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갈 데까지 가보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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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갈 데까지 가보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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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갈 데까지 가보자 (4)
2022.08.24.
소무와 설풍은 관원을 따라 회담 장소로 이동했다.
마차를 준비시켜주었지만, 이곳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거절했다.
일식경을 걸어 도착한 곳은 양화전(梁和殿)이란 현판이 걸린 웅장한 전각이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단 두 명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불길했던 예감은 조금도 빗나가질 않았다.
일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관료들. 그들의 관복에는 금빛 두루미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만약 고위관료라면 두 마리가 수놓아져 있어야 했다.
소무가 다가가자 그들이 먼저 포권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첨정 왕준필입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첨정 전양입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첨정(僉正)은 정육품의 문관으로 중앙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책임자들이다.
외교를 논할 권한조차 없는 인물들로, 타국의 대장군을 상대하기에는 햇병아리들이나 다름없었다.
지켜보던 설풍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일국의 군정장관이 직접 왔거늘 어찌 포나라에서는 격을 맞추지 않는단 말이오? 사신의 자격으로 민공의 친서를 가져왔으니, 폐하를 알현할 수 있도록 주관해주시오.”
“고의적인 부분이 아니오니 오해를 거둬주십시오. 폐하께서는 옥체가 강녕하지 않아 누군가를 대면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규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는 반란군을 토벌하고 다니던 이름있는 군벌이었다. 화경의 고수로 알려진 그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은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이었다.
“그럼 재상이라도 만나게 해주시오.”
“안타깝게도 재상께서는 현재 출타 중이십니다.”
설풍은 말문이 막힌다는 듯 입을 뻥긋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언제 실권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오?”
“그것은 저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대신 연회를 준비하겠으니 우선 며칠 쉬시면서 기다려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소무는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단순한 말장난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면은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어이가 없다 못해 웃기는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선 협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국가 간의 일에는 무슨 일이든 명분이 필요한 법.
“이곳이 내 자리인가 보군.”
자리에 앉은 소무는 설풍에게도 앉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것을 확인한 왕준필과 전양이 맞은편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이었을 뿐. 의자를 빼내려 했지만, 마치 무엇인가에 고정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왜…….”
“왜, 왜 이러지?”
둘은 의자를 움켜쥔 채 낑낑댔다. 뒤로 빼낼 수가 없으니 앉을 수도 없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소무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서 앉지들 않고 뭐하시오?”
“그, 그게…….”
무슨 상황인지 짐작한 설풍은 표정을 관리하며 지켜보았다.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문관들은 눈치챌 수 없었지만, 설풍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대장군의 기(氣)가 실내의 공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반각이 지난 뒤 소무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앉기 싫다면 나가셔도 좋소. 다른 관료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겠으니.”
소무는 팔짱을 낀 채로 두 눈을 감았다. 설풍도 하는 수 없이 그의 행동을 따라서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곤란해진 것은 왕준필과 전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에서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 그럼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눈빛을 주고받은 그들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전각 밖으로 나갔다. 자신들의 윗선에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소무는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눈을 감은 뒤로 반시진이 지난 후. 누군가가 안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탁상의 맞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소무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단지 기의 흐름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기혈로 보아 상대는 겁을 먹고 있었다. 또다시 허수아비를 보내온 것이리라.
끼기긱-!
의자를 빼는 것에 성공한 그자는 안도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갑자기 오한이 걸린 듯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덜덜 떨고 있을 무렵. 소무의 입이 다시 한번 달싹였다.
“앉으시오. 각오가 되어 있다면.”
잠시 머뭇거리던 관료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치 그 자리에 앉으면 죽임을 당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시진 동안 같은 일이 세 번이나 더 반복되었다.
소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을 갖고 있다. 설풍만 반쯤 울상을 지은 채 꾹 참고 있었다.
설령 회담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단지 명분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포나라의 대신들도 그의 속셈을 모르지는 않는 듯했다.
네 번째 인물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감겨 있던 소무의 눈이 세 시진 만에 처음으로 뜨였다.
“내사령 하문입니다.”
내사령(內史令). 정이품의 관직으로 나라의 중신이 아니라면 수여 받을 수 없는 자리였다. 서열이 한 손 안에 드는 거물급이 온 것이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기(氣)에 주눅 들지 않는 비범한 기개가 느껴졌다.
소무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처음으로 마주 포권했다.
“소나라의 대장군 소무입니다.”
“부장 설풍입니다.”
설풍을 바라보는 하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지금 자리에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최근 나라가 어수선하여…….”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미리 약속하고 온 것도 아니니.”
하문과 소무는 마주 앉아 형식적인 인사를 몇 차례 주고받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하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장군께서 저희와 논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을 터였다. 회담을 피해왔던 이유이기도 했으니. 그렇기에 말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휘나라와 일전을 벌일 생각이니 병력을 지원해주십시오.”
