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랑아대의 보모 (1)
(211/250)
211화 랑아대의 보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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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화 랑아대의 보모 (1)
2022.08.30.
집에 도착하자 아내와 딸이 마루에 앉아 합주를 하고 있었다.
칠현금과 퉁소가 뒤섞인 아름다운 음률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다소곳이 앉은 모녀 옆에는 두 눈을 감고 쪼그려 있는 산군이 보였다. 두 눈을 감고 코를 벌렁거리는 모습이 마치 음악에 심취해 있는 듯했다.
“저게 사람이야, 짐승이야?”
소무의 인기척에 합주가 동시에 중단되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산군의 등 위로 소소가 폴짝 날아올라 안겼다.
“아버지!”
“이 녀석, 아침에 궁성에서 봤다. 언제 돌아왔어?”
“조금 아까 왔어요. 밥 먹으러요.”
소무는 왼쪽 가슴에 안긴 딸의 귀를 잡아당겼다.
“밥 시간은 잊지 않는구나.”
“히히히. 이따가 엄마랑 다롱이 데리고 산에 올라갈 거예요.”
“그래, 수련을 게을리하면 안 되지.”
양주산에 무공 수련을 하러 가는 것이리라. 아내의 염원인 진일심소곡의 비밀을 풀기 위한 사전단계로 사자후의 연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딸을 마루 맡에 내려놓은 소무는 아내와 마주 앉았다.
해의 위치를 쓱 훑어보던 설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 시간에 집에는 어쩐 일이야?”
“우리 연매 보러 왔지. 밥은?”
설화가 의심의 눈초리로 소무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했다.
“별일이 다 있네. 아직 안 먹었어.”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해볼까?”
직접 요리를 해준다는 의미였다. 설화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딸. 네 아버지가 오늘 이상하구나.”
“내가 보고 올게요, 엄마.”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소가 부엌으로 달려갔다.
오른손에 식칼을 움켜쥔 채 재료를 손질하는 소무가 보였다.
“아버지, 우리 뭐 해줄 거예요?”
“소호팔압채(小湖八鴨菜). 아버지가 개발한 소호객잔의 특식이란다. 다행히 재료는 모두 있는 것 같구나.”
소무는 대파와 당근, 호박, 가지 등 여덟 가지 재료를 올려놓고 능숙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닥-!
한 호흡에 수십 갈래로 토막을 내는 모습이 신기한지, 뒤에서 딸이 허리를 붙잡고 연신 두 눈을 끔뻑였다.
“맛있겠다……. 아버지가 최고예요.”
소무는 피식 웃으며 철판에 기름을 둘렀다.
미리 손질해 놓은 오리고기를 투척하고는 달달 볶으며 말했다.
“청해가 좋아하던 요리인데, 나중에 한번 초대해야겠구나.”
“청해 삼촌이요?”
소호객잔을 운영하던 당시 단골손님이었던 청해가 매일 시켜먹던 요리였다.
“응, 이거 먹으면서 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눈물을 흘린 이유는 화산파에서 파문당했기 때문이었다.
손질해 놓은 여덟 가지 재료를 일정한 순서대로 철판에 올렸다. 잠시 후 향긋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빨리 먹고 싶어요…….”
“거의 끝났으니깐 어서 준비해.”
밥상을 가져온 소소는 밥을 한가득씩 푸고, 반찬과 젓가락 등을 올려놓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요리가 완성되어 있었다.
“자 먹자.”
“네, 아버지!”
양팔을 벌린 소소가 상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체구보다 훨씬 큰 상을 드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지만, 무공을 익힌 몸이었기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루에서 기다리던 설화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 향이 좋네.”
“그렇지? 향신료 없이 재료만으로 맛을 낸 거야. 어서들 먹어봐.”
소무가 야채와 고기를 한 움큼 집어 들자 소소의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입에 한가득 넣어주자, 오물오물 씹는 아이의 얼굴이 해맑은 미소를 만들었다.
“히히히. 맛있어!”
설화도 그 맛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뭘 부탁하려고 이렇게 안 하던 짓을 할까?”
소무가 어색한 미소로 물었다.
“눈치챘어? 사실 좀 도와줘야 할 게 있어.”
설화의 표정은 마치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즐거운 식사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밥부터 먹고.”
소무는 씩 웃으며 옆에 앉은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도 많이 먹어.”
식사가 끝난 후 소소는 산군을 타고 먼저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주 앉은 둘은 심각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소무는 현재 상황에 대해 설화에게 설명해주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던 설화가 찻잔을 움켜쥐며 물었다.
“고작 삼백 명으로?”
“각파의 정예들로 구성했다던데. 게다가 화경급의 원로 셋이 직접 나서서 이끌 거야.”
설화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미련한 정파 녀석들, 아직도 상대를 제대로 파악 못 했나 보네.”
“그게 무슨 소리야?”
“영교의 주력은 아직 숨죽이고 있어. 교묘하게 말이지.”
마교의 정통파는 다른 계파인 영교에게 습격을 받아 궤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세력이 지금의 신마교였다.
연설화는 당시 영교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그들의 전력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음,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역시 쉬운 상황이 아니겠지. 휘나라의 군부까지 개입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상황이니.”
“쉬운 상황이 아니라 전부 죽을걸?”
소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래서 연매한테 도와달라는 거야.”
설화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소림사의 땡중들을 돕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하지만 뭐…… 우리 낭군님이 부탁한다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지.”
얼굴이 밝아진 소무가 은근슬쩍 물었다.
“일이 어려워지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좋은 방도가 없을까? 이런 방면에서는 연매가 최고잖아.”
