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선음지체와 진일심소곡 (3) (223/250)


223화 선음지체와 진일심소곡 (3)
2022.09.11.


‘음악에서 깨달음을 얻다니. 역시나 선음지체(仙音之體)들이란 말인가…….’

신선의 오감을 타고났다는 특이체질의 모녀가 전설의 악보를 연주하며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고 있다니. 경이로운 광경에 소무는 한참을 미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은화파파가 이 합주곡을 완성하고자 평생을 바쳤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선음지체를 타고난 또 한 명의 고수 은화파파. 비록 노파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습이 기억에 생생했다.

연신 감탄하던 소무는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묵묵히 음악을 감상했다.

경지의 벽을 허무는 과정이 외부의 방해를 받으면 자칫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누구의 접근도 허락할 수 없도록 호법을 설 요량이었다.

하나처럼 뒤섞인 퉁소와 칠현금의 음률을 만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수십 번, 그리고 수백 번. 같은 음악이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었으나,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마치 영겁의 굴레에 갇힌 듯 모녀의 연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합주와 함께 아주 천천히 신체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초인의 반열에 접어든 아내는 걱정이 없었지만, 소소가 걱정이었다. 이토록 어린 나이에 화경에 이르는 경우는 역사상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부작용은 없을까 노심초사하던 소무는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모녀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후.”

아무리 현경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지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합주를 하고 있다니.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저 둘은 아마도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으리라.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어느 순간 가부좌를 튼 설화의 몸이 한 치 가량이나 붕 떠올랐다.

‘드디어 끝이 왔구나.’

변화의 마지막 단계였다.

뒤이어 소소의 전신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전신을 감싸고 있던 눈부신 휘광이 몸속으로 증발하듯 스며들었다.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합주가 멈추었다.

“아버지, 언제 왔어요?”

퉁소를 움켜쥔 소소가 두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갈무리된 안광과 심연처럼 고요한 눈동자.

소무는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음을 확신했다.

화경(化境). 절대자의 경지를 고작 아홉 살의 나이에 도달한 것이다.

“사흘 전에 왔어.”

“히히, 거짓말이죠?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소무는 아이의 앞머리를 흩트리며 웃어 보였다.

“후후, 이 녀석. 아버지 말을 못 믿는구나.”

“정말인데……. 아버지, 근데 나 지금 뭐가 이상해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고, 들을 수 없던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상할 수밖에.

어디 그뿐인가. 바람처럼 가벼워진 신체의 무게는 하늘이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터였다.

발을 몇 번 구르던 소소는 갑자기 어디론가 쌩하고 달렸다.

파앙-!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후다닥 달려나가는 딸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사흘이나 되었다고?”

소무는 적잖게 당황했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설화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결코 극마 수준에서 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존에도 젊음을 유지했던 외모였지만, 지금은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백옥보다 고운 피부와 더는 완벽할 수 없는 신체의 굴곡까지. 마치 절세미인의 위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응, 기분이 좀 어때?”

별로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전부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단지 오른손을 옆으로 내뻗을 뿐이었다. 그러자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붕 떠올랐다. 건장한 어른 열 명이 달라붙어도 들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접었다 펴자 날카로운 묵빛의 기류들이 바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푹-! 푸푹-!!

바위를 관통하고 빠져나온 묵빛 기류는 뱀처럼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난 뒤에는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져 버렸다.

콰콰콰쾅-!!!

설화는 흩날리는 먼지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나쁘지 않네.”

“별로 기뻐하는 얼굴은 아닌데?”

그녀는 팔짱을 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탈마에 접어들었다고 한들 내게는 의미 없어. 이미 강호에서 은퇴한 아줌마잖아.”

“무슨 소리야. 이렇게 예쁜 아줌마 본 적 있어?”

칭찬은 짐승도 춤을 추게 하는 법이다. 설화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옅게 서렸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설화는 고개를 돌려 우측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양주산을 한 바퀴 돌고 온 소소가 보였다. 등을 돌린 채 밤톨 같은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순간 소무와 설화는 딸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됐어.”

궁금해진 소무가 은근슬쩍 다가가 물었다.

“뭐가 돼?”

“일광 삼촌하고 다시 대련할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삼촌들과의 대련을 놀이로 삼아왔던 아이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일광이 목표인 듯했다.

앞으로 조카 때문에 곤욕을 치를 일광을 생각하자 걱정부터 앞섰다.

“삼촌들 괴롭히면 안 돼.”

소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을 돌려 작은 손으로 아버지의 허리춤을 붙잡고 흔들었다.

“배고파요~ 빨리 맛있는 거 해주세요, 아버지!”

그러고 보니 함께 닭을 고아 먹기로 하지 않았던가.

산에 올라올 때 사온 닭은 이미 쉰내가 가득했다. 그것을 확인한 소소는 순식간에 울상을 지었다.

“힝. 내 닭 어떡해…….”

어느새 다가온 설화가 뒤에서 소소의 어깨를 보듬으며 말했다.

“다롱이한테 산짐승이라도 잡아 오라고 시키는 게 좋겠구나.”

사흘간 마당에서 굶주려 있을 산군도 뭔가를 먹여야 했다.

얼굴이 밝아진 소소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장안성의 성벽,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집의 마당이었다.

호흡을 짧게 한 번 들이켠 소소는 기성을 토해냈다.

