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 (4)
(201/250)
201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 (4)
(201/250)
201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 (4)
2022.08.20.
양소는 황급히 멈추며 양팔을 벌렸다. 부하들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아이를 인질로 삼은 첩자의 얼굴에 여유가 떠올랐다.
“모두 무기 버려.”
고개를 끄덕인 양소는 망설임 없이 철곤을 던졌다. 그의 뒤를 따라온 순관들도 행동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툭-! 투투툭-!
오십여 자루의 무기가 주인을 잃고 바닥에 뒹굴었다.
아무리 인질을 잡고 있다지만 이렇게 순순히 말을 들을 줄이야. 게다가 몇몇은 웃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첩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순관들이 소곤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장, 이제 어떡해요?”
“뭘 어떡해? 소소 패거리잖아. 나서지 말고 뒤로 물러서.”
“그래도 애들인데…….”
“보통 애들이냐? 어설프게 끼워봐야 우린 도움도 안 돼.”
“그 정도예요?”
“지켜보면 알아. 신경 쓰지 말고 포박할 준비나 해.”
순관들은 포위망을 좁히긴커녕 뒷걸음질하며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던 첩자가 자신이 붙잡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마치 살수처럼 모든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옆에 있는 다른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너 뭐야?”
“저는 소소예요. 아저씨는 도둑이죠?”
대답은 순라대장인 양소가 대신해줬다.
“맞아, 그놈 도둑이야! 확실하다!”
소소의 얼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그렇지 않아도 궁성의 도둑을 잡지 못해 한이 맺혀있던 아이였다.
“영영아, 백상아.”
살문의 호법들이 부문주의 명령을 받았다.
보법을 밟는 두 아이의 모습이 그림자 속으로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
살문의 암보(暗步). 그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첩자는 당황했다.
한 호흡이 지난 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사라졌던 아이 둘이 자신의 좌우에서 나타나며 발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살수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비록 나뭇가지 같은 발목들이었지만, 묵직한 내력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직-! 콱-!
“큭!”
기습을 당한 그는 양쪽 무릎을 지면에 부딪혔다.
털썩-!
첩자의 두 눈에 당황스럽다는 눈빛이 가득했다. 순관원들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자신이 고작 어린애들한테 기습을 당하다니.
그는 경험이 많고 노련한 인물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그가 쥐고 있던 검이 반월을 그리며 등 뒤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이는 작은 손이 있었다.
터업-!
머리 위로 올린 소소의 작은 손바닥이 그의 손목을 막아섰다.
마치 바위를 돌멩이가 막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양쪽에서 두 명의 아이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너, 너희들 정체가 뭐야! 이거 안 놔?”
첩자는 당황하며 몸부림쳤으나 어림도 없었다. 도저히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양팔이 뒤로 젖혀진 상태로 꿈쩍하지 못했다.
그때 백상이 소리쳤다.
“지금이야, 소소야!”
앞에 있던 바가지 머리의 꼬마가 가장 큰 문제였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지막지한 괴력을 가진 아이였다.
“자, 잠깐만!”
눈앞의 아이는 이미 밤톨 같은 주먹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도둑 아저씨.”
파산권 사초식 광견안절타(狂犬顔絶打). 미친개의 얼굴을 때려 기절시킨다는 초식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주먹이 강기의 회오리를 머금었다.
그것은 곧이어 무릎 꿇고 있는 첩자의 인중을 정확히 가격했다.
쩌엉-!
종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의식을 잃었는지 비명조차 없었다. 단지 코와 입에서 피가 냇물처럼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 순간 멀찍이서 지켜보던 양소가 재빨리 다가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 잘했다, 요녀석들.”
양소의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마치 체증이 싹 내려간 기분이었다.
그가 첩자의 품속을 뒤져보니 도난당했던 회룡포의 제작도면이 나왔다.
그때 순관 둘이 다가와 포승줄을 묶으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놈 때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양소의 입이 반사적으로 열렸다.
“본부로 끌고 가. 이 새낀 내가 직접 신문한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이제 한 놈만 잡으면 됩니다.”
양소는 설화가 사라진 방향을 슬쩍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쪽은 걱정 안 해도 돼. 이미 끝났을 거야.”
대장군의 부인이 직접 쫓아갔으니 걱정이 없었다.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양소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리춤에서 소소가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장하다. 훌륭한 일을 했으니 순라군에서 포상을 주어야겠구나.”
“히히. 정말요?”
양소가 누군가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순라군의 내부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이었다.
“아직 우리 예산 충분하지? 포상금으로 은자 한 냥을 지급해줘.”
“예 대장님.”
얼떨결에 포상금을 받게 된 아이들은 신이 났다.
순관들과 작별한 아이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로 향했다.
“우리 이걸로 뭐 할까? 영영아, 사고 싶은 거 있어?”
소소가 영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없어…….”
“그럼 상이는?”
“나도 없는데. 소소 너는 무슨 계획이 있어?”
소소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생각해놓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곧이어 친구들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우리, 문주님한테 선물 사줄까?”
문파의 보물인 생유환을 마음대로 썼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비록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였지만,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보답해주고 싶었다.
