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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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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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1)
2022.08.13.
가부좌를 틀고 있는 소무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의 손바닥은 눈앞에 있는 아이의 등에 밀착되어 있었다.
일 갑자를 보유한 영영의 내공에 자신의 진기를 실어 강제로 임독양맥을 타통시키는 중이었다.
“후.”
한 식경이 더 지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타인의 몸에서 막대한 진기를 운용하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심력의 소모가 대단한 듯 안색까지 창백해져 있었다.
‘한 번씩 할 때마다 수명이 단축되는 느낌이군.’
심신이 피로했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드르륵-!
방문을 열고 나오자 마루에서 소소가 토끼처럼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다리고 있었다.
반짝 빛나는 대머리가 웃겼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 귀여워 보였다.
“어떻게 됐어요, 아버지?”
“음. 환골탈태가 막 시작되었으니 궁금하면 들어가 봐.”
일이 잘되었다는 말에 소소의 입가가 함박웃음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양팔을 벌려 아버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맙습니다~ 아버지가 최고예요. 히히히.”
“요 녀석. 아버지를 실컷 부려 먹는구나.”
매끈한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소무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호흡을 골랐다.
마당에서 다롱이에게 먹이를 주던 설화가 물었다.
“끝났어?”
“응. 양주산에는 언제 들어가?”
은화파파를 처리했고, 소소도 돌아왔으니 다시 양주산의 분지에서 수련을 재개할 예정이었다. 하루빨리 사자후를 대성해야 진일심소곡을 합주할 수 있을 테니.
“우리 낭군님 떠나는 날에 맞춰서. 언제 갈 거야?”
“겨울이 지나면 바빠질 테니, 서둘러야겠지. 오늘 민공을 알현해서 상의해보려고.”
소무는 다가올 전투를 위해 수련의 길에 오를 생각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시간이 없을 터였기에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그것을 논의하기 위해 오늘 궁성에 갈 예정이었다.
“바쁘시네. 이것 좀 마셔 봐.”
사발에 정체 모를 탁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향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이게 뭐야?”
“내가 독살이라도 할까 봐? 어서 마셔. 남자한테 좋은 거라더라.”
“음.”
심호흡을 한 소무는 호흡을 멈추고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소무의 후각과 미각은 일반인보다 수천 배나 발달해 있다. 그러므로 느껴지는 고통 또한 더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독약을 마시는 게 나을 정도였다.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역한 맛과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옳지. 쭉쭉 들이켜.”
거사를 끝낸 소무는 적지 않게 놀랐다. 마시자마자 비워졌던 단전의 내력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단전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영약 종류인 듯했다. 한순간에 무려 십 년 수위의 내공이 상승한 듯 느껴졌다.
“크윽. 맛은 좀 그래도 효과는 좋은 것 같아.”
“느낌이 와?”
“느낌은 확실히 오는데, 두 번은 못 마시겠어. 근데 이 귀한 걸 어디서 구했어?”
잠시 머뭇거리던 설화는 산군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그거? 우리 다롱이의 분비물을 모아놓은 거야.”
“……뭐?”
얼핏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상급 영물의 분비물은 영약만큼 귀하다는 것을. 설마 그것을 모아 자신에게 먹일 줄이야.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모르고 먹었을 때는 약이었지만, 알게 된 이상 몸에서 거부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크억!”
억지로 구토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몸에 흡수되었는지 나올 기미가 없었다.
갑자기 마당에서 산군이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소무가 다급히 손아귀를 펼치자 미리 받아놓은 물동이에서 물줄기가 빨려들듯 올라왔다.
정신없이 입을 헹구고 있을 때 설화가 뒤에서 괜찮다는 듯 말했다.
“몸에 좋은 거라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분하고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후. 앞으로는 연매가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같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나는 괜찮아. 그럼 우리 딸에게…….”
그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소소가 웃으며 나왔다.
“나도 괜찮아요. 좋은 건 아버지가 먹어야 해요. 내 친구도 예쁘게 해줬으니깐. 히히.”
소소의 등 뒤로 환골탈태를 마친 영영이 쭈뼛쭈뼛 나오고 있었다.
