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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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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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3)
2022.08.15.
소무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말이다.
현경(玄境)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새로운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무엇이고, 내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우주(宇宙). 소무의 의문은 우주를 그리고 있었다. 광활한 시공간 속의 티끌과도 같은 존재를 말이다.
‘내가 곧 우주라면 나의 의지대로 우주만물에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 주변으로 은은한 황금빛 후광(後光)이 발현되어 감싸고 있다는 것을.
‘우주가 지배하는 모든 공허는 곧 나의 공간이다. 나는 우주에 정복당하지 않는다. 나의 의지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고, 지배할 수도 있다.’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광채. 찬란한 휘광이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소무의 입이 나직이 달싹였다.
“그렇기에 나의 검은 하늘을 베고, 우주를 벨 수가 있다.”
검집의 상단을 왼손에 고쳐잡은 소무는 상체를 낮추며 자세를 다잡았다.
파천검법 절초 멸천지세(滅天之勢).
짧은 순간에 막대한 내공을 폭발시키듯 뿜어내는 초식으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론으로만 고안해보았을 뿐, 그동안은 펼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발생한다면 치명적인 내상으로 직결될 터. 소무는 온 신경을 집중하며 마지막 심호흡을 들이켰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의 검날이 잔상을 그리며 전면을 휩쓸어갔다.
뒤늦게 한줄기 천둥소리가 태공산의 분지를 뒤흔들었다.
콰쾅-!
눈으로는 쫓을 수 없을 만큼 가히 빛의 속도로 펼쳐진 한 수였다.
다른 초식들에 비교한다면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초식에는 쾌(快), 환(幻), 강(强), 유(柔)의 모든 기운을 내재하고 있었기에,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초식에 가까웠다.
‘성공인가?’
아직 실전에서 펼쳐보진 못했지만,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해 전신의 움직임이 좀 더 가벼웠다. 또한 좀 더 먼 곳까지 볼 수 있었으며, 더 작은 소리도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
목표는 전설상의 무공인 어검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현경의 극(極)을 이루는 것이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 우선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안색이 한결 밝아진 소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의 초식은 그조차도 운기조식을 해야 할 만큼 내력의 소모가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지났지?’
무아지경 속에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망각하고 있었기에 가늠이 안 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겨울이 오기 전에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주변 온도가 그리 차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운기조식을 시작한 소무는 반 시진이 지난 이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산하기 위해서였다.
파앙-!
높은 험산에서 날아오른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한결 가벼워진 경공술에 점차 기분이 좋아졌다. 어서 빨리 거처로 돌아가 아내와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온 소무는 가벼운 손짓으로 대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마당에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짐승이 벌떡 일어섰다.
“다롱! 잘 있었어?”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그 순간 왼쪽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방 안에서 잠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맨발로 뛰쳐나왔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한달음에 달려온 소소가 매미처럼 허리춤에 철썩 달라붙었다.
딸아이의 눈에 물기가 핑 고여 있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거늘, 무엇인가 이상했다.
게다가 키가 조금 커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반짝 빛나던 대머리가 지금은 바가지 모양처럼 자라나 있지 않은가.
“우리 딸, 뭘 먹었기에 머리카락이 이렇게 빨리 자랐어?”
대답은 우측 방에서 들려왔다.
팔짱을 낀 설화가 문틀에서 새침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버리고 도망간 줄 알았더니, 잊지는 않았나 보네. 아무리 폐관 수련이라지만 반년이나 잠적을 해?”
소무는 흠칫했다. 아무리 망아지경(忘我之境)에 들어 우주를 헤맸다고 한들,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반년이나 지났다고?”
설화는 소무의 표정을 살펴보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연기는 아닌가 보네. 밥상부터 차려줄 테니 좀 기다려.”
“고마워, 연매. 고생 많았어.”
부부 사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의 밝기를 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몹시 고팠다. 식탐이 없는 그가 이 정도의 배고픔을 느낀 것은 처음인 듯했다. 반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의 기운을 섭취하며 버텼으니.
설화가 사라지자 소무는 딸을 들어 올려 왼쪽 팔로 안아 들었다.
그동안 잘 먹었는지 묵직해져 있었다. 그리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듯했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내기(內氣)는 호수와도 같이 정련되어 있었으며, 눈빛에 흐르는 정기도 더욱 맑아져 있었다.
“우리 소소도 이제 아홉 살이로구나.”
소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반년이 찰나와도 같이 흘러갔기에 무엇을 느낄 틈도 없었다. 체감으로 느낀 시간의 흐름은 고작 며칠 되지도 않은 것 같았으니.
하지만 어찌 그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매일 보고 싶었지, 우리 딸. 뭐 하고 지냈어?”
소소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살문의 무공을 익히고, 친구들과 진법수련을 한 부분까지 말이다. 그 와중에 설화원도 다니고, 퉁소와 사자후를 수련한 부분까지 쉬지 않고 얘기했다.
보조개를 피어 올린 얼굴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서 대화하니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설화가 식사준비를 마쳤다.
“자, 둘 다 앉아 봐.”
날이 갈수록 설화의 요리 솜씨는 일취월장이었다.
가장 먼저 당근을 눈꽃 모양으로 깎아 고명을 한 두부조림이 보였다.
정갈하게 차려진 나물들이 보였으며, 그중에서 가운데 차려진 주요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천파육? 이걸 어떻게 만들었어?”
천파육(千破肉). 한 자 길이의 돼지고기를 천 조각으로 썬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황제의 수라상을 준비하는 궁중요리사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지닌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어려운 음식이었다.
