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랑아대의 보모 (5) (215/250)


215화 랑아대의 보모 (5)
2022.09.03.


“없다! 이제 보물 없다!”

미쳐버린 파계승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그것을 순순히 믿을 설화가 아니었다. 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파계승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둘의 간격이 한 발자국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였다.

가냘픈 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가사를 확 찢어버렸다.

찌지지직-!

그 순간 작은 목함 하나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거기엔 깨알 같은 글씨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대환단(大還丹). 소림사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진귀한 보물이자 최고의 영약이었다.

“이건 또 어디서 훔쳤어? 미친 땡중이 정말 가지가지 하고 다녔네.”

“안, 안 돼! 내 보물에 손대지 마!”

파계승이 기습적으로 반격을 해왔다.

직진으로 뻗어 나오는 강기에 휩싸인 주먹. 심상치 않은 기세에 설화는 방어 대신 회피를 택했다.

허리가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그녀의 앞가슴으로 돌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찰나 후 십여 장이 떨어진 곳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우지끈 부러졌다.

쩌적-!

‘백보신권(百步神拳)?’

백 보 밖의 적을 격살한다는 소림의 상승무공이었다.

설화는 연달아 다가오는 거센 공세를 침착하게 피해갔다.

여섯 번의 강풍을 회피한 후 반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돌연 파계승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 놀아! 쫓아오지 마!”

그냥 보내줄 수는 없었다. 설화는 바닥에 떨어진 대환단을 챙기고는 심마에 빠진 파계승을 뒤쫓았다.

재빠르게 달리는 그는 어느새 소림사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대금강이 사찰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알 게 뭐야.’

승려들의 경고 따위는 애초부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파계승과 설화가 지나가는 자리로는 거센 돌풍이 휘몰아쳤다.

파앙-!

소림사의 영역에 들어왔음에도 무승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교도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입구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선승들이 난데없이 불어오는 광풍에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설화의 움직임을 시야에 담기란 불가능했다.

잠시 후 둘의 신형이 소림사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대웅보전(大雄寶殿)에 이르렀다.

콰앙-!

두꺼운 나무문이 떨어져 나가며, 파계승이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금가사를 입은 부처가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거대한 와불상이었다.

“부처 형아, 나 좀 도와줘!”

파계승은 부처의 뒤로 숨어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나이가 일 갑자를 넘긴 노승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황당하기만 했다.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추잡한 짓 하지 말고 곱게 죽어.”

설화의 오른손을 감싼 검은 기류가 화르륵 타올랐다. 그것은 곧이어 사나운 용의 형상으로 변모해갔다.

흑룡신장 팔 초식 흑룡강천(黑龍强踐). 위력으로만 따지자면 그녀의 무공 중 가장 고강한 초식이었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서 쏘아진 흑룡이 와불상을 향해 나아가며 아가리를 벌렸다.

부처와 파계승을 동시에 박살 내기 위함이었다.

꽈아아앙-!

거대한 종이 두 쪽으로 쪼개지면 이런 소리가 날까?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와불상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소림의 승려들이 보면 기절할 노릇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갈라진 와불상의 틈새를 비집고 흑룡의 이빨이 파계승의 어깨를 물었다.

콰직-!

파계승은 어깨에 피를 흘리면서도 뭐가 좋은지 실실거렸다.

“히힛! 안 아프다! 하나도 안 아프다!”

이미 설화도 눈치채고 있었다. 초식이 적중하는 순간, 상대의 전신에서 황금빛 기류가 발출되었다가 사라진 것을.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소림의 상승무공인 금강지기(金剛之氣)였다.

“제법인데? 그럼 이제부터 정말 아프게 해줄게.”

파계승은 설화가 뽑아낸 두 개의 대침을 보고 기겁했다.

“침 싫어! 나 집에 갈 거야!”

말이 끝남과 무섭게 그의 신형이 대웅보전의 지붕 위를 향해 날아올랐다.

콰앙-!

전각에 구멍이 뚫리며 부서진 나무잔해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물론 그녀의 몸에 닿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추격을 개시하려던 설화는 돌연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흥미를 자극하는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쪽으로 갈라진 와불상의 사이로 드러난 얇은 서책 한 권.

“뭐지?”

부처상에 숨겨놓은 서책이라니.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장을 펼쳐보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의 법명은 혜가다.』

불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명이었다. 마교 출신인 그녀조차도 말이다.

달마의 뒤를 이은 불가의 이대 조사였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다음 글귀를 읽어보았다.

『나는 스스로 한쪽 팔을 자르고 나서야 달마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나의 일생은 그와 함께하였고, 그에게 이어받은 불가의 절학을 이곳에 남기고자 한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무공서적이었단 말인가? 근데 그걸 왜 이곳에 보관했지?’

그녀의 의문은 다음 글귀에서 바로 해소되었다.

『달마께서는 세상이 혼탁해지고 위기가 절정에 이르는 날, 와불상이 깨진다 하였다. 인연이 닿는 자가 이곳에 안배해 둔 여래신장을 익히게 될 것이다.』

여래신장(如來神掌). 실존 여부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절세 무공이 아니던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최강의 장법이었다.

『여래신장 앞에서는 그 어떠한 악(惡)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불가의 정순한 내공으로만 익힐 수 있으며, 순백(純白)의 마음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무공을 펼칠 수가 없다.』

뒷부분은 이렇다 할 흥미로운 내용이 없었다. 뒷장부터는 아홉 초식의 구결이 남겨져 있었다.

‘불가의 내공과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의 마음이라…….’

불가의 내공은 고승의 수행이 담긴 불사리를 복용한다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순백의 마음이었다.

