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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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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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시간이 유수로구나 (4)
2022.08.16.
높고 거친 협곡의 틈새에 자리한 함곡관은 천하제일험관(天下第一險關)이란 악명이 따라다닌다.
그만큼 지형이 험하고 공략이 어려운 난공불락의 관문이었지만, 지금은 위태롭기가 그지없었다.
관문의 적루에서 전황을 지켜보는 장양은 이유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후…….”
관문의 방어병력은 총 팔천으로, 장안의 병력 중 삼 할이 이곳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적군은 그 열 배를 훨씬 상회하는 규모였다.
그때 양강 장군이 다가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민공, 적들이 또 몰려오고 있습니다.”
장양은 마음이 답답하다는 듯 힘겹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지금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군 중 대부분이 강제로 징집된 양민들이었다. 그들에겐 갑옷은 물론 무기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짚단을 엮어 만든 방패 하나가 전부였다.
훈련된 정규군은 후방에 있고, 애꿎은 양민들만 화살받이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장양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압도적인 병력에도 치졸한 방법을 쓰는 휘나라에 모두가 치를 떨어댔다.
“어찌……, 어찌 저들이 이렇게 죽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미 관문 아래에 널려있는 그들의 시신은 셀 수조차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죄 없는 백성들이 아니었던가. 관문 위에서 화살을 날려대는 궁수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공세가 느슨해지면 곧바로 정규군이 따라붙고 있었기에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또다시 적호병들이 관문 위로 올라온다면 막아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적호(赤虎)라는 문자가 새겨진 붉은 갑주를 입은 적호병단. 그들이 가장 큰 골칫덩이였다.
무공 수준이 굉장했으며,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이었기에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며칠 전 그들 중 일부가 관문 위로 올라왔을 때는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었다. 랑아대의 활약으로 겨우 막아내긴 했으나, 또다시 그런 요행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터.
장양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짰다.
“사격……하라…….”
양강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뒤돌아서서 명령을 내렸다.
“발사!!!”
외마디 명령과 함께 궁수들이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파팟-! 파파파팟-!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내리꽂는 화살비에 돌진하던 병사들이 갈대처럼 쓰러져 나갔다.
주춤할 만도 하지만 징집병들의 진군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있기에 그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관문 아래까지 접근한 병사들이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무기도 없었기에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그들을 방패 삼아 섞여 있는 정규군들이 문제였다. 화살로 견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열한 공방이 반 시진 정도 흐른 시점에서 진립 장군이 다가와 기립했다.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민공. 사흘간 한숨도 못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잠을 안 잔 것이 아니라 못 자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피폐해지고 있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만 감으면 죄 없이 죽어간 양민들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시게.”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진립은 한숨을 내쉬고는 본론을 꺼내었다.
“궁수들의 화살이 곧 바닥날 것입니다……. 오늘은 버티겠지만, 내일부터는 백병전으로 맞서야 하니 걱정입니다.”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휘나라의 본진에서 끊임없이 징집병들을 내보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사전에 충분한 화살을 비축해두었음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비록 적들의 수가 많지만, 우리의 지세가 유리하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진립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시질 않았다. 내일부터는 휘나라의 장수들이 정예들을 이끌고 직접 참전할 것이 분명했다.
절제도위 일광이 이끄는 랑아대가 있었지만, 머릿수의 차이는 어찌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대장군을 불러오심이 어떻겠습니까? 태공산이라면 이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길, 자신이 성장하지 못한다면 다가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어찌 반년의 폐관 수련을 물거품으로 돌린단 말인가.”
“하지만 이대로라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진립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단신으로 일개 군단과 맞먹는 전투력을 지닌 존재였으니. 그가 온다는 말만 들려도 병사들의 사기가 승천할 터였다.
그러나 장양은 일거에 고개를 내저었다.
“설령 관문이 함락되는 한이 있더라도 믿고 기다려야 하네. 함곡관은 다시 탈환하면 그뿐이지만, 우리에게 반년이라는 시간은 다시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네.”
“하오면…….”
장양은 화두를 돌려 되물었다.
“강노용 화살은 얼마나 남아있는가.”
“아직 강노부대는 투입하지 않았기에 여유가 있습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랑아대와 강노부대를 관문 위에 배치하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양은 다시 묵묵히 전장을 응시했다.
전투가 벌어진 지는 수일이 지났지만, 아직은 방어에 무리가 없었다. 궁수들의 화살이 떨어진 시점인 내일부터가 진검승부였다.
역시나 날이 어둑해지자 적들이 물러갔다. 관문 아래에 수천 명의 시신만을 남겨놓은 채로 말이다.
아군 병사들의 함성을 뒤로한 채 진립이 다가와 말했다.
“민공,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장양은 도저히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죽어간 양민들의 시체들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관문의 내측에 펼쳐진 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아직 생각이 없으니 자네 먼저 들게.”
장양은 관문 아래로 내려가 지휘부로 향했다. 식사 시간이었기에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탁상에 앉은 그는 오늘의 전투결과를 직접 점검하며, 병력 배치를 살폈다.
