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1)
(207/250)
207화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1)
(207/250)
207화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1)
2022.08.26.
소무와 설풍은 밤이 늦어서야 양화전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계속된 설전에서도 포나라가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하는군요. 세상이 어떻게 망가지든 협조하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소무는 씩씩대는 설풍을 바라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돌아가서 군사를 볼 면목이 없군.”
“이대로 포기해야 합니까? 우리만으로 낙양을 공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결정을 내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설풍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했다. 마음 같아선 회담을 가졌던 내사령의 얼굴을 때리고 싶을 정도였다.
“후. 치졸하게 저러는 것을 보니, 나중에는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을 먼저 정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정예병들로 신속히 도성만 점령하고자 한다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전쟁은 안 돼. 또 다른 전란으로 민초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 방식이 아니야.”
“무능한 황실 때문에 이곳의 백성들이 더욱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단지 그들을 구하자는 것입니다, 장군.”
소무는 그의 등을 한 번 두들기고는 화두를 돌렸다.
“어서 돌아가지. 내 딸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아직 밥도 못 먹었을 텐데, 이걸 어쩌나.”
“소소 데리고 나와서 객잔에라도 가는 것이 어떠십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장군.”
표정을 보니 답답한 마음에 술이라도 들이켜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라를 위한 마음에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겠군. 돈은 충분하겠지? 우리 딸이 체구는 작아도 좀 많이 먹어.”
“충분합니다. 오늘은 끝까지 한번 마셔볼 생각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내가 챙겨준 돈이 넉넉했기에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전면에는 관원 몇 명이 앞장서서 귀정관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일다경쯤 걸었을 때였다. 돌연 소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궁성에 무슨 사건이라도 터졌나 보군.”
“예……?”
설풍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동공이 부릅떠졌다.
“금군들인데요?”
“음…….”
도성을 수비하는 금군이 곳곳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십여 명이 한 조를 이룬 그들은 어림잡아도 수백 명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태자 저하를 기습한 년이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샅샅이 뒤져!”
병사들의 호통에서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설풍이 통쾌하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황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누군가가 복수한 모양입니다. 그렇게나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더니,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모든 일은 인과에 따라 되돌아오는 법이지. 천하에 해를 끼치는 망나니 녀석이 어찌 하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금군이 저렇게 깔렸으니 곧 잡히겠지요?”
소무의 고개가 한 번 끄덕여졌다.
“아마도. 그나저나 하나밖에 없는 황제의 외아들을 공격했으니 험한 꼴을 당하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누군지 몰라도 역사에 남을 의협이로군요.”
둘은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먼 곳으로 목적지인 귀정관이 눈에 들어올 찰나였다.
어딘가에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쪽이다!”
“빨리 이곳을 지원해줘!”
호각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한 곳을 향해 벌떼처럼 몰려갔다.
그들의 모습에 설풍이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벌써 포위당한 모양입니다.”
소무는 대답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느낌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기척으로 보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때 측면에서 황금빛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등장했다.
“모두 비켜!”
한눈에 보아도 금군보다 강해 보이는 병사들. 포나라의 정예부대인 금룡대였다.
백여 명에 이르는 그들의 중심에 누군가가 들것에 실려 있었다.
금빛 비단이 깔린 인력 마차. 그곳에는 처참한 몰골로 숨을 헐떡이는 황자가 누워있었다.
황자는 야차 같은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 반드시 산 채로 잡아야 한다!!!”
황자의 모습을 살펴보던 설풍이 피식 웃었다.
“저 녀석, 치아가 하나도 없는데요?”
그뿐만 아니라,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자신의 안위보다 흉수를 잡는 것에 더욱 혈안이 되어 있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표정을 더욱 굳혔다.
백여 장 밖이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낯익은 기운 하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무엇이 말입니까?”
“직접 가보면 알겠지.”
소무와 설풍은 경공을 펼쳐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둘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전각의 벽을 등지고 두 명의 여자아이가 병사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장, 장군님의 딸이 왜 저기에…….”
바가지 머리에 귀엽게 생긴 아이는 소소가 분명했다. 오백여 명의 병사들에 둘러싸여 소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뒤에 있는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무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아무래도 내 딸인 것 같아. 황자를 저 꼴로 만든 장본인이.”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본인도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는지 매우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 그럼 어떻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마음을 어찌 탓하겠나. 민공께서도 말씀하셨네. 모두가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듯해질 수 있다고 말이지.”
소무는 호흡을 한 번 크게 들이켠 후 병사들을 제치며 안으로 걸어갔다.
“누구시오?”
“체포하기 전에 물러나시오!”
금군들이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몇 마디 소리친 게 전부였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기세에 짓눌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던 소소가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버지!”
“내가 좀 늦었구나.”
소소는 아버지의 허리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 죄송해요. 나 이제 어떡해요…….”
소무는 주변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내공 실린 음성으로 말했다.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는 못된 녀석을 때려준 것이 어찌 죄송해야 할 일이더냐.”
뒤따라오던 설풍은 화들짝 놀랐다. 이곳은 적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않은가. 아무리 대장군이라도 선을 넘는 도발이었다.
