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누가 더 악인인가 (3)
(189/250)
189화 누가 더 악인인가 (3)
(189/250)
189화 누가 더 악인인가 (3)
2022.08.08.
- 준비하십시오. 파파의 등 뒤로 오 장 이내까지 접근했습니다.
백묘진의 전음이었다.
이미 은화파파도 조금 전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노파는 하나뿐인 오른쪽 눈동자를 굴리며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 기다려. 도망치지 못하게 진 안에 가둬놓고 덮쳐야 하니까.
계획은 그럴싸했다. 소무가 은화파파의 삼 장 이내로 접근하는 순간 기문진 안에 갇히게 될 터였다.
고작 기문진 따위로 현경을 가둘 순 없겠지만, 잠시 발을 묶는 것이면 충분했다. 흉마살혼조를 익힌 자신과 세 명의 극마가 함께하고 있으니. 설령 살왕이 함께 왔더라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계획은 계획일 뿐.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 파파……. 놈이 다가오다 말고 멈추었습니다.
- X발. 왜?
- 아무래도…….
느낌이 불길했다. 삼 장 이내로만 접근해오면 되는 상황이 아니던가. 소무는 고작 몇 걸음을 남겨두고 멈춰서 있었다.
- 아무래도?
-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작인 듯합니다.
그 순간 은화파파의 입에서 외마디 욕설이 뿜어져 나왔다.
“썅!”
동시에 노파의 고개가 좌측으로 젖혀졌다. 찰나의 순간 초승달 모양의 강기가 한 치 차이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쾅-!
날아가던 강기는 절벽의 어딘가를 강타하고 소멸했다.
벌떡 일어선 은화파파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를 갈았다.
검은 갑주 위에 붉은 피풍의를 두른 인물. 자신이 기다리던 자가 분명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애송이.”
소무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웃기는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던 주제에 애송이라니.”
“오늘은 다를 것이니 들어와 보거라.”
하나밖에 없는 은화파파의 오른팔이 유백색 광채에 휩싸였다. 오 장이 떨어진 소무에게까지 응축된 기(氣)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소무가 손에 쥔 검을 비틀어 쥐며 중얼거렸다.
“흉마살혼조를 완성한 모양이군.”
“잔말 말고 어서 들어와!”
은화파파가 인상을 구기며 도발해왔다. 그 이유를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서임을.
이미 그것을 눈치채고 있던 소무는 다가갈 마음이 없었다. 단지 하체를 낮추며 검을 잡아당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직접 오면 될 것이 아닌가.”
속이 뜨끔한 은화파파는 흠칫했다.
그 순간 소무가 움켜쥔 검이 밝은 빛에 휩싸이며 허공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탈혼검법 삼초식 비진난격(飛進亂擊).
초승달 모양을 한 수십 가닥의 푸른 강기가 전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나하나가 바위를 가를 만큼 위력적이었다.
은화파파의 오른손에서도 백색의 기류가 뿜어져 나오며 다가오는 강기들을 쳐내어 갔다.
콰콰콰콰쾅-!!!
소무와 노파의 중심에서 폭죽이 터지듯 밝은 섬광이 연달아 번뜩였다.
은화파파는 다급해졌다. 소무의 공격은 자신을 향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모든 것을 차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어코 흩어지던 몇 개의 강기가 절벽을 강타하고 기문진에 균열을 만들기까지 했다.
콰콰쾅-!
“이놈! 잔재주 부리지 말고, 어서 덤비거라!”
은화파파는 인상을 구기며 다시 도발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욱 어색해 보였다.
한차례의 공격을 퍼부은 소무는 호흡을 고른 후 또다시 자세를 잡았다.
“왜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 폭포에 보물이라도 숨겨 놓았나?”
은화파파는 어찌할 줄 모르고 인상만 구기고 있었다. 그때 귓가로 백묘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 아무래도 유인이 먹혀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매복을 눈치채기 전에 선공을 개시하십시오. 난전이 시작되면 저희가 합류하여 퇴로를 차단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백묘진의 제안을 따르는 수밖에.
“이놈!”
은화파파의 신형이 구름을 타고 나아가는 신선의 모습처럼 미끄러지듯 쏘아져 나갔다.
백사십 년을 축적한 무지막지한 공력이 노파의 오른손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소무의 검도 푸른빛 강기를 쉼 없이 토해냈다.
콰콰콰콰쾅-!!!
거센 굉음이 천지를 요동치게 했다. 근처에 자리한 나무들이 사정없이 꺾여나가고, 흙먼지가 돌풍을 만들어냈다.
한 차례의 격돌 후 은화파파의 오른손이 뱀처럼 늘어나며 갈고리 형상으로 변했다.
하체를 낮춘 소무는 어느새 발검술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탈혼검법 일 초식, 탈혼일섬(奪魂一閃).
갈고리가 앞가슴을 찢어발기려는 순간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쩌어엉-!!!
기의 파동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반경 십여 장의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크윽!”
소무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파괴력이었다. 몇 합만 주고받아도 내상을 피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 이런 무식한 무공이…….’
살왕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비틀거리는 소무를 향해 다시 한번 은화파파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하늘을 가리며 다가오는 거대한 손바닥. 그것은 마치 빠져나갈 틈이 없다는 부처의 여래신장을 연상시켰다.
이를 악다문 소무는 전력을 다해 보법을 밟았다.
찰나의 순간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번뜩였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검성의 경신법인 섬전비영보(閃電飛影步)였다.
꽈아아앙-!!!