그러길 잠시 후. 돌연 낯익은 인물이 누군가의 멱을 부여잡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험악한 인상과 우락부락하고 다부진 체형을 지닌 장수. 일광이었다.
“명하신 대로 한 놈 잡아 왔습니다. 백인장입니다.”
장양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하급 장교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정보가 있을 터.
“수고했네. 소무 장군을 대신하여 자네가 고생이 많구만.”
“대장이 없으니, 부대장이 해야죠. 뭐든지 맡겨만 주십시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일광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휘나라의 장교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장양 앞에 패대기쳤다.
콰앙-!
“크윽!”
일광한테 어찌나 맞았는지 그의 얼굴이 퉁퉁 불어터져 있었다. 그런데도 눈빛만큼은 매섭게 살아있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일광이 뒤에서 머리채를 움켜쥐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양이 일광을 향해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잠시 나가 있게.”
“예, 문 앞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그리하지.”
장양은 깍지를 끼고 무릎 꿇은 백인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장양이라고 하네. 자네의 처분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지.”
장양이 정체를 밝히자 백인장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은밀히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를 호위해주고 있는 자는 만만한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시게.”
백인장은 일순간 알 수 없는 한기(寒氣)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다가온 것인지 눈치챌 수조차 없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백인장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장양은 흡족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쟁 중에 적국과의 협상은 늘 있는 일이지. 나는 자네에게 거래를 제안하고자 하네.”
“나는 일개 하급장교일 뿐이오.”
“하지만 우리에게 쓸 만한 정보를 몇 가지 줄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리해준다면,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자네의 요구를 들어주겠네.”
“내가 당신을 어찌 믿겠소?”
장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막사 밖을 지키는 근위병들을 모두 안으로 불러들였다.
잠시 후 막사 안에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둘러싸 자리를 지켰다.
“이렇게 증인들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나 일삼는 지도자로 소문이 나겠지.”
잠시 고민하던 백인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를 풀어줄 수도 있소?”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이곳의 전투가 끝난 이후일세.”
정보가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어야 했으며, 바로 풀어주면 밀고한 정보가 다시 휘나라에 전달되어 작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백인장도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다.
“……바로 풀어준다고 했으면 믿지 않았을 것이오. 제안을 수락하겠소.”
“잘 생각했네. 그럼 어디 말씀해보시게.”
잠시 머뭇거리던 백인장은 아는 것을 하나씩 실토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 군을 이끄는 사령관은 마휼 장군이오.”
이미 그에 대해 수집된 정보가 많았다. 마휼은 지략이 뛰어난 휘나라의 전술가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무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완안후이는 이곳에 없다는 얘기로군.”
“대장군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소. 확실한 것은, 이곳에는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이오.”
“알겠네. 다른 정보가 있으면 좀 더 얘기해주게. 그리해준다면 자네에게 따듯한 식사를 제공해주지.”
이미 한 번 열린 입이었다.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며칠 전 적호병단이 어딘가로 이동했소.”
그렇지 않아도 장양도 의문이었던 부분이었다. 골칫덩이였던 붉은 병사들이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진영의 핵심 정예부대가 먼저 회군이라도 했다는 말일까? 도무지 말이 되지를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자세한 내막은 나도 알 수가 없소.”
적호병단이 사라졌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찜찜함이 가득했지만,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고민에 빠져있던 장양의 시선에 은연중 전략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그는 검지로 지형을 짚어가며 천천히 반월을 그렸다.
‘관중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 함곡관을 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황하를 두 번이나 횡단하고,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하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경공을 극성으로 익힌 소수 정예라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후미에서 적호병단이 공격해 온다면 버텨낼 재간이 없을 터. 비록 확률은 낮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열세인 상황에서 느낌만으로 병력을 분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가 지끈 아파진 장양은 병사들을 물리며 말했다.
“저자는 비록 적이지만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었으니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가둬두되, 따듯한 식사를 제공하고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시게.”
“예, 민공. 알겠습니다.”
근위병들이 좌우에서 백인장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다급히 말했다.
“아직 한 가지 정보가 더 남아있소.”
장양이 오른손을 올려 병사들에게 멈추라 신호를 보냈다.
“듣고는 싶지만, 내가 더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르겠군. 무엇을 원하는가?”
“단지 신뢰를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일 뿐이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장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네.”
잠시 머뭇거리던 백인장이 속삭이듯 말했다.
“며칠 전부터 사령관의 지시로 병사들이 흑연목(黑煙木)을 모으고 있소.”
“흑연목이라고……?”
험산에 자라나는 나무 중 하나였다. 불이 붙으면 짙은 연기를 내뿜는 게 특징이며, 살수들의 연막탄에도 사용되는 재료였다.
이것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단 말인가. 함곡관은 어지간한 성벽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관문 위를 향해 화공을 사용하는 것은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중 한 가지 가능성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연기라면……. 혹시?’
장양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