“본국과 소나라는 군사적으로 동맹 관계가 아닙니다. 하온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참전을 해야한다는 말입니까?”
예상된 반응이었다. 이들이 순순히 움직인다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송나라를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로 힘을 모으지 못한다면, 차례차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포나라가 지금은 후방에 있지만,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이지요.”
송나라나 소나라 중 한 곳이라도 무너진다면 다음 차례는 포나라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하문은 마치 남의 일이란 듯 여유가 넘쳤다.
“적국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소나라는 지금껏 패배한 적이 없었고, 송나라 또한 양양성을 굳건히 지켜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문은 휘나라를 얕보고 있었다. 그의 반응에 소무는 점차 답답해졌다. 군사 진유소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 말이 이해되었다.
“지금까지의 승리는 작은 것일 뿐, 아직 본격적인 전쟁은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믿기가 어렵군요. 우리도 보고 듣는 것이 있습니다. 고려에서도 선전하고 있다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휘나라는 지금 시간을 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병력은 우리 소나라의 열 배를 넘어섰으며, 적호병단이라는 정예병들까지 대규모로 양성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가 더욱 불리해질 것입니다.”
하문의 얼굴에 의미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하오나 장군의 말만 듣고 군사를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이후의 상황을 보고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전세가 본격적으로 불리해지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포라나에서 신뢰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군요.”
“그렇다고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설령 송나라와 함께 우리를 핍박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협박도 통하지를 않았다. 휘나라를 상대하기에도 벅찬 상황에 포나라를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어찌 그리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그저 서로의 오해를 풀고,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을 따름입니다.”
소무는 그의 반응에서 확실히 직감했다. 이미 그의 윗선인 황제가 파병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음을.
쉽게 결판 날 상황이 아니었다.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한편 홀로 남겨진 소소는 목을 빼고 전각의 이 층을 왔다 갔다 했다.
금방 다녀온다던 아버지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비된 주전부리 몇 개를 주워 먹었지만, 그것으로 배가 채워질 턱이 없었다.
“휴. 배고파.”
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움츠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가 금세 사그라졌다.
“아버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소소는 창틀에 매달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대한 전각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동한 소소는 기척을 죽인 채 창틀을 밟고 도약했다.
타앗-!
전각의 지붕 위에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주변을 살피는 듯했다.
장안성의 궁성과는 다르게 곳곳이 한적했다.
대열을 맞추어 이동하는 궁녀와 환관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순찰을 다니는 금군까지.
대놓고 이동할 수가 없었기에 소소는 살문의 잠행술을 펼치며 날아올랐다.
은밀히 몇 개의 전각 지붕을 넘나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아저씨……?’
이십 장의 거리로 보이는 전각 사이의 길목. 그곳에는 낮에 고문을 당하던 중년의 아저씨가 보였다.
그는 두 명의 관원에게 붙들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낮에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달렸다.
온몸이 붉게 물든 처참한 몰골. 그리고 마치 다리에 뼈가 없는 사람처럼 발목을 질질 끌고 있었다.
“어떡해…….”
한 손을 입으로 가리고 고민하던 소소는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을 따라가 보기로 말이다.
뇌옥 같은 곳으로 데려갈 줄 알았으나, 인적이 뜸한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창고와 같은 용도로 사용될 법한 전각이었다.
두 명의 관원은 그곳에 중년인을 가두고 나와서 입구를 지켰다.
그때 좌측에 있던 관원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기분 참 더럽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내 말이. 관상 한 번 봐준 게 무슨 죄라고. 내 살다 살다 그런 미친놈은 처음 봐.”
“조심해. 주둥이 함부로 놀렸다가 저하 귀에 들어가면 능지처참 당하는 거야.”
“아무도 없는데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옆에 있던 관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후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속삭였다.
“틀린 소리는 아니지. 어떻게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겁탈하고 죽일 수가 있어? 그런 개자식이 무슨 황자라고.”
“뭐 하루 이틀인가. 가만히 보면 열흘에 한 번꼴은 될걸? 주기적으로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해야 만족하나 봐.”
“확실해. 저 관상가가 그랬다며.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팔자였다고. 용하긴 한 거 같은데, 우리도 관상 한번 봐달라고 할까?”
옆에 있던 관원이 고개를 돌려 쏘아보며 말했다.
“미친 짓거리 하지 마. 곧 있으면 돌아올 거야.”
“벌써?”
“도망친 딸 하나 잡아 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 금룡대까지 동원했는데.”
“쯧쯧. 불쌍한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두 명의 관원은 말을 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눈앞에서 쪼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구요?”
코앞에 있는데도 언제 다가왔는지조차 몰랐다.
입구를 지키는 관원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떡해, X발?”
“일단 잡아. 우리 얘기 다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