“다롱아!!!”

쩌렁쩌렁한 목청은 양주산을 통째로 진동시킬 정도였다.

일반적인 호랑이의 청각 능력은 사람의 열 배에 이른다. 산군의 청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비록 목줄이 걸려 있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끊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

침묵 속에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산 아래 어디선가 산군의 응답이 들려왔다.

크르릉-!

산왕(山王)의 울부짖음에 산새들이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난 뒤. 드디어 기다렸던 산군이 당도했다. 혓바닥을 빼고 헥헥거리는 모습을 보니 전력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산군에게 다가간 소소는, 자신의 얼굴보다 큰 귀를 들어 올리고 속삭였다.

“다롱아, 나 배고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군이 네발을 박찼다.

타앗-!

거대한 범은 불과 한 호흡도 안 되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거 빨리 준비해야겠군.”

무엇을 사냥해오든 넉넉잡아 반각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소무와 소소는 땔감을 모아 불을 지폈으며, 설화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다시 반 시진이 흐른 뒤.

모닥불 앞에 세 가족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노루 고기가 꽂힌 꼬치를 하나씩 들고 있었고, 산군은 뒤쪽에 엎드려서 남은 사체를 물어뜯고 있었다.

다소곳이 앉은 설화가 움켜쥔 꼬치를 소소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는 자동으로 벌어지는 아이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며 소무에게 물었다.

“언제 출진한다고?”

“내일 작전 회의를 마치고 바로 떠나야 할 거야.”

“그렇게 빨리?”

소무는 꼬치를 돌려대며 피식 웃었다.

“이미 이곳에 온 지 사흘이 지났어. 목표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최대한 빨리 결판을 봐야겠지.”

그때 소소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어디 가요?”

고기를 입에 한가득 문 채 두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앙증맞은 입술에서는 육즙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르는 것을 보니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세상에는 배고프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단다.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가는 거야.”

입안의 음식을 꿀꺽 삼킨 소소는 입을 삐쭉대며 중얼거렸다.

“소소도 슬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소무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란다. 언젠가 아버지도 군을 떠나게 될 거란다. 그럼 그때는 누가 세상을 지키지?”

“내가요…….”

당연하다는 듯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이었다.

소무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우리 소소는 그때를 위해서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해야지. 엄마를 혼자 여기 버려두고 아버지 따라가고 싶어?”

소무와 소소의 시선이 동시에 설화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잠시 당황하더니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어찌 버리고 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요.”

얼굴이 밝아진 설화가 한 손으로 소소의 등을 감싸 안았다.

“우리 소소가 아버지보다 낫구나.”

“히히.”

“아버지랑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다롱이 데리고 산책 좀 하고 올래?”

“네, 알았어요!”

벌떡 일어선 소소는 산군의 등에 올라타서는 쌩하고 사라졌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설화가 꼬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완안후이라고 했나? 휘나라 대장군 녀석도 현경이라며.”

“응.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 놈을 끝장내야 해. 그래야 황제를 끌어낼 수 있어.”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탈마의 존재는 전략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단신으로 군단급의 전투력을 지닌 존재였다.

굉장한 지원군이 될 터였지만, 소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비게 된 자국의 방어를 위해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탈마가 된 그녀의 존재를 이렇게 쉽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마지막 무기로 남겨두어야 했다.

“걱정할 것 없어. 놈과는 이미 몇 번 겨뤄본 적이 있으니까.”

양양성에서 한 번. 그리고 낙양성에서도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검성의 성명절기인 탈혼검법의 절초까지 막힌 상대였다.

상대가 절초를 알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불리한 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반년간의 폐관 수련으로 새롭게 터득한 파천검법(破天劍法). 총 삼 초식으로 구성된 필살의 검법이 있지 않은가. 아직 실전에서는 펼쳐본 적이 없었지만, 자신이 있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마음 바뀌면 말해.”

“괜찮으니, 소소나 잘 돌봐줘. 그동안 여기 있을 거지?”

설화가 손을 뻗자 구석에 놓인 칠현금이 사뿐히 날아올랐다.

이어서 무릎 위에 올려진 악기의 현을 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합주의 완성이 거의 끝자락에 왔어. 그동안 소소와 함께 이곳에서 진일심소곡에 담긴 비밀을 풀어보려고.”

“음. 근데 그 악보 정말 괜찮은 걸까? 사흘간 듣고 있었는데, 그렇게 단순한 곡이 아닌 것 같아.”

걱정스러워하는 소무의 얼굴에 설화는 깔깔 웃었다.

“뭐야? 설마 나하고 소소가 무슨 광인이라도 돼서 세상을 휩쓸까 봐 걱정돼?”

소무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연매나 소소에게 그런 심성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아. 단지 대단한 힘이 느껴져서.”

“그냥 음악일 뿐이니 깊게 생각할 것 없어. 여기까지 와서 멈출 수도 없잖아?”

명곡을 완성하고 싶은 것은 선음지체를 타고난 자들의 본능이었다. 소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내 걱정이 좀 지나쳤군. 이번 전투가 끝나면 완성된 곡을 들어보고 싶어.”

설화의 가냘픈 손가락이 칠현금을 천천히 튕기기 시작했다

청량한 음률이 은은히 풍겨 나오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죽지 말고 꼭 살아서 돌아와. 딸하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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