의외로 백상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무복(武服)을 사드리면 어떨까? 우리 문주님은 옷이 한 벌밖에 없잖아.”
평소 의견이 별로 없는 영영도 흔쾌히 찬성했다.
“……응. 매일 검은 옷만 입고 다니셔.”
살문의 문주 백리현. 그는 언제나 짙은 흑의만 입고 다녔다. 정말 한 벌이 전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저곳이 해진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좋아, 빨리 가자.”
아이들은 단숨에 시장으로 달려갔다.
이 층 규모의 전각. 입구에는 진의당(眞衣堂)이라는 현판이 각인되어 있었다. 고급의류를 전문적으로 다루며, 주문 제작을 받는 곳이었다.
안에는 열 명의 재단사가 둘러앉아 옷을 마름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소는 이곳에 설화를 따라 몇 번 와본 경험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기척을 내자 선비의 풍채가 느껴지는 경장 차림의 점원이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나. 옆에는 친구들이니?”
“헤헤. 맞아요. 옷을 주문하러 왔어요.”
“너희들끼리? 심부름을 온 거야?”
“네~. 잠깐만요, 아저씨.”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뭐가 좋을까?”
“……문주님은 어두운색을 좋아하셔.”
“아무래도 비슷한 것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백리현은 키가 좀 크고 마른 체형이었다. 아이들은 그의 체형을 설명해주며 흑의 무복을 주문했다.
점원이 어리둥절하며 되물었다.
“몸에 딱 맞는 흑의라……. 이건 살수들이나 입는 옷인데?”
“우리 문주님은 지금 호위무사인데 매일 이것만 입어요.”
“음. 뭐 입는 사람 마음인데 안될 것도 없겠지. 여하튼 제작까지는 이틀 정도 걸리겠구나. 엽전 백이십 냥이다.”
포상금으로 받은 것은 은자 한 냥이었다. 최근 은자 시세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지만, 아직도 엽전 오백 냥 정도는 되는 가치였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남았다.
잠시 고민하던 소소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우리도 하나씩 입을까? 원래 문파는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거래.”
“그래, 좋아.”
“응…….”
도합 네 벌의 옷을 주문하고 나오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틀을 기다린 뒤에 다시 찾으러 왔다.
“부드러워. 빨리 입어보고 싶어.”
자신의 옷을 받아든 영영은 마음에 드는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고급 원단이라 부들부들했으며, 멋들어진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깐 기다려, 영영아.”
“응? 소소야, 왜?”
“우리 엄마한테 가서 예쁘게 수를 넣어달라고 하자~”
거무튀튀한 흑의보다는 알록달록한 옷을 좋아할 아이들이었다.
연설화는 지금 주화산의 암자에 있을 시간이었다.
옷을 챙긴 아이들은 경공까지 펼치며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근처까지 다가가자 심금을 울리는 칠현금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십여 장 부근까지 당도했을 때 음악이 멈추었다.
그녀는 기척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방 안에서 음성이 먼저 들려왔다.
“어서들 오거라. 밥은?”
“설화원에서 먹고 왔어요.”
잠시 후 문이 저절로 열리며, 무릎 위에 칠현금을 올려둔 설화가 보였다.
영영과 백상이 고개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이 시간엔 다들 무슨 일로 왔어?”
소소가 옷 네 벌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옷 샀어요, 엄마. 이 옷에 자수를 놓아줄 수 있어요?”
어려울 것도 없었다. 칠현금을 구석에 내려둔 설화는 옷을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살수들이나 입는 흑의였다. 게다가 한 벌은 어른용이지 않은가. 이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그림을 넣어줄까?”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소소는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토, 토끼요…….”
소소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설화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 벌은 너희들 대장한테 줄 거 아니야?”
“맞아요.”
설화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고민했다.
비록 멸문지화를 당한 살문의 문주라지만, 무림에서는 그를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런 살왕이 토끼가 그려진 옷을 입고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음.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때? 그 아저씨는 토끼 그림을 넣으면 안 입을 텐데.”
“아니에요.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토끼로 해주세요”
영영과 백상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설화는 마지못해 바느질 도구를 꺼냈다.
“너희들의 뜻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겠구나. 금방 해줄 테니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그녀는 양손으로 바늘을 여덟 개씩 움켜쥐고 능숙하게 바느질을 해나갔다.
중원을 통틀어 섬세함이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었다.
아이들은 눈빛을 빛내며 자수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등 뒤에 새겨지는 토끼 그림은 옷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입체적이었다.
설화는 나름대로 살왕을 배려해서 어두운 색감으로 맞춰서 자수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한 식경이 흐른 뒤.
“다 되었구나.”
“히히.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옷이 마음에 든다는 듯 양손으로 끌어안고 좋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화의 얼굴에 아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천하의 살문이 이제는 흑토끼파가 되었구나. 그 음침한 녀석이 당황하는 모습을 직접 봐야 하는데.’
목적을 완수한 아이들은 설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장안의 궁성으로 향했다.
그는 장양과 함께 출진한 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본부에서 무공을 연마하며 기다릴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