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 (3) (200/250)


200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 (3)
2022.08.19.


관문 위의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더는 연기를 뚫고 다가오는 적이 없었다.

수비병들은 안도하며 시야가 밝아지길 기다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반각이 지난 뒤. 검은 연기가 걷히며,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관문 아래의 상황이 펼쳐졌다.

시야에 비친 광경에 수비병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이놈들이 왜 떼죽음을 당했어?”

관문 아래에 무수히 많은 병사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누워있었다. 중상을 입고 뒹구는 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가 족히 일만에 이를 정도였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수비병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사다리에 떨어져 죽은 병사들도 많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였다. 대부분이 서로를 베어 넘기며 생긴 참상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딘가를 향해 검지를 내뻗으며 소리쳤다.

“저, 저기 좀 봐!”

적군의 본진이었다. 육칠만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무척 소란스러웠다.

본진의 중심 어딘가. 지휘부로 보이는 곳에서 누군가가 홀로 난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군께서 홀로 싸우고 있어!”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관문 위의 수비병들은 난리가 났다. 눈에 불을 켜고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순간순간 스쳐 보이는 검은 갑주와 붉은 피풍의. 대장군이 확실했다.

워낙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동작은 볼 수 없었지만, 그를 둘러싼 적들이 갈대처럼 쓰러지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아챌 수 있었다.

적진의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무쌍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수비병은 전율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우렁차고 뜨거운 함성이 십 리까지 뻗쳐나갔다. 수비병들은 관문 위에 설치된 북을 두들기며 대장군을 응원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일각(一刻). 고작 일각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를 포위했던 청살대가 전멸했다.

처참하게 죽어간 그들의 중심에서 소무는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또 다른 병사들이 겹겹이 둘러싸며 두꺼운 포위망을 형성해갔다.

지켜보던 백약이 북을 치는 병사에게 말했다.

“어서 대장군께 회군을 요청하라.”

소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혼자서 수만 명의 병사를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쿵-! 쿵-! 쿵-!

회군을 요청하는 북소리가 소무의 귓가를 울려댔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갈 참이었다. 이미 마휼은 어딘가로 숨어든 이후였고, 더는 적진에 머물러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소무가 퇴로를 살펴보고 있을 찰나였다.

쿠쿵-! 쿠쿵-! 쿠쿵-!

갑자기 북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적들의 기습을 알리는 신호였다.

관문 위의 수비병이 반대편으로 달려가 상황을 살펴보았다.

삼백여 명의 붉은 전사들이 접근해오고 있었다.

기필코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미 대비하고 있는 이상 그들의 기습은 부질없는 몸부림이었으니.

“설레발치지 말고 준비해!”

절제도위 일광. 그가 관문의 내측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오백 명의 방패병들이 전열을 지켰으며, 뒤로 삼천이 넘는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는 모습에 당황할 만도 했지만, 적호병들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들에겐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명령에만 따를 뿐.

“방벽(防壁)!!!”

어딘가에서 일광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리자, 선두의 병사들이 방패를 전면으로 내뻗었다.

척-! 처처처척-!!!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병사들의 동작은, 그들이 받아온 훈련의 강도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오백여 개의 방패가 밀집대형을 형성하자 수비대의 전열이 철벽으로 변모해갔다.

일반적인 기습조였다면 분명히 당황하며 주춤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적호병들은 오히려 질주를 가속했다.

선두에서 달리던 오십 명의 붉은 전사들이 날카로운 검기를 뿜어냈다.

수비대와 적호병들의 거리 삼십여 장. 그 거리는 계속해서 좁혀졌다.

“하전(下戰)!!!”

일광의 신호에 전열의 병사들이 무릎을 꿇으며, 방패를 바닥으로 찍었다.

쿵-! 쿠쿠쿠쿵-!!!

그 순간 방패병들의 뒷열에 대기하고 있던 강노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노의 위력은 화경의 호신강기를 꿰뚫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내공을 수련하는 병사가 아니라면 장전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병기였다.

미리 대기하여 조준을 마친 천여 명의 강노병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발사!!!”

쾅-!! 콰콰콰쾅-!!!

강노는 거센 굉음을 내뿜으며 거침없이 화살을 쏟아냈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되었기에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달려오던 적호병들이 다급히 화살을 쳐내었지만, 온전히 막아내기엔 너무나도 많고 빨랐다.

푹-! 푸푸푹-!!!

강노의 화살은 적호병의 갑주를 관통한 것도 모자라 후미의 병사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 적호병 중 절반이나 쓸려나갔다. 이쯤 되면 물러서거나 도망쳐야 정상이었지만, 그들에겐 두려움이란 없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십여 장까지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지휘관에게서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다.

“천궐(天獗)!!!”

강노병들이 엎드리며, 무릎 꿇은 전열의 병사들이 방패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척-! 처처척-!!

돌연 수비대의 뒤쪽에서 거센 기의 폭풍이 일어났다.

후방에서 누군가가 숨 막히는 기세를 뿜어내며, 전면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불곰같이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벼락처럼 빠른 몸놀림. 대장군 소무의 부관이자, 이곳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일광이었다.

거대한 체구가 전면의 방패를 짓밟고는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았다.

콰앙-!