조금 전까지 소무가 서 있던 지면이 반 장의 깊이만큼 움푹 들어가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지막지한 공격이었다.
소무는 어느새 삼 장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도주할 자세를 잡았다. 절벽 안에서 극마의 고수 셋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군.’
만약 미리 눈치채지 못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탈마 한 명과 극마 셋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는 일. 은화파파가 다가오는 순간, 소무는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싸우다 말고 어딜 도망가느냐!”
등 뒤에서 은화파파가 내지른 고함이 십 리까지 뻗어 나가며 메아리쳤다.
소무는 노파의 경신술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지난번 싸움 때 연설화의 마화비전에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리라.
‘쫓아올 여지는 줘야겠지.’
소무는 은근슬쩍 내상을 입은 척 경공 속도를 조절했다.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조절하는 모습에, 은화파파와 세 명의 극마는 애가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 서라, 이놈! 승부를 보자!”
뻔뻔한 노파의 호통이 기가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잠시 후에는 원하는 대로 될 터였다. 코앞에 목적지가 보였으니.
좌우로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아름드리나무. 그 사이로 소무의 신형이 통과하고 지나갔다.
그의 뒤를 은화파파가 뒤따르며 멀어져갔다.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났을 때였다.
세 명의 극마 중 앞서가던 백묘진이 나무 사이를 막 통과할 찰나. 돌연 좌측 나무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다가오며 그 틈을 막아섰다.
“헉!”
화들짝 놀란 백묘진은 죽을힘을 다해 온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옆구리 사이로 태도 한 자루가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아악-!
백의가 찢겨나가며 핏물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절단되는 소리는 없었다. 찰나였지만 용케도 급소를 피해낸 것이다.
다급히 뒤로 물러선 백묘진은 좌우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신마교의 호법들이 당도한 것이다.
파앙-!
원로고수들답게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상대를 좌우에서 협공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비도 없이 혼자서 이곳으로 온 살왕이 아니었다.
그 순간 좌측의 숲속에서 햇살이 비추듯 빛무리가 쏘아져 나왔다.
아름다운 만큼 섬뜩한 빛살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교 최강의 암기술, 마화비전(魔華飛電) 일 초식 유설만개(油雪滿開)였다.
파파파파팟-!!!
살왕을 공격하려던 호법들은 화들짝 놀라며 공격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그들의 검이 수많은 잔상을 그리며 다가오는 비침들을 향해 휘둘려졌다.
카캉-! 카카카카캉-!
수십여 개의 비침이 튕겨지는 사이, 연설화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암화(暗火)에 휩싸인 그녀의 오른손이 좌측의 호법을 향해 벼락처럼 다가갔다.
꽈아앙-!
묵직한 굉음. 그리고 지척에서 연달아 또 한 번 들려왔다.
카앙-!
살왕과 우측의 호법이 일합을 주고받은 것이었다.
서로가 짝을 찾아 기수식을 취하며 노려보았다. 그사이 소무와 은화파파는 시야에서 멀어지며,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지혈을 마친 백묘진은 낭패와 짜증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네년이더냐!”
연설화는 눈앞의 호법을 경계하며 코웃음을 쳤다.
“정신 못 차린 거 보니 지난번에 덜 맞았나 보네.”
백묘진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몸속에 수십 개의 대침을 박아가며 금제를 시켰던 장본인이 아니던가. 그때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기혈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라도 잡아야 했다. 비록 자신이 경상을 입었지만 셋과 둘의 싸움이었다. 초인들의 싸움에서 수적 우위는 뒤집을 수 없는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확실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감히 역으로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유인하다니, 역시 교활한 네년의 수작이었구나.”
“누구보고 교활하대? 백사 같은 년이.”
“잠시 후에도 그리 비웃을 수 있는지 지켜보지.”
연설화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응, 계속 지켜봐.”
백묘진은 그녀의 우측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호법 한 명과 함께 그녀를 협공해서 쓰러트릴 수작이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좌우측에서 포위를 당하고 있음에도 설화의 얼굴에 여유가 넘치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직감은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 무슨 수작을…….”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지척의 나무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몸집이 두 배 이상 큰 거구의 관원이었다. 설마 또 다른 화경이 매복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는 손가락을 우두둑 풀어대며 계속 다가왔다.
“내 비록 왈패 출신이지만, 여자는 한 번도 때려본 적이 없거든. 근데 짐승에게까지 그런 규칙을 지켜야 할 필요는 없잖아? 죽을 때까지 때려주마.”
일광이었다. 그는 백묘진이 장안성에서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이 장 앞에 멈추어선 일광은 양손과 목을 풀고 있었다.
그때 연설화의 양손에서 암화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그녀의 절기인 흑룡신장(黑龍神掌)이 극성으로 펼쳐진 것이다.
“인원수는 맞춰진 것 같은데? 그럼 한번 놀아볼까?”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양측의 여섯 명이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두 명의 화경과 네 명의 극마가 뒤섞여 싸우는 난전이었다.
무림의 역사상 이런 전투가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폭풍우가 불어닥친 듯 반경 백여 장이 쉴 새 없이 뒤흔들렸다.
정신없는 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디선가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크르르릉.
돌연 근처의 풀숲을 헤집고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맹수라고 보기에는 그 몸집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터질 듯이 부풀어 꿈틀대는 등 근육과 칼날 같은 발톱. 그리고 양쪽 입꼬리를 올려서 드러낸 송곳니는 더는 흉악스러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태산을 지배했던 최강의 영물, 산군이었다.
슬금슬금 다가가는 산군의 붉은 눈동자가 활화산처럼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