“욕이야, 칭찬이야? 내 방법이 마음에 들 리도 없을 텐데?”
“지금은 전시잖아.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야.”
설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사천의 당가 녀석들도 와있다고 했지?”
독이나 암기 따위의 잔기술을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무림세가였다. 무공성향이 정파와는 거리가 있었던 탓에 무림맹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당가는 이번 기회에 정파에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전력을 파견한 터였다.
소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독공을 사용하자는 얘기야?”
“그럼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싸우자고 할까?”
독술이야말로 최고의 대량 살상 계책이나 다름없었다.
절정 이상의 고수에겐 통하지 않겠지만, 머릿수로 밀고 들어오는 군부의 병사들에겐 충분한 효과가 있을 터. 압도적인 인원수의 차이에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을 터였다.
“상황이 시급하니 물불 가릴 때는 아니겠지. 안 될 것도 없지만, 대량으로 제조하기엔 시간이 부족해.”
설화는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냐는 듯 시큰둥하게 물었다.
“대장군께서 뭐가 걱정이야? 밑에 한가한 애들 없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문의 기술자들만 있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인력은 병사들을 동원하고, 자금과 재료는 국가적 차원에서 조달하면 그뿐이었으니.
“뭐 병사들을 동원하면 안 될 것도 없겠군. 정말이지 독공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
“잘만 사용하면 그것보다 편리한 건 없다고. 근데 무림맹에서 순순히 사용하려고 할까?”
정파에는 독을 쓰는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무인들이 많았다. 그들이 한발 물러서야만 사용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을 거야. 소림사의 생존이 달린 일이니까.”
“하긴. 가식만 가득한 늙은 구렁이들이니.”
그녀의 표정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교의 전대교주였던 그녀가 정파를 도와주는 상황이었으니 내키지 않을 수밖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내의 기분을 달래줘야 했다.
소무는 미리 준비해온 옥함을 품에서 꺼내어 내밀었다.
주작이 멋들어지게 그려진 게 한눈에 보아도 귀해 보였다.
“잠깐 손 좀 줘봐.”
“……왜?”
소무는 얼떨결에 내미는 설화의 왼손을 맞잡고 옥함을 열었다.
안에는 영롱하고 푸르스름한 빛깔을 뽐내는 가락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이런 가락지 따위 연매의 아름다움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생각나서 하나 사봤어.”
혼사 때 예물 하나 못 해준 것이 마음에 걸렸던 소무였다. 녹봉에 여유가 생겨 뒤늦게 구매한 것이다.
소무는 가락지를 끼워주며 은근슬쩍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홍시처럼 붉게 변한 얼굴. 그리고 연꽃잎 같은 설화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
아내의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소무는 마음속으로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옷을 털고 일어섰다.
“흠흠. 군영에 좀 다녀올게. 이번에 함께 갈 대원들을 선출해야 하니.”
멍한 표정으로 있던 설화는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를 향해 다정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와.”
* * *
소무가 집을 나와 도착한 곳은 랑아대의 전용 훈련장이었다.
여타의 훈련장과는 느껴지는 기세가 달랐다.
대련을 벌이는 대원들은 살벌하기가 그지없었다. 마치 폭우 소리와 같은 병장기의 격돌소리가 곳곳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기특한 녀석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왼손을 뒷짐 쥔 소무는 랑아대의 훈련장을 향해 난입해 들어갔다.
첫 번째 목표물은 가장 가까이 있는 랑아대의 막내 송화였다.
대련 상대를 마주보며 기수식을 하던 송화는 순간적으로 옆구리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방어동작을 개시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소무의 손바닥이 그곳을 후려치고 있었다.
콰앙-!
“컥!”
지면에서 떠오른 송화는 일장을 날아가 뒹굴었다.
갑자기 대련 상대를 잃은 랑아대의 한상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는 어느새 다가온 소무가 일격을 내지르고 있었다.
쩌엉-!
“크윽.”
앞으로 고꾸라진 그는 두 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송화와 한상은 주저앉은 채로 상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낯익은 인물을 보았다.
“대장님, 치사하게 기습을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너무합니다!”
대원들에게 있어서 소무는 언제나 랑아대의 대장이었다. 소무도 직속부하들과 이렇게 거리감 없는 관계를 좋아했다.
“진정한 무인은 어느 순간에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엄살들 부리지 말고 일어나.”
요란스러운 소리로 한 대씩 맞았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충격이 몸을 통과하여 허공에서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소무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소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대원들의 신음이 이어졌다.
콰앙-! 콰직-! 뻐걱-!
“크억!”
“악!”
“누구야!?”
랑아대원들을 한 명씩 쓰러트리고 다니고 있을 때였다.
일곱 명째에서 소무의 공격이 처음으로 막혔다.
쿵-!
화산파 출신의 현정이었다.
손바닥을 검 면으로 받아낸 그는 충격에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크윽.”
소무의 얼굴에 흡족함이 떠올랐다. 용케도 기습을 막아내다니. 비록 힘의 삼 할 정도만 사용했으나,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 합격.”
“……뭐가요?”
“나와 함께 갈 자격이 있어. 떠날 채비나 해.”
영문을 모르는 현정이 어리둥절할 무렵, 소무는 이미 다른 곳으로 쏘아져 나갔다.
대원들이 자신이 온 것을 눈치챘기에 더는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가장 강한 녀석들로 스무 명이다.’
이번 임무는 위험도가 높았기에 생존능력이 가장 뛰어난 대원들만 데려갈 생각이었다.
부하들을 향한 소무의 평가는 일식경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