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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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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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계획을 좀 바꿔야겠다 (2)
2022.08.27.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설풍은 안절부절못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이후 지금은 정적만 계속 흐르고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길 반시진. 드디어 전각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곳에선 소무가 홀로 터벅터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설풍은 그의 손에서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전부…… 죽인 겁니까?”
소무는 침묵을 지키며 앞장서서 나아갔다.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주춤거렸다. 지휘관들이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으니 본능적으로 길을 비킬 뿐이었다.
설풍이 아이들의 등을 감싸며 뒤따랐다.
“어서 가자, 얘들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지만, 먼저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궁성을 벗어날 때까지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인적이 드물어지자 소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어.”
“어떻게 된 겁니까……?”
“이곳에서 모두 죽을지, 아니면 병력을 파견할지 결정하라고 말했네.”
“황제가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소무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관료들 중 무관 몇 명이 덤비더군.”
“결과는요?”
“모두 쓰러트렸어. 일격에. 그 뒤로는 별로 한 게 없어.”
소무는 품속에서 둘둘 말린 한지를 꺼냈다. 그것은 혈서(血書)였다.
“설마 황제의 혈서입니까?”
“황제가 직접 쓴 건 맞는데, 신하들이 흘린 피를 대신 사용하더군. 어쨌거나 중앙군에서 삼만 병력을 편성하여 참전하기로 약조했어. 우리의 지휘를 받게 될 거야.”
장안성에 주둔 중인 병력보다 좀 더 많은 숫자였다. 비록 병사들의 훈련도와 수준은 비교가 안 되지만, 가볍게 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설풍은 단신으로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그의 배짱에 매우 놀라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군사님이 좋아하시겠군요.”
좋아할 만도 했건만 소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쩌면 군사는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나를 보낸 것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민공께서는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
“어차피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속 시원하게 잘 해결되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소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망나니 황자가 불구가 되었어. 이번 일은 우리 뜻대로 되었지만, 황실이 원한을 품고 있을 테니 나중이 문제겠지.”
“포나라는 경제력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나도 앞만 보고 갈 생각이야. 강적을 앞에 두고 한눈 팔 겨를이 없어.”
설풍은 나란히 걷는 소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째서 병사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소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막힘없이 말했다.
“명분도 없이 반란으로 세워진 나라에 목숨까지 바치면서 충성할 병사는 없어. 휘나라의 경우에는 그것을 대비해 가족을 인질로 삼아 공포로 통솔하고 있지. 하지만 결속력이 약한 포나라는 그런 짓을 벌이는 순간 바로 무너지게 될 거야.”
“그럼 저래서 어떻게 싸웁니까? 병사들의 충성도가 바닥인데, 전장에서 도움이나 될지…….”
소무는 협정서를 다시 품속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병법에서 이르길, 병사들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죽음까지도 함께 간다고 하더군. 어떻게든 황실이 병사들의 마음을 얻어야겠지. 그들도 문제를 깨달았을 테니 방법을 찾아낼 거야.”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꼭 그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음. 권위가 땅에 떨어진 황실이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면 어렵지 않을 거야. 만약 실패한다면 포나라는 스스로 자멸할 테고, 우리가 개입해야겠지.”
말을 마친 소무는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소소가 자신의 또래 아이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나왔다. 양부모를 눈앞에서 잃었으니 상심이 클 수밖에.
“우선 배부터 채우고 가지.”
일행은 어느새 성도의 한 객잔 입구에 서 있었다. 귀국하기에 앞서 든든히 배를 채워야 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넷이 마주 앉자 점소이가 다가왔다.
눈치 빠른 점소이는 소무의 관복을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으리. 무엇을 준비해드릴까요?”
“음. 나는 괜찮으니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들로 내어주시게.”
말이 끝나는 순간 소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모처럼 받은 선택권이었기에 기쁜 듯했다.
“저는요! 오리탕이랑, 돼지고기 조림하고, 볶음! 그리고 고추잡채랑 생선도 먹고 싶어요.”
“……조금 많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만두랑 소면도 주세요.”
점소이는 당황하며 소무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예. 그럼 압탕과, 동파육, 경장육사, 청초육사, 양단잉어찜, 그리고 만두와 소면을 준비하면 괜찮을지요?”
“그리해주시오. 죽엽청도 한 동이 주시고.”
원하는 대로 해주긴 했지만,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딸이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딸.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돈은 있어?”
“제가 사줄게요, 아버지. 나 부자예요.”
소소는 전낭을 올려 흔들어 보였다. 엄마한테 받은 여비를 제외하고도 모아놓은 용돈도 상당했다.
소무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의도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침울해 있는 친구의 기분을 달래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많이 시켜준 모양이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괜찮다면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고 싶구나.”
“양소청입니다. 열한 살입니다.”
소소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하지만 딸의 성장이 빠른 탓인지 둘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된 소무는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 차분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너의 슬픔을 어찌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구나.”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정해놓은 운명이라는 것이 너무 화가 납니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터인데, 이토록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운명이라…….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보이구나.”