단신으로 적호병들의 무리 속을 향해 뛰어드는 그의 패기는 모든 이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백여 마리의 검은 이리 떼가 함께 질주하고 하고 있었다.

콰쾅-! 콰콰쾅-!

방패를 딛고 도약하는 랑아대. 그들의 검에서 검기가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랑아대원들은 적호병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며 각자의 상대를 찾아 격돌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중심에서 성난 사자처럼 휘젓고 다니는 일광의 모습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랑아대와 적호병단의 싸움. 비슷한 인원수라면 결과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전투가 본격적으로 접어들자 나머지 병사들은 좌우로 길게 늘어서며, 거대한 원을 겹겹이 그려나갔다.

그들은 애초부터 전투에 참여할 계획이 없었다. 적호병이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때 수비병들의 측면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군.”

기척도 없이 들려온 소리에 근처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장, 장군께서 여길 어떻게…….”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관문을 넘어 이곳까지 달려온 소무였다.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이었다. 단지 칠흑 같았던 갑주가 혈갑(血鉀)으로 변해 있을 뿐이었다.

장교 한 명이 주변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비, 비켜라! 대장군께서 오셨다!”

병사들이 황급히 포위망을 풀며 대장군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수고했어.”

왼손을 뒷짐 진 소무는 검을 사선으로 내리깔고 터벅터벅 걸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여우굴을 향해 범이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뒷모습에 수비병들은 안정감을 느끼며 여유가 생겨났다.

* * *

장안의 궁성. 이곳은 갑작스러운 소란으로 난리가 났다.

“저쪽이다!”

“잡아!”

무기를 움켜쥔 순관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순라군의 대장 양소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회룡포의 도면을 탈취한 놈들이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철곤을 움켜쥔 그는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휘나라의 첩자들이었다. 작정하고 동시에 활동을 재개한 듯 군사시설을 습격해 신형 투석기의 제작도면을 탈취한 것이다.

비록 낙양에서 소무가 훔쳐온 것이지만, 절대로 돌려줘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열두 명 중에서 아홉을 잡아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머지 세 명이 보통이 아니었다.

고작 셋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죽은 관원들만 오십 명을 넘었다.

“비켜!”

앞서가는 순관을 밀쳐내면서까지 죽기 살기로 달리는 양소였다.

한 놈을 코앞에서 놓쳤다. 이마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쌍룡전을 우회하여 전각들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양소. 그의 시야에 자신보다 앞서 이곳에 온 순관이 보였다.

“어떻게 됐어?”

“놓친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양소가 쥐고 있던 철곤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콰앙-!

“이런 씨…….”

궁성 내의 치안 관리는 그의 소관이었다. 처벌보다는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했단 자괴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명성이 드높은 양가장의 막내로서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대장. 이미 군영에서 병사들이 몰려와 궁성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군순포에도 협조를 요청했으니, 성문을 빠져나가진 못할 것입니다.”

“후…….”

말처럼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격돌해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랑아대 정도가 아니라면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이놈을 찾는 거지?”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순관들의 고개가 동시에 우측으로 향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기척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냘픈 오른손. 그것이 누군가의 멱을 틀어쥐고 있었다.

허공에 매달린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모습이었다.

“부, 부인께서 어찌 이곳에…….”

대장군 소무의 아내였다. 아리따운 외모와는 달리 성질이 괴팍한 무림고수라는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는 쥐고 있던 첩자를 바닥에 휙 내던지며 말했다.

“오늘만이야.”

“예…….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연설화는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백화의 꽃잎 같은 그녀의 귓불이 살짝 쫑긋거렸다. 어디선가 기(氣)의 흐름을 감지한 것이다.

“저쪽으로 한 명. 그리고 한 놈은 저쪽이네.”

“예……?”

“고르라고. 나 혼자 둘 다 쫓을 수는 없잖아.”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조금전 내던진 철곤을 주워들며 말했다.

“저, 저희는 좌측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화는 쌍룡전의 지붕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숨 돌린 양소는 순관들을 이끌고 그녀가 알려준 방향으로 달렸다.

이제 한 놈만 잡으면 상황 종료였다. 그의 뒤로 백여 명의 순관이 죽기 살기로 뒤따랐다.

오십여 장을 전진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후다닥 달리는 것이 감지되었다. 역시나 그녀의 얘기대로였다.

“너희는 이쪽, 그리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 어서!”

순관들은 계속해서 포위망을 좁혀갔다. 양소의 얼굴에 점차 희망이 피어올랐다. 상대의 위치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필이면 그의 발걸음이 당도한 것은 설화원이었다. 도망치던 첩자는 이미 담장을 도약하고 있었다.

“저 비겁한 새끼가 기어코.”

선두에서 뒤따르던 양소도 지면을 박차고 허공에서 상황을 살폈다.

공교롭게도 설화원의 전각 앞 화원에 아이들 셋이 놀고 있었다.

“너 이리와!”

첩자는 가장 근처에 있던 아이에게 다가가 옷깃을 붙잡았다.

두상이 예쁜 바가지 머리의 꼬마였다. 아이는 추궁당하는 게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요? 저 오늘 잘못한 거 없어요.”

겉모습은 인자하게 생긴 중년인이었지만 말과 행동은 거칠기가 그지없었다.

그는 아이의 말을 무시하며 양소에게 소리쳤다.

“다가오면 이 꼬마X을 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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