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누가 보물을 가져갔는가 (2)
(217/250)
217화 누가 보물을 가져갔는가 (2)
(217/250)
217화 누가 보물을 가져갔는가 (2)
2022.09.05.
숭산의 남쪽 봉우리 삼황채. 이곳의 절벽 아래로는 다섯 개의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승려들이 차례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속도가 너무 느렸다. 무엇보다 무공이 약한 선승들이 겁을 먹고 움찔거리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약속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려가지 못한 승려들이 오백여 명에 육박했다.
“빨리들 서둘러요!”
랑아대원들이 승려들을 재촉했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팔짱을 끼고 탈출행렬을 지켜보던 연설화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미쳐버리겠네.”
설상가상으로 후미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짐작이 되는 상황이었다.
곧이어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큰일 났습니다! 뒤쪽에 마교도들이 쫓아왔습니다!”
승려들은 물론이고 랑아대원들까지 당황하며 술렁였다.
퇴로를 확보한답시고 사대금강을 포함한 대다수의 무승들은 먼저 내려간 상황이었다. 이곳에는 맞서 싸울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았다.
“저희가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사대금강과 함께 소림사의 수호신으로 일컬어지는 십팔나한이었다.
그들은 오른손으로 합장을 하고는, 뒤돌아서 소림사가 있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십팔나한이 펼치는 나한진은 화경급도 대적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설화의 생각은 달랐다.
‘쟤들만으로는 일각도 못 버틸 텐데.’
남아있는 자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청해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어떡하죠, 누님?”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승려들이 등에 메고 있는 보따리들이었다.
“저것들부터 다 벗겨와.”
“예……?”
“시간 없으니까 빨리.”
무엇인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랑아대원들이 승려들의 보따리를 요구하자 당황한 승려들이 거부했다.
“이 물품은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하는 것들입니다.”
“손대지 마시오!”
입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설화의 신형이 한줄기 그림자로 변하며 승려들의 사이를 후벼팠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움켜쥔 보따리들은 내용물을 하나둘씩 토해내기 시작했다.
투둑-! 투두두둑-!
대다수에는 불상과 불경 등이 담겨 있었다.
하나같이 진귀한 것들이었지만, 설화가 원하는 것은 내용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보자기들을 하늘로 휙 던져버렸다.
황금빛 보자기들이 하늘을 덮을 듯 넓게 펼쳐지는 순간, 소매에서 여덟 개의 바늘이 솟구쳐 올랐다.
푸욱-! 푸푸푸푹-!
실이 매달린 바늘들은 보자기들의 사이에 엉겨 붙는가 싶더니, 이내 보자기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었다.
허공에서 바느질이라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승려들과 랑아대원들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설화는 순식간에 완성된 보자기를 청해에게 휙 던졌다.
“내려가서 펼치고 있어. 위에서 던질 테니까.”
랑아대원 중 절반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밧줄을 움켜쥐고 재빨리 하강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밑에서 청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됐습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승려들이 뒷걸음질 쳤다. 까마득한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니. 밑에서 받아준다고 한들, 조금도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봐줄 설화가 아니었다. 탈출이 늦어질수록 소무가 위험해질 터.
“뭣들 해. 빨리 던져.”
승려 중 한 명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하시는 것 아니오? 이 마두가 우리를 다 죽이려고 작정한 모양…….”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설화가 그의 가사를 움켜쥐고 절벽 아래로 휙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잠시 후, 예민한 그녀의 청각은 승려가 푹신하게 안착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록 보자기는 크지 않았지만, 랑아대원들의 몸놀림은 대충 던져도 안전하게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설화가 신호를 보내자 대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승려들을 하나둘씩 던져댔다.
“소승 이제 부처님 곁으로 갑니…… 다아아아악!!!”
“나무아미…… 타람 살려!!!”
이쯤 되자 그동안 겁을 먹고 망설였던 선승들이 하나둘씩 밧줄을 잡기 시작했다.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고 있었다.
문제는 승려들이 모두 내려가기 전까지 십팔나한이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좀 더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고수는 이곳에서 한 명밖에는 없었다.
“너희들도 모두 내려가 있어.”
백부장 현정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누님?”
“괜히 따라올 생각하지 말고, 내가 늦어지면 먼저 출발해.”
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 나아갔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자 산길을 틀어막은 나한들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그들은 수세에 내몰려 있었다.
나한진은 언제라도 깨질 듯 위태롭기만 했다. 이미 세 명이 쓰러져 구멍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위를 백여 명의 마인이 정신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개개인의 실력은 나한들이 월등히 앞섰지만, 마인들 사이에 껴있는 한 명의 극마가 문제였다.
콰앙-! 쾅-! 콰쾅-!
“크악!”
또 한 명의 나한이 대호법의 장법에 맞고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진법이 뒤흔들리며, 나한들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갑자기 나한진을 압박하던 마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크악!”
“컥!”
“누, 누구야?”
언덕 위에서 수십 개의 비침이 날아들며 마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단 한 수에 이십여 명이 쓰러지고야 말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마인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들의 틈새로 파고 들어간 설화는 흑룡신장을 펼쳐대며 하나둘씩 때려잡기 시작했다.
쩌억-! 쩌적-!
그녀의 손바닥에 적중당한 마인은 누구든 즉사였다.
목뼈가 꺾이며,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것은 물론 해당 부위가 검게 타들어 갔다.
