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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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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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2)
2022.08.14.
궁성 내 어딘가의 전각.
오십여 평에 이르는 이곳은 비축 창고로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현재는 살문(殺門)의 임시 본부로 몰래 사용되고 있었다.
“세 번?”
영영과 백상 앞에 소소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소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답했다.
“응. 이게 우리 살문의 가입의식이래.”
영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문주님이 따로 있다며……? 허락 안 받아도 돼?”
돌연 소소가 턱을 위로 올리며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두 개를 앞으로 내밀며 까닥거렸다.
“내가 서열 이 위야. 문주가 없을 땐 부문주가 모두 결정하는 거래.”
“아……. 그렇구나. 정말 살문에 가입하면 그늘에 숨는 거 배울 수 있어?”
소소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잠시 눈을 마주친 영영과 백상은 결심을 한 듯 소소에게 삼배지례(三拜之禮)를 올리기 시작했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소는 미리 준비해온 얇은 붓을 꺼냈다.
두 번째 의식은 살문의 문양을 신체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소소는 친구들의 어깨에 그림을 그려 넣으며 말했다.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부문주 다음에는 우호법하고 좌호법이 있대.”
백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럼 우리가 호법이야?”
“응, 우리 살문은 무공이 강한 순으로 서열이 정해진대. 백상이랑 영영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
경험과 무공의 숙련도는 백상이 압도적이었지만, 환골탈태를 이룬 영영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싸우고 싶지 않았던 영영은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내가 져…….”
그림을 다 그린 소소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그럼 백상이 우호법이고, 영영이가 좌호법 할래?”
“응, 좋아.”
“알았어!”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돌연 창고의 입구가 스르륵 열리며,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소소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다.
“얘들아, 인사해. 우리 문주님 오셨어.”
공간이 일그러지듯 아지랑이 치더니 흑의를 입은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싯적 무림인들을 공포로 떨게 했던 살문의 문주. 살왕(殺王) 백리현이었다.
“안녕하세요, 문주님……. 좌호법인 영영이에요.”
“우호법 백상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백리현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문의 문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꼬맹이들로 말이다.
“문주님이 외롭지 않게 친구들을 초대했어요. 나 잘했죠? 히히.”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호법들이라…….”
그는 전각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무림의 구대문파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대 살문이 아니던가. 그런 살문의 간부들이 전부 꼬마들로 채워지다니.
살문은 무공 순위로 서열과 직급을 정하는 것이 전통이었기에, 아이들보다 강한 자들을 입문시킨다면 상황은 바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휘나라의 황실을 와해시킬 때까지는 문파의 재건을 미루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무공을 수련한 아이들이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정도였다. 게다가 한 명은 소소가 생유환을 먹였다던 그 친구인 듯했다.
“문주님, 이제 우리 뭘 할까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토끼 모자를 쓴 부문주가 옷깃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마치 무슨 임무라도 내려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리현이 초췌해진 얼굴로 힘없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냥…… 무공 수련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너희들이 다 크기 전까지는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을 테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괜찮아요~ 빨리 우리한테 임무를 내려주세요!”
의기투합한 세 명의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백리현이 아니었다.
어디가서 살문의 이름으로 사고를 치기 전에 흥미를 돌려놓아야 했다.
“그럼 열흘을 주겠다. 만약 너희들이 그 안에 암보와 참격술을 모두 익힌다면, 내가 셋이 펼칠 수 있는 살문의 진법을 가르쳐주마.”
살문의 모든 살수가 익히는 대표 무공이었다. 암보(暗步)는 잠행술이었으며, 참격술(斬擊術)은 검법으로, 이미 소소는 두 가지 모두를 터득한 상황이었다.
“진법이요?”
소소의 눈에 흥미로움이 가득 들어찼다. 랑아대의 삼촌들이 진법 수련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끼워주지 않았기에 내심 서운하던 참이었다.
영영도 진법이 뭔지는 알고 있었으나, 아미파의 진법은 일대제자부터 수련할 자격이 주어지기에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백상은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무극삼재진(無極三才陣). 살문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 셋이 익히는 진법이다. 셋이 하나가 되어 이 진법을 펼친다면, 너희들보다 한 차원이 더 강한 적에게도 능히 대적할 수가 있다.”
아이들 셋이 참새 같이 늘어서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와아…….”
“대단해요.”
“빨리 배우고 싶어…….”
나름대로 성공이었다. 한숨 돌린 백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이곳엔 틈을 이용해 잠시 들린 것이었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다시 장양의 호위를 서기 위해 돌아가야 했다.
“열흘 뒤에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마.”
말을 마친 백리현은 연기처럼 사라지며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소소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친구들을 향했다.
“들었지? 너희가 열흘 안에 다 배워야 알려준대.”
이미 기본이 탄탄한 아이들이었기에 노력하기에 따라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진법을 배운다는 말에 신이 났지만, 그 목적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영이 호기심 서린 얼굴로 물었다.
“소소야, 근데 진법을 배우면 뭘 할 거야?”
어느새 팔짱을 낀 소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장안을 두르고 있는 진령산맥의 깊숙한 곳에는 무수히 많은 험산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태공산(太恐山)이 제일이었다.
