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갈 데까지 가보자 (1)
(202/250)
202화 갈 데까지 가보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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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갈 데까지 가보자 (1)
2022.08.21.
살문의 본부.
궁성의 어딘가에 자리한 어두운 창고에 아이 셋이 모여있었다.
살왕에게 전수받은 암영신공(暗影神功)을 익힌 이상, 암흑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둠과 동화된 채 살문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잘 부탁해, 영영아.”
“응…….”
백상과 영영이 서로를 마주한 채 포권했다.
가운데에서 팔짱을 낀 소소가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시작!”
동시에 둘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소소의 동그란 눈동자는 계속 요리조리 움직였다.
어느 순간 허공에서 두 가닥의 빛이 동시에 발현되며 격돌했다.
카앙-!
굉음과 함께 뒤엉켰던 빛무리가 다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한참이 지나도 정적만이 감돌았다.
일반적인 대련과는 확실히 달랐다. 흡사 살수들끼리의 대결과도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살문의 초식은 하나하나가 일격필살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내기(內氣)를 담지 않고, 날이 없는 검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대놓고 싸울 수도 없었다. 살문의 무공은 어둠 속에서 기회를 노리는 게 기본이었으니.
아무런 미동조차 없이 일각이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소의 지루함은 더해져만 갔다.
“휴. 심심해.”
백상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무공을 배워왔다. 소무에게 근골이 뛰어나다는 칭찬까지 받은 아이였다.
반면 아미파 출신의 영영은 백상보다 수준은 낮았지만, 생유환을 복용하였기에 압도적인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승부는 쉽게 결판나지 않을 것 같았다. 둘은 어둠 속에서 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기만을 계속했다.
급기야 인내심이 바닥난 소소가 둘의 사이로 들어갔다.
“나도 같이할래.”
이대 일의 싸움. 언제나 전개는 이렇게 흘러갔다.
백상과 영영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였는지 바로 공격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나타난 두 줄기의 빛살이 시차를 두고 화살처럼 다가왔다.
분광추영참(紛光追影斬). 살문의 대표적인 기술 중 하나였다.
소소는 당황하지 않고 상체를 뒤로 슬쩍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가슴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검 한 자루가 느릿하게 보였다.
이어서 허리를 비틀자 옆구리로 또 하나의 검날이 스치고 지나쳤다.
타앗-!
소소를 가운데 두고 영영과 백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피했어? 대단해, 소소야…….”
“그래도 오늘은 쉽지 않을걸?”
좌우에서 두 자루의 검 끝이 겨눠지고 있었지만, 소소는 방긋 웃고 있었다.
“역시 재밌어! 빨리 시작하자, 얘들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상과 영영이 암보를 밟았다.
곧이어 두 개의 그림자가 소소의 전신을 벼락처럼 휘감았다.
날이 없는 세 자루의 검이 부딪치며 굉음이 요동쳤다.
카캉-! 카카카캉-!
이대일의 상황에서도 소소는 여유가 넘쳤다.
“더 빨리~”
셋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그 속도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세 개의 빛이 번뜩였다. 그 모습이 마치 태양에서 피어나는 꽃들처럼 아름다웠다.
이화탈명격(利花奪命擊). 상대의 눈을 현혹한 후 목숨을 빼앗는 상급 기술이었다.
카앙-!
셋의 신형이 교차하며 거리를 벌렸다.
서로가 품(品)자 형태로 마주하고 다음 합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셋 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아이들의 고개가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살왕 백리현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바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언제 왔는지조차 몰랐다.
아이들은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문주님!”
“보고 싶었어요!”
“잘 다녀오셨어요?”
백리현은 어색한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외로운 살수의 길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일평생 누가 이렇게 자신을 반겨주었단 말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꼬마들에게 둘러싸인 채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옆구리가 간지러워진 백리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멍 뚫린 자신의 흑의에 소소가 손가락을 넣어서 휘젓고 있었다.
“뭐, 뭐 하는 짓이냐.”
“구멍! 우리 아버지 친구, 허규 아저씨도 이렇게 입고 다녀요.”
개방의 총타주였다. 장양을 호위하면서 몇 번 봤던 인물이었다.
살문의 문주가 개방의 일원에게 비교를 당하다니.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찌 그런 거렁뱅이와 같은 급이냐.”
“옷이 똑같잖아요~”
“새, 새로 한 벌 사려던 참이었다.”
그때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소소가 웃으며 말했다.
“사지 않아도 돼요. 히히.”
소소가 신호를 보내자, 백상이 근처에 있는 상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왔다.
“우리가 샀어요.”
얼떨결에 흑의를 건네받은 백리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무엇이냐.”
“문주님 선물!”
한눈에 보아도 비싼 원단으로 만들어진 무복이었다.
그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듯 흑의를 움켜쥔 채 미동조차 없었다.
백상과 영영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어서 입어보세요.”
“문주님, 빨리요…….”
흑의를 움켜쥔 손아귀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 처음으로 받아 본 선물이었다. 그것도 뒤늦은 나이에서야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것을 발견한 소소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문주님, 울어요?”
“장난치지 마라. 나는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거짓말. 방금 분명히 봤어요.”
“네가 잘못 본 것이다.”
백리현은 살며시 고개를 뒤쪽으로 돌려버렸다.
“앞으로 그거 입고 다닐 거죠?”
“뭐……. 샀다니까 어쩔 수 없이 입어야지 어쩌겠느냐.”
말과는 달리 그의 음성에서는 감동이 묻어나 있었다.
“우리도 샀거든요.”
“어서 입어보자 우리도.”
“응, 알았어!”