소무가 그것을 알아보자 설화의 얼굴에 미세한 미소가 서렸다. 그녀는 다시 표정을 관리하며 되물었다.
“이 정도는 다 하는 거 아니야?”
고기를 써는 기술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마교의 상승무공인 마화비전을 절정으로 익힌 섬세한 손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딸아이가 젓가락으로 천파육을 한 움큼 집어서 내밀었다.
“아버지, 아~.”
얼떨결에 받아먹은 소무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종이만큼 얇게 썰린 돼지고기였기에 그야말로 최고의 식감이었다.
“입에서 녹는구나. 소소도 많이 먹어.”
소무는 딸아이와 마주 앉아 오손도손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화가 마루 맡에 걸터앉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그중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었다.
“일광하고 초희 처제가?”
“요즘 둘이 아주 좋아. 부쩍 가까워졌더라.”
소무는 웃음을 참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초희의 집터를 바라보았다.
옆집 마당이 훤히 보였다. 도무지 몰래 만날 수가 없는 집 구조였다.
그때 딸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거들었다.
“맞아요. 요즘 삼촌이 자주 놀러 와요.”
소소도 알고 있을 정도면 많은 발전이 있는 모양이었다.
“영영이는?”
“세상 다 산 것 같던 애가, 이제는 많이 밝아졌어. 초희가 가족처럼 데리고 살려는 모양이야.”
“좋은 소식이네. 성격도 비슷하고 둘 다 외로웠으니 잘 맞을 줄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던 설화는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화두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궁성에는 안 들렀지? 그럼 소식 못 들었겠네.”
“무슨 소식?”
“밥부터 다 먹고.”
육 개월 동안 어찌 밝은 소식만 있었겠는가. 목소리로 보아 별로 좋지 않은 내용인 듯했다.
잠시 후 소무가 식사를 마치자 설화가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소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함곡관이 공격당하고 있다더라.”
태연하게 말하는 설화의 한마디에 소무의 몸이 얼어붙었다.
함곡관은 관중의 생명선으로, 사활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요충지였다. 중원 진출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관문이었다.
“뭐라고? 그걸 왜 이렇게…… 느긋하게 얘기해?”
“이미 보름이 넘었어. 반년 만에 돌아왔는데, 밥 한 끼 정도는 괜찮잖아?”
그래도 이렇게나마 늦지 않게 정보를 건네준 게 다행이었다. 한중에 있을 때만 해도 전쟁에는 관심이 없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연매 말도 맞아. 배가 든든해야 잘 싸우는 법이지. 어쨌거나 관문에서 계속 버티고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더라. 랑아대는 열흘 전에 출발했어. 이레 전에는 민공이 직접 추가 병력을 이끌고 지원을 떠났어.”
랑아대는 부대장인 일광이 이끌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민공이 지원을 갔다면 살왕도 함께 있을 터. 설화가 여유를 부린 이유가 명확해졌다.
“민공이 직접 움직였다고? 근데 왜 날 부르러 오지 않았어?”
“절대 부르지 말라던데? 폐관 수련 도중에 흐름이 깨지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나. 음침한 녀석이 옆에서 조언해준 모양이야.”
음침한 녀석은 살왕 백리현을 지칭한 말이리라. 확실히 중간에 수련이 중단되었으면, 깨달음 따위는 얻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근데 연매가 이걸 어떻게 다 알아?”
대장군의 부인이라고 한들 엄연히 민간인의 신분이었다.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민공이 출진할 때 우리 집에 들렀어. 도와줄까 물었더니, 이곳에 남아달라더라.”
“연매가 먼저 도와준다고 말했었다고?”
“우리 낭군님을 대신해서 내가 대신 전쟁에 나가야 하나 싶었지 뭐.”
관문이 뚫리면 보금자리가 위협받게 된다는 것쯤은 설화도 알고 있었다.
웃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모처럼 건넨 설화의 농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연매가 도와준다고 하면 두 손 들고 환영했어야 해. 그런데도 이곳에 남아달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함곡관으로 고수들이 죄다 몰려갔잖아. 이제 여기 장안은 빈집 아니야?”
소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놈들이 무리해서 함곡관을 공격한 것부터가 말이 되지를 않아. 시기적으로도 내가 자리를 비운 절묘한 틈을 노렸고.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곳에 첩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확실히. 민공도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아직도 군영에는 충분한 병력이 남아있었으며, 거리는 군순포의 포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문제는 첩자들의 수준이 예측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수도가 아니던가. 궁성에서 공작 활동이라도 벌인다면 치명적인 패해를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출진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설화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장안에서 허튼 짓거리 하는 녀석이 있으면, 다롱이한테 먹이로 줘버릴 테니까.”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산군이 입맛을 다시며 그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소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녀석, 짐승 맞겠지?”
“하는 짓을 보면 나도 가끔 사람인지 긴가민가할 때가 있어. 어쨌거나 갑주 꺼내 올 테니 좀 씻고 있어. 오랜만에 부하들 보는데 그런 몰골로 갈 수는 없잖아?”
육 개월 만에 하산을 했기에 거지 몰골이 따로 없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밤에는 공성전이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은 소강상태일 터. 동이 트기 전까지 도착하면 되었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나무욕조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 설화가 저녁 준비를 하며 미리 받아놓은 모양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한참을 씻고 있을 때였다.
“후. 개운하군.”
소무의 얼굴에 희열이 떠오를 무렵 부엌문이 다시 열렸다.
끼이익-!
설화였다. 가벼운 차림의 그녀가 요염한 걸음걸이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자태에 소무는 입이 벌어진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우리 낭군님 등 좀 밀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