설화는 자신이 인연의 주인이 아니란 것을 단번에 직감했다. 그렇다고 땡중들한테 돌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일단 챙겨가야겠어. 어딘가 쓸 데가 있겠지.’

그녀는 여래신장의 비급을 둘둘 말아 소매에 갈무리했다.

어느새 파계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덕분에 얻은 수확이 상당했기에 용서받을 자격이 있었다.

대웅보전의 전각 위에 뛰어오른 설화는 은밀히 사찰 밖으로 빠져나왔다.

곧 있으면 승려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질 터.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퇴각 장소인 삼황채로 향했다.

* * *

숭산의 서쪽 진입로에서부터 남쪽으로 십 리가 떨어진 언덕.

삼백여 명의 무림인이 진을 치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진 장로가 소무에게 다가가 물었다.

“우리도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늘을 바라보자 석양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미동조차 없던 소무가 오른손을 서서히 펼쳤다.

“그리하시지요.”

찌이이잉-!

갑주의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이 검명(劍鳴)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진동하던 검이 스스로 검집에서 뽑혀 나오며 소무의 손아귀로 움켜쥐어졌다.

“선두에 서시면 저희가 뒤따르겠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무림맹의 무인들이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 배 이상으로 많은 적과 맞서 싸운다니 그럴 수밖에. 이 정도의 차이라면 설사 우세를 점하더라도 내공이 먼저 고갈되어 쓰러질 터였다.

그러나 이번 싸움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다.

“버티는 것이 목적이니 무리할 필요 없소. 먼저 출발할 테니, 반시진 후에 합류하십시오.”

소무 혼자서 수천 명의 마교도에 맞서 반시진을 버텨준다는 얘기였다.

무림의 싸움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 나는 게 일반적이다. 무림인들의 기준에서 반시진이란 영겁과도 같았다.

지켜보던 정명 방장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어찌 장군을 혼자 지옥 불로 보내겠습니까. 사문의 일이니 소승도 함께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적들의 사기를 조금이라도 내려놓기 위함이오니, 그냥 지켜보십시오.”

이대로 양측이 맞붙는다면 아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다.

신마교의 고수들이 파악되지 않았기에 홀로 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소나라의 제일고수가 자진해서 나서준다니 무림맹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명 방장이 양손을 모으며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부디 조심하십시오.”

소무는 무림맹의 무사들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앞으로 나아갔다.

적국의 영토에서 대장군의 갑주를 입고 홀로 터벅터벅 걷는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정파의 무림인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신형은 십여 장씩 멀어져갔다.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경공. 그리고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은 웅장한 기세는 아군의 사기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입구를 수십 겹으로 포위한 마교도들. 잠시 후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졌다.

“저놈 뭐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소무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길목은 물론이거니와 근처의 숲과 나무 위까지 마교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복장 또한 위치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아무래도 여러 무력단체가 죄다 소집된 모양이었다. 흡사 정마대전에서나 볼법한 규모였다.

그러나 소무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현재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마디가 토해져 나왔다.

“너희들 또한 타인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 오늘 죽더라도 억울해하지 말 거라.”

대다수의 마교도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실성한 미친놈이 검을 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지가 높은 대주급의 마인들은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걸음걸이서조차 느껴지는 정제된 움직임. 그런데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최소한 반박귀진을 이룬 자임을 뜻한다.

물론 반박귀진을 이룬 자는 이곳에도 여러 명이 있다.

문제는 그가 단신으로 접근해오고 있음에도 위축되지 않는 것이었다. 믿는 구석이 없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마교 진영의 중심부에서 적룡포를 입은 노인이 누군가를 지목했다.

“죽여.”

얼굴에 기이한 문양이 잔뜩 새겨진 마인이 그의 앞으로 나섰다.

“존명!”

지목당한 마인은 검을 뽑아 들며 소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 명령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기세였다.

최소한 일류고수의 수준이었으나, 소무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둘의 거리가 일 장으로 좁혀지는 순간, 눈부신 섬광이 번뜩였다가 사그라졌다.

써커컥-!

무엇인가가 토막 나는 소리였다. 동시에 소무의 등 뒤로 혈우(血雨)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둑-!

대다수의 마교도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움직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정에 이른 마인들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무엇인가 충격적인 것을 보았다는 듯 입을 서서히 벌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소무의 검은 십여 번이나 움직였고, 그것을 제대로 확인한 자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청색 경장을 입은 중년인이 적룡포를 입은 노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대호법님, 그놈입니다.”

“알고 있다.”

“현경(玄境)을 상대하려면 육(六) 장로가 모두 나서야 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적룡포의 마인은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으니, 견마대(犬魔隊)를 내보내거라.”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소무의 체력을 먼저 소진시킬 요량이었다.

청색 경장의 마인이 누군가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견마대주 양호. 본교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주겠다.”

“존명!”

견마대주의 등 뒤로 월도를 움켜쥔 백여 명의 마인들이 몰려들었다.

두 눈이 풀려있는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들은 동시에 품속에서 검은 환단을 꺼내고는 꿀꺽 삼켰다. 그러자 입과 코에서 유백색의 분비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에는 짐승처럼 기괴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흐흐흐.”

“크흐흐흑.”

그들의 정면에 우뚝 선 소무는 무표정한 얼굴로 환단의 효능을 관찰하고 있었다.

복용자의 생명과 정신을 갉아먹지만, 잠시나마 신체 능력을 각성시켜주는 환약이 분명했다.

흥미를 잃은 소무는 검 끝을 내리깔며 나직이 말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준비됐으면 빨리들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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