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 (1) (198/250)


198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 (1)
2022.08.17.


장양은 재빨리 막사 밖으로 나가보았다.

‘……이럴 수가.’

언제부턴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서풍이 불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그의 주변으로 장수들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민공?”

“혹여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고개를 한 번 내저은 장양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적들이 흑연목을 이용하여 공격할 생각인 듯하네.”

영문을 모르는 장수들이 어리둥절했다.

“흑연목으로 무엇을 한다는 말입니까?”

“화공을 아래에서 위로 사용할 수는 없을 텐데요.”

그때 산와족 출신의 외팔이 장수 백약이 다가왔다. 그는 군부 내에서 야생에 대한 지식이 가장 해박한 인물이기도 했다.

“우리 산와족은 흑연목을 태워 연막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만약 아래에서 이것을 태우면, 희뿌연 연기가 서풍을 타고 관문 위로 올라와 병사들의 시야를 차단할 것입니다.”

장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약 부장의 말이 맞네. 그리되면 관문 위로 올라오려는 적들을 떨쳐내기가 어려워지겠지.”

“…….”

최악의 상황이었다. 모두가 침묵에 잠긴 채 대응방안을 고심했으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군사라도 있었으면 무엇인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터였지만, 진유소는 장안성에 남아 내정을 살피고 있었다.

“일단 지휘 막사로 들어가서 같이 의논해보세.”

고민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대응방안을 생각해낼 수 있었을 테지만, 장양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흘째 한숨도 못 잔 상황이었다.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 그의 정신은 온전하지 못했다.

한 시진이 지나도록 회의는 계속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장양은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도록 장수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길 일다경이 지났을 때였다.

“드, 드디어 돌아오셨습니다.”

장교 한 명이 횡설수설하며 지휘 막사로 난입해 들어왔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장양이 힘겹게 눈을 뜨며 물었다.

“누가 왔단 말인가?”

“소무 대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휘 막사에 앉아있던 장수들이 벌떡 일어섰다. 죽어가던 장양의 눈빛이 금세 생기를 머금었다.

“그게 정말인가? 어서 들라 하게.”

장양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지휘 막사로 장수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처럼 짙은 흑갑(黑鉀)과 등 뒤로 붉은 피풍의를 두른 장수. 소나라의 제일 맹장으로 이름난 소무였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의 걸음걸이는 천하를 압도할 기세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장양 앞에 우뚝 서서 왼쪽 가슴 위에 주먹을 붙이고 상체를 숙여 보였다.

“대장군 소무, 폐관수련을 마치고 지금 복귀하였습니다.”

장양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때마침 잘 왔네. 가장 적절한 순간에 천군만마를 얻었어.”

소무는 장양의 상세를 살펴 보였다. 기혈이 불안정했으며, 맥박의 진동이 무척이나 약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을 정도였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허허……. 그래 보이는가…….”

“이곳은 제게 맡기시고 이제 좀 쉬시지요.”

장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군이 왔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곳에서의 내 역할은 여기까지일세.”

한 걸음을 내딛던 장양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긴장이 풀리자 그간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것이다.

소무가 옆에서 그를 잡아주며 말했다.

“기대셔도 괜찮습니다.”

그를 야전 막사 밖까지 부축하여 이동한 소무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쪼록 부탁하겠네.”

그 순간 장양의 등 뒤에서 검은 연기가 스르륵 발현되며 살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시오.”

살왕은 장양을 부축하여 어딘가로 이동했다.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바로 장안으로 돌아갈 생각인 듯했다. 이곳의 일은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소무를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천천히 이동한다면 복귀까지는 닷새 정도가 걸릴 터였다.

그들이 마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본 소무는 다시 지휘 막사로 들어갔다.

조금 전 장양이 앉아있던 상석에 앉아 좌중에게 말했다.

“그간 모두 고생 많았소. 지금부터는 내가 지휘할 터이니, 어서들 앉으시오.”

소무는 좌중의 장수들을 한 명씩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부관인 일광과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를 슬쩍 끄덕여 보였다.

반년 동안 그가 했던 노고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잠시 후 양강이 전술지도 앞에 서서 말했다.

“우선 전황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시작하시오.”

양강의 보고는 일다경 동안 이어졌다. 현재 상황과 장양이 백인장을 심문했던 내용, 그중에서 흑연목과 관련한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얘기를 듣고 있던 소무가 탁상 위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화(火)는 화(火)로써 제압할 수도 있는 법이지. 백약 부장.”

백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립했다.

“예, 장군.”

“지금 즉시 병사들을 지휘하여 불에 잘 타는 나무와 짚단을 관문 위에 최대한으로 배치하게.”

백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동이 틀 때까지 일을 마쳐야 했다. 백약은 즉시 막사 밖으로 이동했다.

이어서 소무는 병력 배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병력의 절반 이상이 관문의 내측 아래에 배치되어 있었다. 랑아대까지도 말이다.

지켜보던 양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병사들을 오히려 관문 내측에 배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며칠 전 적호병들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오.”

“그들이 황하를 넘어 우회해 온다는 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게다가 관문으로 다가오는 적들은 우리의 열 배가 넘지 않습니까……?”