열기에 그을린 화상 자국은 온데간데없어졌고 갓 태어난 아기의 피부처럼 뽀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마치 꿈같은지 몽롱한 표정이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평소 사람들과의 대화가 많지 않았던 영영이었다. 그렇기에 표현할 줄을 모를 뿐,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는 눈빛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아이의 말 한마디에 누적된 심적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소무는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걸 보니 나도 기쁘구나. 이제 힘들었던 과거는 잊고, 아름다운 길만 걸어가거라.”
“네…….”
그때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설화가 옆에 있던 바구니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왔다.
“자, 기념 선물이다. 하나씩 나눠서 써 보아라.”
영영이 움직이기도 전에 소소가 냉큼 달려가 낚아챘다.
“와, 너무 예뻐요!”
설화가 직접 삼베와 비단을 엮어서 만든 겨울나기용 모자였다.
앞면에는 알록달록한 토끼가 자수 되어 있었다.
“이렇게 어여쁜 숙녀들이 대머리로 돌아다니면 안 되지. 마음에 들어?”
“네, 너무 좋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물을 받아본 영영은 어색한지 머뭇거렸다. 잠시 후 마치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머리에 눌러써 보았다.
“고맙습니다.”
“그래, 둘 다 잘 어울리니 다행이구나.”
소소와 영영은 해맑게 웃으며 집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마침 소무도 궁성을 향해 나가려는 길이였다.
“어디들 가?”
소소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백상하고 같이 의식을 치르기로 했어요.”
“의식이라니? 무슨 의식?”
“말해줄 수 없어요. 이건 우리의 비밀이거든요.”
백상은 산와족의 무사였던 백약 부장의 아들로, 무공을 익힌 아이였다.
아이 셋이 무슨 의식을 치른단 말인가? 딸아이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미행해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시간이 좀 부족했다.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놀아.”
“네, 아버지!”
아이들과 작별한 소무는 곧장 궁성으로 향했다.
오늘은 이레에 한 번씩 관원들이 쉴 수 있도록 지정된 날이었다. 그렇기에 가는 곳마다 거리는 무척 한산했다.
장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근위병들이 기립하며 말을 전했다.
“바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장군.”
미리 장양에게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근위병의 어깨를 토닥이고 안으로 들어서자, 탁상에 앉아 붓대를 바쁘게 움직이는 장양이 보였다.
소무는 너스레를 떨며 천천히 다가갔다.
“지나친 업무는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고 독이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관원들보고 이레에 하루는 반드시 쉬라고 지시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민공께서는 실천하지 않으시는지요.”
살펴보던 상소문에 무엇인가를 기재한 장양은 붓대를 내려놓으며 껄껄 웃었다.
“허허. 자네, 농담이 많이 늘었구만. 어서 앉으시게.”
소무는 피식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하시군요.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양은 주전자를 들고 미리 준비된 소무의 찻잔을 채워주었다.
“인정승천(人定勝天)이라,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면 하늘도 이길 수 있다고 하였네. 아직 이 나라에 굶주린 백성이 있고, 억울한 백성이 있는데 어찌 이 붓을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시다가 옥체라도 상하실까 걱정됩니다.”
“허허허. 옥체라니, 그런 말씀 마시게. 이 늙은 몸뚱이에서는 뭐 금이라도 나온단 말인가?”
소무가 찻잔을 움켜쥐며 물었다.
“유능한 문관들에게 업무를 좀 분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어찌 이 나라에 나보다 뛰어난 인재가 없다고 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분야별로 최적의 적임자를 찾아 하나씩 임명하고 있네.”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소무의 얼굴이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제가 민공께 또 하나의 짐을 안겨드려야 하니 말입니다.”
장양은 이미 그가 찾아온 목적을 짐작하고 있는 듯 차분했다. 예전에 그가 언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가 온 모양이로구만.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겠지.”
“예.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습니다. 민공께서 허락하신다면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허락하고 말고가 무엇이 있겠는가. 나라를 위한 일이니 부담 갖지 마시게. 자네가 강해질수록 우리의 국방력 또한 강성해지는 것이니. 헌데 폐관수련의 장소로 어디를 택하셨는가?”