“아버지는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바꿀 수 없다고 받아들이셨지요.”
“혹시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냐?”
양소청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좀 더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보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냥 돌아선 게 후회됩니다.”
아이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소무는 안타깝다는 듯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어서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나직이 토해져 나왔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구나…….”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양소청이 합을 맞추듯 다음 말을 이어갔다.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시지 않네. 한번 흘러가면 쫓아갈 수 없는 것이 시간이요, 가시면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이시네…….”
“맞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지. 배움이 많은 아이로구나.”
“아닙니다…….”
소무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 딸도 좀 알려주거라. 나중에 힘만 센 천하장사가 될까 걱정이란다.”
소무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했다.
조용히 지켜보던 소소의 미간이 가운데로 모이며 내 천(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치……. 할아버지가 나는 훌륭한 장군이 될 거라고 했어요!”
그 순간 소무와 설풍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우울해 있던 양소청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주문했던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들지. 어서들 먹어.”
“예, 장군.”
“맛있게 먹겠습니다~”
식사가 한참 진행되던 중 양소청이 말문을 열었다.
“저……. 부탁이 있습니다, 아저씨.”
상식에 어긋나는 부탁을 할 아이가 아니었기에, 소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마. 어서 말해 보아라.”
“장안으로 가실 거죠……?”
“역시 눈치가 빠르군. 우린 한수를 건너 그곳으로 갈 거란다.”
“양가장(楊家將)이 본가를 장안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곳에 저를 데려다주실 수 있을지요? 제 먼 친척들입니다.”
놀라움이 끝이 없었다. 어린 것이 그사이 몸을 의탁할 곳까지 생각해두었다니.
양가장의 맏형격인 양연정은 한중으로 부임을 간 상황이며, 동생들인 양강과 양소가 한중의 본가에 있는 상황이었다. 양씨 가문이라면 이 아이를 따듯하게 맞아줄 터.
“양가장이라면 우리 집 근처로구나. 그리하자꾸나. 내 직접 그들과 만남을 주선해주마.”
“고맙습니다…….”
다시 젓가락을 움켜쥔 소무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다른 음식을 마구 흡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하겠구나.”
입안이 빵빵해진 소소는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먹었어요, 아버지. 나 어디 좀 갔다 올게요.”
“어디 가려고?”
소소는 방긋 웃으며 허리춤의 전낭을 움켜쥐었다.
“엄마 선물 사올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설화가 걱정되었던 터였다.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객잔 근처에도 상점 몇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멀리 가지 말고 빨리 다녀와.”
* * *
닷새 후 장안의 양가장(楊家將).
오십여 명의 일가족이 모여 함께 사는 이곳은 세 채의 전각으로 구성된 장원이었다.
대대로 나라에 헌신해 온 무관의 집안으로 남자들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명예로 여겼으며, 여인 중에서도 많은 인재가 나왔다.
양소청과 함께 이곳에 찾아온 소무는 귀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가주가 직접 나와 소무 앞에 고개를 조아릴 정도였다.
“대장군께서 누추한 이곳까지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이와 편히 말씀 나눠 보시지요.”
가주 양진소는 인자한 웃음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 아비 이름이 양율평이라 하였느냐?”
“예, 대부님…….”
양진소는 옆에 기립하고 있는 양강을 향해 물었다.
“허허. 아들아, 그분이 뉘신 줄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성도에서 유명한 분이셨다. 그러니까 가만있자…… 우리 할아버지의 팔촌 동생의 증손자가 바로 이 아이의 아비인 게다. 한 구촌쯤 되는 게지.”
양강은 양소청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냈다.
“먼 길을 잘 왔구나. 정말 잘 찾아왔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족숙님.”
“허허. 그래, 그래. 녀석 눈빛이 참 맑구나.”
누구보다 인재를 귀히 여기는 양가장이었다. 그들이 양소청의 비범함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비록 무공을 익히진 않았으나, 한눈에 보기에도 총명함이 남달랐다.
가주인 양진소가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호명했다.
“양소야, 냉큼 이리 와 보거라!”
그는 궁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순라군의 대장으로, 양진소의 막내아들이었다.
“예, 아버님.”
“네가 이 아이에게 식구들을 한 명씩 소개해주어라. 귀한 아이이니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상체를 숙인 그는 양소청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소무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고, 우리 집안의 아이입니다. 이렇게 챙겨주셔서 저희가 고마울 따름이지요.”
소무는 찻잔을 움켜쥐고는 두 손으로 그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이미 나라가 양가장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모쪼록 가르침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가주인 양진소는 나이가 들어 은퇴했지만, 소싯적 많은 전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백전노장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전쟁경험과 전술 등 배울 점이 많았다.
정세에 관한 얘기까지 나누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장군, 어서 추밀원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양강이었다. 소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군사께서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군사가 직접 찾아왔다면 별로 반가운 소식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기다리고 있을 정도면 무엇인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