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선음지체와 진일심소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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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선음지체와 진일심소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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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선음지체와 진일심소곡 (2)
2022.09.10.
아침부터 시작된 논의는 점심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장양의 집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소무는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유익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 진유소는 행정적으로 재능이 뛰어나 장양을 보좌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경쟁자의 유능한 모습에 시기심이 생길 만도 했건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행이군.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
목표가 달성되면 관직을 내려놓고 떠날 생각이었다.
한중성의 모병소에 지원한 순간부터 그리하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무심히 길을 걷던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은퇴 이후의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딱히 뭘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어디 공기 좋은 곳에서 농사라도 지어볼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가족들과 함께라면 뭐든지 좋았다. 상상을 해보던 소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우리 소소는 앞날이 창창하니 세상 구경을 더 해야겠지.’
아직 날개도 피우지 못한 딸에게 은퇴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길가에서 마주친 인물은 백약 부장이었다.
그의 옆에는 자녀들인 백상과 백아가 보였다. 가족끼리 궁성에서 산책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하체를 구부리고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소소 친구들이구나.”
“안녕하세요, 아저씨~”
공손히 인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귀여웠기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소무는 품속에서 작은 엽전 꾸러미를 꺼내어 백상에게 건네었다.
“아버지한테 주지 말고, 동생하고 같이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헤헤. 고맙습니다~”
백약 부장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하나밖에 없는 팔로 포권했다.
“어이쿠, 뭘 이런 걸 다 챙겨주시고…….”
“신경 쓸 것 없네. 출진하기 전에 아이들과 많이 놀아주시게. 별일이야 없겠지만, 추억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후후. 알겠습니다, 장군. 추밀원에 가시는 길이시죠?”
“아니. 급한 일이 모두 해결되었으니, 나도 자네처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네.”
백약 부장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추밀원 입구에 손님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던데, 알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전에 약속된 일정이 없었다. 자신이 장안성에 도착한 날짜에 맞춰서 찾아올 정도면 정보력이 빠른 자일 터.
짐작되는 인물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여 되물어보았다.
“손님이라니?”
“개방에서 온 사람이던데요. 허리춤에 매듭이 여섯 개나 있었습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십중팔구 총타주 허규이리라.
대장군이 된 이후로는 서로가 일에 치여 살았기에 그간 만날 수가 없었다.
어서 가서 모처럼 찾아온 지인을 만나고 싶어졌다.
“내가 가서 만나보지. 출진하기 전까진 특별한 일이 없을 테니, 푹 쉬어 두시게.”
“예, 장군. 그럼 살펴 가십시오.”
추밀원은 군의 장교들이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으로 궁성의 외곽에 있다.
일각이 지나 그곳에 도착하자, 상거지 한 명이 입구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소무는 자신의 막역지우를 부르며 다가갔다.
“개방의 총타주가 한가한가 보군. 남의 일터 앞에서 먼 산이나 바라보고 있고 말이야.”
고개를 돌린 허규는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달려왔다.
“허허, 이 친구야!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밥은?”
“자네가 사줘야지. 대장군이 되었으니 녹봉도 많이 올랐을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 대놓고 자신에게 밥을 사라고 조르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좀 걷지. 근처에 내가 괜찮은 곳을 알고 있어.”
추밀원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곳의 노점 식당으로 향했다.
섬서의 식습관은 예로부터 아침과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점심은 대강 간식으로 때우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이 두 명이 노점 식당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이들은 생선구이와 소면 두 그릇을 주문했다.
잠시 후 조리시간이 짧은 소면이 먼저 준비되어 나오자, 소무가 젓가락을 움켜쥐었다.
“어서 먹어 봐. 이 집 소면 맛이 괜찮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규는 이미 육수를 흡입하고 있었다.
한껏 들이켠 이후에 소매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크윽~ 정말 훌륭해!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육수 중 두 번째로 최고일세.”
“그럼 첫 번째는 어느 가게의 무슨 육수인가?”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허규는 진지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천하제일 육수는 말일세. 소호객잔의 주인장이 만든 고기국수의 육수일세.”
소무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자신이 전에 만들어준 고기국수의 육수를 맛있게 아껴 먹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더니 장난만 늘었군. 그런데 오늘은 무슨 볼일로 왔어?”
“내가 꼭 볼일이 있어야만 찾아와야 하는가. 오늘은 정말 친구가 보고 싶어서 왔네.”
“별일이 다 있군. 요즘 무림맹도 출진 준비로 바쁜 시기가 아닌가?”
허규는 입안의 국수를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보다 더 윗선들이 바쁘겠지. 출진보다 더 중요한 일이 논의되고 있으니.”
허규보다 윗선이라면 각파의 장로들과 문주급 정도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림사를 구해준 것으로, 무림맹의 내부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으로 아는데?”
허규는 혹시라도 엿듣는 인물이 없는지 좌우를 살펴보았다. 이미 소무가 기막(氣膜)을 둘렀음을 알고 있음에도, 재차 조심해야 할 만큼 중요한 내부 정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무림을 이끌 지존을 육성하기 위해 무림대회를 열기로 했었네. 자질이 가장 뛰어난 최고의 후기지수 한 명에게 각파의 비기를 몰아주기 위해서였지.”