포나라의 금병들이 포위망을 더욱 두껍게 하며, 소무를 향해 검을 겨눴다.
“얘는 제 친구예요. 엄마도 죽고, 아버지도 지금……. 흐어엉…….”
반쯤 넋이 나간 여자아이 하나가 소소의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낮에 봤던 관상가를 닮은 것을 보니 그의 딸인 듯했다. 그리고 얼굴과 팔 등 곳곳에는 멍이 든 상처가 있었다.
굳이 얘기를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딸이 오늘 짐승을 사냥했구나.”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뿜어져 나왔다.
“뭣들 하는 거야, 등신들아! 당장 잡아!”
인력 마차에 누워있는 황자였다.
검을 쥔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설풍이 바닥에서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순순히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모습을 알아본 장수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너는 설풍이 아니더냐? 나라를 배신하고 소나라에 투항했다는 말이더냐?”
“내가 충성할 주인은 내가 결정한다. 다가오면 벤다.”
그러나 그에게는 검을 휘두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애들 데리고 물러서 있어.”
소무는 뒷짐을 쥔 채 홀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황자 원진이 있는 위치였다.
“어서 공격해!!!”
사방에서 병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소무는 여전히 뒷짐을 풀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들과 거리가 삼 장 이내로 좁혀지는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기막(氣膜)이 원형으로 뿜어져 나왔다.
반탄강기보다 상위 기술인 반야기공(反惹氣功)이었다.
콰아아앙-!
달려오던 병사들이 동시에 튕겨 나가며 나자빠졌다.
“큭!”
“끄윽!”
찰나의 순간 오십여 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뒤로 강노를 움켜쥔 병사들이 나타나 소무를 조준했다.
그런데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얼굴에도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나는 소나라에서 온 대장군 소무다. 너희들에게 하나만 묻겠다. 저 망나니가 너희들이 목숨 바쳐 충성해야 할 주인이 맞느냐?”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만인을 압도하는 기세에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강노병들이 가만히 있자 황자가 다시 한번 발작을 일으켰다.
“공격…….”
황자는 명령을 끝마치지 못하고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소무가 살기(殺氣)를 쏘아보냈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한번 소무의 음성이 뿜어져 나왔다.
“포나라의 병사들은 짐승에게 명령을 받는 오합지졸이냐 물었다!”
그의 호통은 맹호의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그 어떠한 병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눈치만 살피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릇 병사의 숭고한 자긍심은 백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것에서 나온다 하였다. 하지만 살인마의 명을 받들어 백성을 핍박하고, 아이들을 해하려 하는 자들에게 무슨 자긍심이 있겠는가.”
걸음을 옮기던 소무는 어느새 강노병들의 코앞까지 이르렀다. 그 순간 장교가 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노병들이 좌우로 물러섰다.
금룡대의 정예병들 또한 마치 얼음이 된 듯 미동조차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소무는 겁에 질린 황자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지금까지 네 손에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몇 명이더냐.”
마차에서 볼품없이 떨어진 황자는 소무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크윽!”
그를 막아서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마저 짓고 있는 듯했다.
어느새 아이들을 끌고 다가온 설풍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곤거렸다.
“장, 장군. 어쩌실 계획입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예……?”
“자네는 이곳 출신이니 성도의 궁성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이 시각에 황제가 있을 곳으로 안내해.”
소무는 황자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설풍을 뒤따라 나아갔다.
뒤늦게 나타난 내시들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하…….”
“태자 저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포나라의 병사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묵묵히 포위만 구축하고 있었다.
평소 황실에서 병사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을지 상상조차 안 되었다.
일다경을 걸어 도착한 곳은 화려하게 꾸며진 전각이었다.
입구에 환관과 궁녀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있을 게 확실했다.
축제라도 벌이고 있는 듯 안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입구에 도착한 소무는 다짜고짜 문을 발로 걷어찼다.
콰앙-!
내부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선 진수성찬과 오십여 명의 관료들. 그중에는 조금 전 회담을 나눴던 내사령 하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석에 앉아 있는 자. 반나체의 모습으로 궁녀들을 껴안고 있는 그는 황제가 분명했다.
난데없는 소란에 그들의 고개가 동시에 입구로 향했다. 동시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소무의 손아귀에 붙잡혀 의식을 잃은 피투성이의 누군가가 가장 먼저 보였다. 얼굴이 핏덩이로 변해 알아볼 수 없었지만, 흑룡포로 보아 황자가 분명했다.
그때 설풍이 소무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벌거숭이 놈이 몸이 좋지 않다던 황제이고, 그 오른쪽에 있는 녀석이 먼 곳으로 출타를 나갔다던 재상입니다.”
“알았네. 애들 데리고 잠시 밖에서 기다려.”
“예, 장군.”
설풍은 아이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소무가 황자를 끌고 안으로 진입하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콰앙-!
입구를 가로막은 소무의 두 눈이 화염처럼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충격적인 한마디가 내뱉어졌다.
“오늘 너희들을 모두 죽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