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갈 데까지 가보자 (3)
(204/250)
204화 갈 데까지 가보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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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화 갈 데까지 가보자 (3)
2022.08.23.
목적지는 사천의 성도였다.
한중을 거쳐 장강의 상류인 한수를 넘고 사천의 중심부까지 이동해야 한다.
장안에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것은 일반인들의 기준이었다.
느긋하게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들 셋은 경공과 휴식을 반복하며 이동했다.
하지만 어지간한 일류고수도 반 시진 이상 경공을 펼치면 몸에 무리가 오기 마련이다.
“후. 먼저 가십시오, 장군. 성도에서 뵙겠습니다.”
소무가 나란히 달리는 설풍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으니까.”
설풍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전면을 바라보았다.
소소 혼자 신나게 앞장서서 달리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아저씨, 힘내요! 앞에 배가 있어요!”
설풍은 한숨을 내쉬며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곧이어 그들은 한중군에 소속된 나루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이십여 척의 함선이 보였다. 이들이 찾는 것은 수송선이었다.
“저쪽에 한 척이 있습니다, 장군.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설풍은 호흡을 고르며 정박 중인 수송선을 향해 다가갔다. 민간에서도 유람용으로 사용되는 너벅선으로, 공간이 널찍한 장점이 있는 선박이었다.
그는 수군 장교와 몇 마디를 나눈 이후 외쳤다.
“바로 출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선박을 향해 다가갔다.
설풍에게 언질을 받은 수군 장교와 병사들은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군!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 위를 향해 걸어갔다.
“그럼 신세 좀 지겠네.”
긴장한 병사들의 눈빛에 경외가 가득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다들 평소대로 해.”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배가 출발하자 소무와 설풍은 한적한 선미로 이동했다.
소소는 어디로 갔는지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신이 나서 갑판과 선실을 돌아다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천은 자네의 고향이지 않은가. 고향에 방문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지?”
사천의 성도는 설풍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상하게도 목적지와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경직되어갔다. 그것을 놓칠 소무가 아니었다.
“어차피 고향에는 반겨줄 가족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정이 붙은 도시도 아니었고요.”
“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사천의 관직을 포기하고 섬서로 온 이유가 궁금하군.”
“아시다시피 첫 번째는 그 당시 장양 절도사의 인덕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는 설풍의 눈빛이 회한에 잠겼다.
“제 상관이었던 원규 절도사에게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소무가 아는 설풍은 올곧지만, 직설적이고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가 두 손을 들게 할 만한 사건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얘기해줄 수 있겠나?”
“못 할 것도 없지요. 저는 그가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가정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어찌 지방을 다스리겠습니까? 그런 인물이 지금은 백성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가정이라…….”
어떤 연유인지 상상만으로 유추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어차피 직접 가서 보면 알게 될 터. 급할 것은 없었다.
소무도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잠시 후.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강물을 떠다니는 낯선 기운.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바가지 머리의 여자아이가 내의차림으로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 빨리 들어와요. 재밌어~”
오랜만에 물을 보았으니 놀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 배를 따라 헤엄칠 생각을 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네 엄마가 보면 기절하겠구나.”
“히히히.”
그 모습에 어두운 표정으로 있던 설풍이 폭소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하하. 즐길 줄 아는 아이로군요.”
“놓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한수강을 건너는 데는 일식경이 소요된다. 소소는 그 거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헤엄쳐서 왔다.
뭍에서 내리자마자 병사들이 가져다준 담요로 아이의 몸을 덮어주었다.
“재밌어?”
“따라오길 잘했어요. 히힛.”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터는 모습이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여기부터는 다른 나라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네~ 아버지. 알았어요!”
이십여 장 앞에서 설풍이 포나라의 병사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타국의 고위급 인사가 왔기 때문일까? 병사들의 행동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잠시 후 설풍이 다가와 말했다.
“근처에 역참이 있으니 가서 마차를 가져오겠답니다.”
“본국에서도 안 타는 마차를 타국까지 와서 탈 이유가 있나? 알아서 간다고 해.”
그러나 설풍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또다시 경공을 펼치며 쫓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어질어질했다.
“저들의 호의를 거절하면 이곳의 죄 없는 지휘관이 곤란해질 겁니다. 하지만 장군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이곳에 주둔한 부대는 도성으로 전령을 보내어 이웃 국가의 고위급 인사가 왔음을 알려야 한다. 황실에서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전령보다도 사신들이 먼저 그곳에 도착한다면, 그 책임은 이곳의 지휘관이 짊어져야 할 게 분명했다.
마차를 타지 않고 경공을 펼쳐 간다면 반드시 후자처럼 될 터.
소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딸이 설풍 부장의 허리춤을 붙잡고 묻고 있었다.
“아저씨는 마차 타봤어요? 마차 타면 재밌겠다…….”
“그럼 타봤지. 마차 안에서 창밖을 구경하면서 간식을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와…….”
저 둘의 모습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소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괜한 고집 때문에 애먼 사람이 곤란해질 필요는 없겠지. 대신 서두르라고 해.”
“잘 생각하셨습니다, 장군!”
얼굴이 밝아진 설풍이 기립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달려갔다.
* * *
포나라의 수도 성도성.
사흘 후 이곳에 도착한 셋은 바로 궁성으로 진입했다.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관반사(館伴使)의 관원들이 몰려와 안내하고 있었다.