아이들은 구석으로 달려가 주섬주섬 각자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문파의 단체복이라도 맞춘 거란 말인가? 백리현은 어리둥절하며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며 더듬거렸다.
“그, 그게 무엇이냐?”
영영이 검은 하의를 추켜 입으며 해맑게 웃었다.
“토끼예요. 예쁘죠?”
비록 어둠 속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너무나도 선명해 보였다. 아이들의 등 뒤에 그려진 토끼들이 말이다.
황당해진 백리현은 재빨리 들고 있던 흑의를 뒤집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말했다.
“이, 이걸 내가 어떻게 입느냐…….”
어느새 옷을 다 입은 소소가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살문의 말 한마디는 만금보다 무겁다!”
자신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말이었다.
그리고 백리현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절대 번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후…….”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수의 색감이 어두워 암흑 속에서는 잘 안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 감격에 복받쳐 있던 그의 얼굴은 조금씩 울상으로 변해갔다.
* * *
“적들이 물러간다!”
함곡관의 수비병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마휼의 군단은 병력의 삼 할가량을 잃고 나서야 회군을 결정했다. 대부분이 화살받이로 세운 양민들이었지만, 정규군도 일만 이상이 죽었다.
무엇보다 삼백 명의 적호병과 마휼의 친위대인 청살대가 전멸한 것이 결정타였다.
관문 중앙의 적루 위. 소나라의 깃발이 펄럭이는 그곳에 대장군 소무가 홀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일광이 양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대장, 저놈들 그냥 보내줄 거야? 지금 쫓아가서 대가리를 다 부숴놓자고.”
소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휼은 만만한 자가 아니야. 우리가 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오히려 좋아할걸?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
한눈에 보아도 회군하는 진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강노병들을 중심으로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가.
자칫하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일. 굳이 적은 병력으로 기습하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일광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개 같은 녀석들,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운이 좋은 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상황은 정리된 거 같군.”
“바로 돌아갈 거야?”
“응. 더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어.”
어느새 표정이 밝아진 일광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데려가.”
그는 덩치에 맞지 않게 애타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소무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우리 초희 처제가 보고 싶나 보군.”
“누, 누가? 내가?”
순식간에 붉어지는 일광의 얼굴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무는 피식 웃고 나서는 좌측을 바라보았다.
“유 부사(府事)!”
함곡관의 수비대장 유광이었다. 지목당한 그는 잽싸게 다가와 소무 앞에 기립했다.
“예, 장군!”
“그간 관문의 관리를 잘했더군. 방어태세가 잘 갖춰진 덕분에 피해 없이 막았어.”
유광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군정장관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눈앞의 인물은 그의 우상이기도 했다.
“무슨 임무든 맡겨만 주십시오. 관문의 수비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적들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승리 기념으로 오늘 밤은 수비병들이 실컷 먹고 쉴 수 있게 해줘. 예산은 추밀원에서 지원해주지.”
“고맙습니다, 장군. 먼저 회군하시는 겁니까?”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비대장의 어깨를 두들겼다.
“가봐야겠지. 그리고 오늘만큼은 몰래 한 잔씩 해도 돼. 민공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이야.”
유광의 입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부하들의 입단속을 시키라는 얘기였다. 대장군이 허락한 이상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군율을 엄격하게 따지는 장양이 알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예.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장군.”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일광과 함께 떠날 채비를 했다.
장안에서 지원 온 다른 장수와 병사들은 이곳에 며칠 더 머무르다 회군하도록 지시했다.
“살펴 가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장군!”
떠나는 소무를 위해 장수와 병사들이 관문 위에서 인사를 건넸다.
그는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보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어서 가자고, 대장.”
“음. 출발하지.”
소무와 일광은 나란히 경공을 펼치며 장안으로 달렸다.
말을 타면 닷새가 걸리는 거리였지만, 이들이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점심에 출발하여 저녁이 오기 전에 장안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광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소무는 바로 추밀원으로 향했다.
반년 동안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바로 함곡관으로 달려갔던 그였었다. 너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할 일이 태산이었다.
추밀원의 전각은 궁성의 중심부에 있다.
입구를 지키는 소속 관원이 그를 발견하고는 반사적으로 기립했다.
“충!”
목소리에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아마 자네 이름이 진삼이었지? 복장을 보니 그사이 품계가 한 단계 올랐군.”
둘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에 비교될 정도였다. 소무가 자신을 기억해주자 진삼이란 관원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제, 제 이름을 어떻게…….”
“내가 기억력은 좋은 편이지. 어쨌거나 축하해.”
소무는 그를 뒤로한 채 바로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탁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를 보니 머리가 지끈 아팠다.
대부분의 공무는 부하 관원들에게 위임했지만, 자신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급한 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축해둔 모양이었다.
“후. 역시 이런 행정 일은 나하고는 맞지 않아.”
한 시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서류를 뒤적거렸으나, 일 할도 처리하지 못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꼼짝없이 서류 더미에 파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그의 집무실로 관원 한 명이 찾아와 보고했다.
“장군,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니?”
“군사께서 오셨습니다.”
군사 진유소.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로 임관하여, 나라의 여러 정책과 행정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장양이 부재중일 때는 나라의 내정을 위임받아 처리할 만큼 유능한 인재였다.
“어서 안으로 모시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고위관료인 그녀가 직접 추밀원에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소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를 마중했다.
“진유소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집무실의 구석에 마련된 조그만 탁상에 둘이 마주 앉았다.
관원이 차를 가지러 나가는 사이, 그녀가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실…… 장군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자신에게 부탁한다는 말에 소무의 표정이 오히려 밝아졌다.
그는 은근슬쩍 집무용 탁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를 흘겨보며 말했다.
“잘 오셨군요. 관료들끼리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