지원군의 등장에 힘을 얻은 나한들은 진법이 깨지지 않도록 다시 보법을 밟았다. 반대로 부하들을 이끌고 소림사를 기습한 대호법은 짜증이 솟구쳤다.
“네X은 누구냐?”
적룡포를 입은 노인은 부하들을 때려잡는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로의 손바닥이 마주치자 무지막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꽈앙-!
두 걸음씩 물러난 그들은 자석처럼 다시 맞붙으며 장법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콰앙-! 콰쾅-!! 콰콰쾅-!!!
대호법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같은 극마라 할지라도 엄연히 등급이 다른 법이다. 교단의 모든 장로를 꺾고 대호법의 위치에 오른 자신이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삼십여 합을 주고받은 그들은 거리를 벌리며 호흡을 골랐다.
“얻다 대고 X이래? 혀를 뽑아버릴까.”
“입이 더러운 것을 보니, 네가 바로 옥화신녀로구나.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으니 오히려 잘되었다.”
상대가 누구든 말싸움에서 밀릴 그녀가 아니었다.
“더럽게 생긴 노인네가 입만 살았네. 주제도 파악 못 하고.”
대호법의 양손이 붉은 기류를 내뿜으며 타올랐다. 응축되는 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중원의 무공과는 다른 성질 같았기에, 설화도 은연중 긴장하며 필살의 초식을 준비했다.
한쪽에서는 나한들과 마인들이 양쪽으로 물러서서 둘의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대호법과 연설화가 서로를 노려보며 틈을 찾고 있을 때였다.
돌연 이곳으로 난입해오는 또 한 명이 있었다. 우측의 봉우리를 기이한 신법으로 타고 넘는 무승이었다.
“내 보물 내놔!”
모두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
혼란을 틈타 소림을 난장판으로 휘젓고 다닌 파계승이었다.
신마교의 마인들은 어리둥절하였고, 나한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파계승은 곧장 설화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 보물 어디 있어?”
설화는 단번에 눈치챘다. 눈앞의 파계승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그사이 또 무엇을 처먹고 온 것인가.
확실한 건 파계승의 행보에 따라 전체적인 결과가 엇갈릴 터였다.
그녀는 검지를 내뻗어 대호법을 가리켰다.
“돌려주고 싶은데 저놈이 뺏어갔어. 어서 저 노인네의 옷을 벗겨봐.”
“나쁜 할배, 당장 내 보물 돌려줘!”
파계승은 다짜고짜 대호법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무어라 반문하려 했지만,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대호법을 압박해가는 파계승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휩싸이자, 지켜보던 나한들이 몹시 놀랐다.
“금강지기(金剛之氣)?”
소림의 방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언제 훔쳐 배웠단 말인가.
나한들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설화가 재빨리 다가와 말했다.
“이곳은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은 먼저들 내려가.”
“…….”
나한들이 머뭇거리자 설화가 미간을 좁혔다.
“왜? 마인한테 빚지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빨리 결정해. 남겠다면 너희들이 당하고 있을 때 나는 도망칠 거니까.”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 승려들이 죽든 말든 관심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얻은 것들이 많았기에 조금은 보답해줘야 속이 개운할 것 같았다. 그녀는 받은 걸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나한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다는데 아쉬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 조심하십시오.”
대호법의 부하들은 나한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설화를 돌파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호법과 파계승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시간이 갈수록 파계승이 불리해지며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이, 미친 땡중. 내가 도와줄까?”
힘들게 맞서 싸우던 파계승은 연신 뒷걸음질 치며 다급히 소리쳤다.
“도와줘! 그럼 보물 하나 줄게!”
분위기를 눈치챈 대호법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이 대 일로는 조금도 승산이 없었다.
설화가 합류하기 전에 끝장을 보려는 것일까? 그의 공세가 갑자기 거세졌다.
송곳처럼 변한 붉은 빛 기류가 전면을 향해 끊임없이 쏟아졌다.
“아악! 아파!”
파계승의 입가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황금빛 기류에 휩싸인 채 정신없이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내버려둘 연설화가 아니었다.
그녀의 신형이 섬전처럼 움직이며 대호법의 측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백옥처럼 고운 섬섬옥수가 사나운 흑룡을 연달아 토해냈다.
쩌엉-! 쩌저적-!
대호법은 혼비백산했다. 설화의 흑룡신장(黑龍神掌)과 파계승이 펼치는 대력삼십팔장(大力三十八掌)의 조합은 상상 이상으로 훌륭했다.
“큭! 비겁한…….”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조금씩 자세가 무너지는 대호법은 퇴로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설화는 은근슬쩍 그의 방위를 차단하며 소리쳤다.
“땡중아, 이놈 못 도망치게 막아!”
“알았어, 누나!”
어이없게도 설화와 파계승은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다급해진 대호법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끄윽! 멸마대는 당장 이 연놈들을 공격하라!”
“존명!”
지금 상황에서 부하들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희생함으로써 퇴로를 확보하는 것은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대호법의 부하들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보였다.
“감히!”
벼락처럼 움직이는 설화의 두 손은 마화비전(魔花飛電)을 연달아 펼쳐냈다.
허공을 가득 메운 비침이 또다시 마인들을 휩쓸며 이십여 명을 쓰러트렸다.
푹-! 푸푸푹-!
그러나 아직도 오십여 명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인들이었다.
파계승과 설화의 시선이 잠시 분산된 사이, 대호법은 사력을 다해 탈출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