사람의 자취가 전혀 묻어있지 않은 이곳엔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과 구름을 뚫을 듯한 자연경관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이 태공산의 꼭대기에는 넓은 분지가 존재한다.
이 분지의 존재는 중원에서 단 한 명밖에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최근에서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후우!”
소무의 깊은 숨결이 태공산의 분지를 향해 뿜어졌다.
그는 검을 천천히 내리깔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 소무가 서 있는 반경 백여 장으로는 가공스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베어 넘겨진 수백 그루의 나무들. 그리고 마치 폭풍이라도 휘몰아치고 간 듯 산산이 조각난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뒹굴었다.
도저히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의 눈꺼풀이 서서히 움직이며, 심연과도 같은 깊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십 년 만인 것 같군.’
수련을 위해 마지막으로 검을 잡아본 기억이 이십 년 전이었다.
천부적인 무(武)의 자질을 갖고 태어나 최연소의 나이에 검성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더는 세상에 적수가 없다고 판단했었다.
무림이라는 우물에만 갇혀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더는 소중한 사람들의 안위를 지킬 수가 없다.’
이미 휘나라의 대장군인 완안후이에게 탈혼검법의 절초를 보여주었다. 그는 같은 수법에 두 번 다시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쯤이면 파훼법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새로운 무(武)를 창조하고 한 단계를 더 도약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찌이이잉-!
검이 주인과 공명하며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 검명(劍鳴)이었다.
칠현금의 선율처럼 구슬픔 속에 청명함을 내재한 울음. 그것이 바로 소무의 검명이었다.
그의 검 끝이 건곤(乾坤)을 그리며 서서히 움직여갔다.
탈혼검법의 검결에 따라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속도는 매우 느릿했지만, 검날은 생명을 머금고 살아 숨 쉬는 듯 수많은 변화와 유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그의 검법은 마치 천상의 무희가 내려와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무아지경(無我之境). 소무의 모든 정신은 우주(宇宙)에 깃들며 자신의 존재를 점차 잊어갔다.
시간의 흐름을 망각한 채 본능적으로 검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검법은 점차 속도를 빨리하며, 바람과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파도와 같은 패도적인 모습으로 움직였다.
파앙-!
주변으로 파공음이 뿜어져 나오며 돌풍이 불어닥쳤다.
그의 속도가 절정에 이를 무렵 또다시 느려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느려지는 검날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검결을 따라 움직이는 검무는 날이 어두워지도록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해가 떠도 멈출 기미가 없었다.
만물과 동화되어 달을 베고, 해를 베며 우주의 일부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망각의 파도 속에 몸을 맡긴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돌연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끼이이잉-!
솟구쳐 오른 검날. 그곳에 비친 달빛이 얼굴을 비추었다. 소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이 며칠 만에 처음으로 달싹였다.
“나의 혼(魂)을 검에 담을 수 있다면 일격에 하늘도 무너트릴 수 있다.”
소무의 검 날에 검붉은 강기가 발현되며 서서히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의 단전에서 중후한 내기가 끊임없이 검 끝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엄청난 내기를 한계까지 머금은 검이 괴성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지이이잉-!!!
곧이어 검날이 전면을 향해 움직이는 순간 기괴한 현상이 일어났다. 눈앞의 허공이 일그러지며, 전방의 공간을 찢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지막지한 내공이 발출되며, 한정된 공간에 응집하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것에는 피할 방위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그 위력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쏴아아앙-!!!
칼날 같은 바람이 전면을 훑고 지나가며 초식이 마무리되었다. 비록 화려함은 없었지만, 그야말로 필살의 강공이었다.
한 번의 호흡과 함께 움켜쥔 검 끝이 다시 바닥을 향했다.
“만물의 근원은 태극(太極)에 있다. 만약 태극을 만개(滿開)시킬 수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왼발을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딘 소무는 검을 어깨 위로 잡아당겼다.
이어서 들이마시는 한 번의 짧은 호흡.
“후웁!”
동시에 그의 검이 마구 휘둘려지며 허공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방의 공간으로 수십 가닥의 빛무리가 태극 형상을 이루며 발현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소무의 기성 소리가 태공산의 분지를 울리며 진동시켰다.
“하아압!”
그 순간 날카로운 수십 가닥의 빛무리가 전면을 향해 난사되며 전방 십여 장을 초토화로 만들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주변에 널려있던 수백 그루의 소나무 잔해가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가루처럼 변해버린 나무의 조각들이 허공에 흩뿌려지며 주변을 뿌옇게 만들어갔다.
강기에 적중당한 지면의 곳곳은 움푹 꺼져 있었다.
막대한 내공이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력의 소모가 극심한 초식이었다.
무림에서도 비교할 무공을 찾기 힘들 만큼 극강한 다중살상 위력이었다.
소무는 지금 깨달음을 통해 탈혼검법을 개량하여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오래전 이론으로 생각해오던 초식들이었기에 시작이 수월했다.
“……파천검법(破天劍法).”
소무가 새로이 창안해낸 검법의 이름이었다. 총 삼 초식으로 구성하였으며 이제는 마지막 초식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식의 완성은 수련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의 심장에는 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다.
“파천검법 삼 초식. 멸천지세(滅天之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