“괴물이라도 만들 생각인가 보군. 뭐 충분히 이해는 해. 무림의 힘이 너무 약해져 있으니 뭐라도 해야겠지. 그런데?”
“다들 마음이 급해. 이번 전쟁이 끝나면 무림의 힘은 더 약해질 거고, 벌써부터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말일세.”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주문한 생선구이가 나왔다.
소무는 접시를 허규의 앞으로 쓱 밀어내며 물었다.
“우리 소나라는 무림을 부정하지 않고, 공존하겠다고 공식화했을 텐데?”
“뭐 다들 닳고 닳아서 의심만 가득한 능구렁이들이 아닌가. 게다가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이고. 아무튼, 내년에 열리기로 했던 비무대회를 조기에 끝내기로 결론이 났네.”
“출진을 앞두고 비무대회를 연다고?”
허규는 생선 한 마리를 집어 한입에 털어 넣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한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그가 생선 뼈를 훅 뱉어내자 소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개방의 식문화가 이런 걸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무대회는 열리지 않게 되었네. 한 명의 어린 후기지수로 인해 다른 문파에서 모두 기권을 했기 때문이지.”
“자존심이 강한 각파에서 싸우지도 않고 기권을 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아미파의 후기지수 중에 화경의 벽을 허문 아이가 나왔기 때문이네. 어차피 싸워봐야 승산도 없고, 애꿎은 애제자만 다칠 것이 아니겠는가.”
그 순간 소무는 아미파의 장문인인 금정사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살성(天殺星)을 타고난 비구니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아이인가 보군. 살심(殺心)은 충분히 눌러줬겠지?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각파의 절기를 전수하면 세상에 재앙이 닥칠 수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미파의 장문인이 보증했네. 자신의 목까지 걸겠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금정사태가 그리 말했다면 뭔가 생각이 있겠지. 그나저나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는데, 자질이 굉장한가 보군.”
“어디 자질뿐이겠는가. 지독하기도 따를 자가 없네. 일 년 가까이 폐관수련을 하는 동안 동굴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네.”
허규의 말이 사실이라면 명실상부 정파무림의 기둥은 이제 아미파가 될 터였다.
그러나 소무는 무림의 일에는 이제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약조대로 우리 군부는 무림의 일에는 간섭할 생각이 없어. 백성들에게 무분별한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어쨌거나 그 일 때문에 이번 출진 준비에 차질이 있다는 건가?”
“군부에서 요청한 전력을 맞추는 것은 문제없을 걸세. 다만 각파의 절대고수 중 일부는 참여하지 못하겠지. 아미파의 아이에게 무공을 전수하고, 집중적으로 훈련을 지도해야 할 테니.”
“그 정도라면 문제없어. 근데 이런 내부 정보를 나한테 알려줘도 되나?”
허규는 털털한 웃음과 함께 다시 생선 한 마리를 집었다.
“이 친구야, 섭섭하게 무슨 말인가.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었어?”
소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껏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도 괜찮아.”
“흐흐. 다른 건 몰라도 음식이라면 절대 사양하지 않겠네.”
모처럼 만난 둘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차도 한 잔 마시며 두 시진 가량을 함께했다.
“꺼억! 잘 먹었다! 나중에 총타에 찾아오면 개방의 음식을 한번 대접하지.”
그리 유쾌한 제안은 아니었다. 개방의 음식이라고 해봐야 구걸해온 밥들일 테니.
“대장군이 어찌 거지들 걸 뺏어 먹겠나. 어서 들어가.”
포만감이 가득해진 허규는 기분이 좋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큭큭. 농담일세. 그럼 나중에 보세.”
그와 헤어진 소무는 시장에 들러 생닭 몇 마리를 구입했다. 저녁에 같이 닭을 고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녀가 양주산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산으로 오르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맑은 공기를 들이켜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그의 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어디선가 영혼을 현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률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합주곡을 익힐 수 있게 된 것인가?’
신선들이 남기고 간 합주곡이라 알려진 진일심소곡(眞一心笑曲)이 분명했다.
대환단을 복용한 소소가 악보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률에 심취한 소무는 경공을 멈추고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일각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흐름이 인위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뭐지?’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는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리움, 슬픔, 기쁨, 분노와 같은 온갖 감정이 뒤섞이며 가슴을 울려댔다.
이 합주곡이 내공이 약한 자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새와 산짐승까지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이 합주곡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인지, 완성되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소무는 적지 않게 놀랐다.
“……이럴 수가.”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는 소무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예외였다. 오두막에 마주 앉아 있는 아내와 딸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무아지경에 빠져있는지 자신이 온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그의 시선을 이끈 것은 퉁소를 움켜쥔 딸의 모습이었다. 소소의 전신을 눈부시도록 찬란한 황금빛 휘광이 휘감고 있었다.
자신도 겪어보았고, 지켜본 적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화경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무릎 위에 칠현금을 올려둔 채 쉴 새 없이 연주하는 아내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녀의 신체에 존재하는 모든 모공이 검은 기류를 뿜어내며 용솟음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무는 지금 아내에게 벌어지는 현상을 단번에 눈치챘다. 마(魔)의 기운을 완전히 벗어버리며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고 있는 것임을.
“탈마(脫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