처음과는 다르게 소소는 어느새 활기를 잃고 침울해져 있었다.
“우리 딸, 왜 이렇게 조용해?”
왠지 모를 궁성의 근엄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간간이 보이는 관원들이나 궁녀들조차 정숙한 채 발걸음까지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여기는 어디예요?”
“포나라의 궁성이란다. 우리가 지내던 곳하고는 분위기가 다르지?”
“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조용해요?”
“천자(天子)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 이곳에서는 함부로 뛰면 안 돼.”
“천자요?”
소무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주변으로 기막을 둘렀다.
“뭐 해석하자면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다는 사람이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란다.”
“그럼 그 사람은 하늘에서 태어났어요?”
비웃기라도 하듯 소무의 한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권위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 할아버지가 그러더구나. 백성들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천자는 금수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이다.”
감히 장양만이 대놓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소소는 장안에 있을 할아버지를 떠올리고는 시무룩해졌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소무가 다시 무어라 말할 찰나 어디선가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윽.”
난데없는 신음에 설풍과 소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소무는 이미 한참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소소에게 말을 건 이유도 이들을 그냥 지나치기 위해서였으니.
소소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커 보이는 소년이 흑룡포를 입고 채찍을 움켜쥐고 있었다.
용포를 입었다는 것은 황족임을 뜻한다. 굳이 복장이 아니더라도 거만한 표정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
잔인한 웃음소리 앞에 한 중년인이 양팔을 벌린 채 묶여 있었다.
걸레처럼 찢어져 혈의(血衣)가 된 장삼과 풀어헤친 머리칼. 한눈에 보아도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모진 고문을 당한 듯 정상적인 몰골이 아니었다.
“어디 한 번 더 얘기해봐라! 내 관상이 어떻다고?”
중년인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빈격과 흉격이 가득 차 전체가 나쁜 관상이라 하였습니다. 귀격이 없음에도 분에 넘치는 부귀를 누리고 있으니, 반드시 단명할 것입니다.”
흑룡포의 소년은 지금의 상황이 재밌다는 듯 배꼽을 잡았다.
“하하하! 네가 그렇게 관상을 잘 본다지? 그럼 궁금하구나. 네 천한 부인과 딸이 오늘 밤 나한테 죽을 관상이란 것도 알았는지 말이다.”
“가족은…… 제 가족은 건들지 마십시오.”
“감히 누구 앞에서 명령질이야!”
소년이 움켜쥔 채찍이 펼쳐지며 눈앞의 사내를 가격했다.
촤아악-! 촤아악-!
채찍이 지나는 자리로 살점이 움푹 파이며 고통의 비명이 토해져 나왔다.
“크아악!”
이십여 명의 관원이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환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말했다.
“고정하십시오, 태자 저하. 폐하께서 이자는 죽이면 안 된다고…….”
환관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흑룡포를 입은 소년의 손아귀가 솟구쳐 오르며 그의 뺨을 날렸기 때문이다.
짜악-!
“닥치고 쇠뭉치와 집게를 가져오너라. 저놈의 이를 전부 뽑아봐야겠다.”
“예……?”
“재밌을 것 같지? 어서 준비해. 네가 뽑을 거니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딸아이의 등을 감싸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소는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무서워요, 아버지…….”
소소는 무서워졌다. 눈앞의 황자가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 잔인한 모습을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무서웠다.
그간 머물렀던 장안의 궁성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기분이 언짢아진 소무는 설풍을 바라보았다. 원규의 휘하에 있던 그는 무언가 아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 저 망나니 같은 녀석은 누구야?
전음을 받은 설풍이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소곤거렸다.
“황자 원진입니다. 원래부터가 천성이 잔악한 놈입니다. 저 녀석이 어릴 때 새나 짐승을 잡아 사지를 잘라 죽이는 것을 수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열 살이 되던 해에는 첫 살인을 저질렀지요.”
“살인이라니?”
“자신에게 훈계했던 군 장교에게 앙심을 품고 뒤에서 검으로 찔렀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난도질을 했지요.”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나?”
“절도사의 외아들인데 누가 감히 말리겠습니까? 지금은 황자가 되었으니 그 행실이 더욱 고약해졌을 겁니다.”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소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비는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거지?”
“가택연금도 시켜보고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후에는 손을 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놈이 나중에 황위를 물려받는다 생각하니 끔찍하군.”
“그리된다면 이 나라에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타국의 황족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이들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 귀정관에 도착했다.
사신들이 머무르는 별채로 장안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황금으로 장식된 집기류들은 물론, 온갖 진귀한 과일들과 주전부리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다.
“잠시 후 회담이 준비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별채 앞에 관반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잘 알겠네.”
안내하던 자들이 물러가고, 세 명은 묵묵히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어찌 된 일인지 소소도 조용하게 앉아만 있었다. 간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이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봤던 광경으로 입맛이 뚝 떨어진 듯했다.
소무는 딸에게 말을 걸려다가 흠칫했다. 아이의 작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얘가 왜 이러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금방 이겨낼 만큼 강인한 아이였으니.
소무도 침묵에 잠긴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반 시진이 지난 뒤. 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리며 소란스러워졌다. 회담 준비가 완료된 모양이었다.
설풍이 문 앞에 서서 소무를 안내했다.
“모시겠습니다, 장군. 출발하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여기서 좀 쉬고 있어.”
“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