 기고만장한 것을 두고만 봐야 해?”
화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입술이 떨리며 소름 돋는 한마디가 내뱉어졌다.
“전부 입 좀 닥치고 있어. 죽이기 전에.”
서릿발같이 차가운 한기가 장내를 지배했다.
도저히 십 대 초반의 어린 비구니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살기(殺氣)까지.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깍지를 끼고 있던 화령은 반각이 지나서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영영이 잡아와. 혼자 있을 때.”
* * *
장안성에서부터 이십여 리 떨어진 험한 산지의 어딘가.
폭포수 아래 한 노파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매부리코에 한쪽 눈이 없는 얼굴,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오른팔은 백사(白蛇)의 비늘처럼 잘게 갈라져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더는 흉악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은화파파의 얼굴에는 심술이 가득했다. 닷새 동안 이러고 앉아 있었음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절벽에 대고 짜증 섞인 고함을 토해냈다.
“이틀 안에 걸려든다고 하지 않았더냐?”
대답은 절벽 안에서 들려왔다.
“그러길래 딸년을 먼저 잡아 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쪼그만 아이 하나 못 잡고서 빈손으로 온 게 누구였죠?”
기문진에 의해 가려진 절벽의 동굴. 그곳에서 백발을 늘어트린 여인이 은화파파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천검마녀 백묘진이었다.
낮게 내리깔린 노파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송곳처럼 후비기 시작했다.
“……노부가 사근사근 얘기해주니까 우스워 보이지? 한 번 더 지껄여 보아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통 계파였던 은화파파는 신마교의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무와 연설화의 협공에 당한 후 복수를 위해 자존심까지 버리고 전향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아직 교단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에 서열이 높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재 서열이 더 높은 백묘진은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뒤에는 두 명의 호법이 함께 있지 않은가. 신마교의 원로들이자 반박귀진(返璞歸眞)을 이룬 극마의 고수들이었다.
“다 죽어가는 걸 구해주고 본교에 입단시켜 주었더니 무슨…….”
백묘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었다. 주름 가득한 노파가 인상을 야차처럼 구기며 자신을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눈 내리깔아. 뽑아버리기 전에.”
“…….”
당황한 백묘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기세에서 노파를 누를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호법들까지 사태를 외면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반쯤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만 노기를 거두시고, 진정해 주십시오. 놈이 오다가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어느새 사근사근하게 변한 백묘진이었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더냐? 허나 닷새 동안 낌새가 없는 걸 보면, 올 마음이 없다는 게야!”
“오늘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면, 차선책을 준비하겠습니다. 파파께서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시면 됩니다.”
서서히 미소를 그리는 은화파파의 얼굴이 무척이나 소름 돋아 보였다.
“이년 진짜 물건이네.”
“곧 복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말이지요…….”
소무와 연설화에게 피맺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둘은 한마음으로 칼을 갈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길 한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백묘진이 벌떡 일어섰다. 호법들도 긴장한 듯 무기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은화파파의 귓가로 들려오는 전음.
- 왔습니다. 지금 파파의 뒤를 향해 걸어오고 있으니 준비하십시오.
백묘진은 기문진에 숨어서 밖을 살펴보고 있었기에 다가오는 소무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반면 은화파파는 등을 돌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었기에 뒤를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면 기척을 감지할 수 없는 상대였다.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은화파파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동시에 하나밖에 없는 눈동자가 분노에 잠식되며 붉게 충혈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