소무의 시선이 집무실의 벽에 붙어 있는 전략지도로 향했다.
“태공산입니다. 만일을 대비해서 가까운 장소로 택했습니다.”
“태공산이라……. 비록 지세가 험한 산이지만, 자네한테는 상관없는 얘기겠지. 겨울이 지나가기 전까지 별일이 없을 터이니, 추밀원의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정진하고 오시게.”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집무실을 향해 또 다른 손님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밖에서 근위병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양강 장군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게.”
문이 열리며 어린갑(漁鱗甲)으로 무장한 장수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입구에 서서 장양에게 예를 갖추고는 다시 소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장군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찾아뵈려 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음. 무슨 일이지?”
양강의 표정으로 보아 나쁜 소식은 아닌 듯했다.
그가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드디어 회룡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발포시험을 진행할 예정인데, 참관하시겠습니까?”
회룡포는 소무가 낙양에서 탈취해온 신형 투석기의 이름이었다. 시험을 목적으로 한 초도품 제작이 이제 완료된 것이다.
이미 회룡포의 위력을 알고 있던 소무였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참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장양을 안내했다.
“민공께서도 함께 가시지요.”
“암, 물론 그리해야지.”
양강이 근위병들과 함께 앞장서서 장소로 안내했다.
성내에서는 실험할 수가 없었기에 말을 타고 이동했다.
일식경이 지나 도착한 곳은 인적이 없는 험한 돌산의 초입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투석기 부대의 병사들이 두 다리를 붙이며 구호를 외쳤다.
“충!”
소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고들 많았네. 바로 시작하지.”
도착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회룡포는 이미 발사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장교가 상체를 숙여 보인 후 붉은 깃대를 움켜쥐고 나아갔다.
“발포!”
신호와 함께 병사 한 명이 다가가 밧줄을 고정한 장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묶여 있던 줄이 드르륵 풀리며 묵직한 무게추가 떨어져 내렸다.
콰앙-!
동시에 솟구쳐 오르는 지렛대. 그 안에서 발사된 석탄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하늘을 날았다.
잠시 후 절벽을 강타하자 거센 굉음이 수십 리를 뻗어 나갔다.
꽈아아앙-!!!
타격 지점 주위로 돌덩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작은 산사태가 일어났다. 석탄은 절벽을 반 장 깊이나 파고들어 있었다.
그 위력에 장양이 짐짓 놀라 잠시 말문을 잃었다.
“아직은 놀라시기엔 이릅니다.”
소무가 다시 신호를 보내자 장교가 깃대를 흔들었다.
“장전!!!”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달라붙어 지렛대에 고정된 밧줄을 잡아당겼다. 대선포에 비교한다면 고작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인원수였다.
끼기기기긱-!
장전을 마침과 동시에 또다시 발사 신호가 떨어졌다.
“발포!!!”
콰앙-!
묵직한 석탄이 또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 전과 같은 위치를 타격하는 것이 아닌가.
꽈아아앙-!!!
무게추를 이용하여 동일한 힘으로 발사되는 원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절벽을 깊숙이 파고든 석탄은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습니까?”
장양이 격양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떠한 성벽도 버틸 수가 없겠군. 휘나라가 저 무기로 우리를 침공하려고 준비 중이었다니, 소름이 돋지 않는가. 그들에게 탈취해온 기술이니 그대로 돌려줘야겠지.”
고개를 끄덕여 보인 소무는 양강에게 말했다.
“봄이 찾아올 때까지 회룡포의 재료를 충분히 준비해주시게. 필요한 곳에서 바로 조립할 수 있도록.”
투석기는 무게와 부피 때문에 완성된 상태로는 이동하는 것이 어렵다.
근처에서 재료를 조달하여 현장에서 만드는 방법이 일반적이나,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고 공성이 길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소무는 재료를 미리 준비하여 수레에 실어 이동한 후 목적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다가올 낙양 전투를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 의미였다.
“차질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