소무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투의 승패는 병사의 숫자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오.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마휼이 모르는 이상, 그들에게 승기가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적군의 군단장인 마휼은 치밀한 전술가였지만, 소무가 오늘 이곳에 합류할 것까지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확신에 찬 소무의 모습에 양강은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장군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작전 명령을 내린 소무는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작전 회의를 종료했다.

“여유가 있을 때 모두 좀 쉬어두시오. 내일 아침부터는 바빠질 테니.”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소무도 막사 밖을 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일광이 그를 보좌하듯 따라나섰다.

“대장. 폐관 수련의 성과는 좀 있었어?”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반년 사이 너도 성과가 있었던데?”

일광이 어리둥절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대장?”

“우리 초희 처제 말이야. 요즘 둘이 부쩍 가까워졌다던데?”

“……그, 그걸 어떻게 알아?”

산만 한 덩치에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무는 피식 웃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목적지는 랑아대의 야전 막사였다. 굳이 묻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막강한 기(氣)의 흐름이 소용돌이치는 막사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입구에 도착한 소무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삼삼오오 모여 투전놀이를 하거나 누워서 잡담하는 등, 대원들의 모습에선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군기가 빠졌군. 전쟁터에서 투전이라니, 곤장을 맞아야겠구나.”

대원들이 벌떡 일어서며 소무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대장님!”

“우리를 잊은 줄 알았어요.”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소소는 매일 놀러 오던데.”

예나 지금이나 랑아대는 자신이 거느린 유일한 직속 친위부대였다. 하지만 대장군이 된 이후로는 공무가 바빠서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

소무는 부하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용케도 죽은 대원은 없었지만, 몇몇은 다쳐서 신체에 붕대를 감싸고 있었다. 적호병들과 싸우면서 발생한 부상자들인 듯했다.

적호병단의 무공 수준이 랑아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인원수의 차이가 압도적인 것이 문제였다.

그때 입구 근처에서 현정과 청해가 보였다. 이 둘은 백부장의 계급으로 랑아대의 간부들이기도 했다.

“너네도 요즘 소소한테 맞고 다닌다며?”

“예전의 소소가 아니에요.”

“반년 사이 엄청 강해졌어요.”

대원들은 틈만 나면 대련하자고 찾아오는 소소 때문에 곤욕이었다.

살왕에게 살문의 무공까지 전수받은 소소의 수준은 화경의 바로 전 단계까지 성장해 있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일광의 한숨이 들려왔다.

“요즘에는 부하들인지, 친구들인지 데려와서 같이 난리야. 나도 자칫하면 당할 뻔했어.”

“네가?”

일광이 당할 뻔했다는 말은 의외였다. 살문의 진법을 수련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 정도의 위력인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장도 각오하는 게 좋아. 날 꺾으면 다음 목표는 대장이라더라.”

“후후. 녀석들, 참.”

소무는 갑주를 푸르며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대장군의 막사는 따로 있었지만, 오늘은 부하들과 함께 보내는 것을 택했다.

모처럼 부하들과 뒤섞여 화기애애한 밤을 보내었다.

몇 시진이 더 흐르고 하나둘씩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뿌우우우웅-!

날이 밝기도 전에 기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적들이 공격할 조짐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소무도 갑주를 챙겨입으며 일광에게 말했다.

“관문은 내가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대원들 데리고 후미만 경계해.”

일광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대장이 있는데 우리가 뭐하러 신경 써.”

“나를 아주 괴물로 보는군. 여하간 어제 얘기해준 대로 매복해 있다가 적호병들이 오면 포위해서 섬멸해야 해.”

“걱정하지 마. 오는 족족 모조리 목뼈를 부러트릴 테니.”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먼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이미 다른 장수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장군.”

“위로 모시겠습니다.”

소무는 몇몇 장수들과 함께 관문 위로 향했다.

어두웠던 어젯밤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기립하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이 흥분하며 웅성거렸다.

“저, 저기 소무 대장군 아니야?”

“그분께서 직접 이곳에 오셨다고?”

“와……. 그럼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 아냐?”

“당연하지. 귀검무적 몰라? 흐흐, 휘나라 놈들 이제 난리 났구나.”

병사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고 있었지만, 소무의 귀에는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는 묵묵히 관문의 중심부를 향해 터벅터벅 나아갔다.

모두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거인(巨人)이 지나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관문 위에 배치된 병력은 약 사천여 명. 그때 소무의 음성이 그들의 귓가에 종소리처럼 메아리쳤다.

- 병사들이여. 오늘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당황하지 마라. 옆에 있는 동료를 믿어라. 그리고 나를 믿어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오늘의 영광이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전설상의 전음인 광역전성(廣域傳聲)이었다. 특정 지역에 있는 다수에게 동시에 소리를 전달하는 기술로, 이것에 대해 아는 자는 없었다.

병사들은 놀란 눈으로 옆에 있는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 방금 대장군께서 나한테 귓속말을 했어.”

“너, 너도 들었어?”

대장군이 자신에게 직접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병사들은 알 수 없는 전율에 휩싸였다. 동시에 사기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휘나라의 진영에서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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