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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화 꼭 그래야만 했니 (2) (225/250)


225화 꼭 그래야만 했니 (2)
2022.09.13.


가장 바쁜 것은 역시나 랑아대였다.

깃발을 움켜쥔 대원들은 온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진형 배치를 돕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흘이 지나서야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일 수 있었다. 병사들이 진법에 적응하며 통솔하는 것이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야전 막사에 모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힘들어 죽겠다.”

“특히 포나라 녀석들은 훈련이 아주 개판이야. 말귀를 못 알아들어.”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진 거 아니야?”

대원들이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막사의 입구가 걷히며 누군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연합군을 통틀어 가장 탄탄하고 거대한 체구를 지닌 인물. 랑아대의 부대장이자 절제도위 일광이였다.

“다들 수고했어. 이제부터는 너희들은 깃발질 그만해도 된대.”

대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오! 정말이에요?”

“이제 이 짓도 끝이로구나!”

“하하. 이제 됐어!”

일광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대장이 포상으로 너희들에게만 특식을 준비해주셨다. 어서들 나와.”

대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자신들이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뜬금없이 특별대우라니. 평소의 소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대원들은 앞다투어 일광을 따라나섰다.

도착한 곳은 음식이 한가득 차려진 막사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돼지고기였다. 전장에서는 쉽게 볼 수가 없는 음식이었다.

“이게 웬 횡재야?”

“정말 먹어도 되는 거예요?”

이미 족발 하나를 움켜쥔 일광을 보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대원들은 동시에 고기를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몹시 행복한 듯 해맑은 미소를 품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많이들 먹어둬. 오늘부터는 전방에서 특별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얼굴이 굳어진 대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기척도 없이 다가온 소무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거죠.”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소무는 피식 웃으며 한쪽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들 얘기 못 들었나 보군. 최근 정찰을 나간 첨병들이 계속 실종되고 있어. 아마도 휘나라의 특공대(特攻隊)에게 당한 것 같아.”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찰이라 할 수 있다.

정찰 싸움에서 밀리면 답이 없었다. 그리고 휘나라의 특공대를 상대할 수 있는 전투부대는 랑아대가 유일했다.

예상대로 대원들은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이들은 어느새 전투를 즐기고 있었다.

“감히 우리 첨병들을 괴롭혔다는 말이죠?”

“아주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우선 이거부터 먹고요.”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광을 바라봤다.

“혹시 모르니 너도 함께 가는 게 좋겠어.”

“휘나라의 특공대라고 했지? 맡겨둬. 오늘 안으로 전부 찾아서 죽여 놓을 테니까.”

족발을 우악스럽게 뜯으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듬직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식사들 마저 해.”

말을 마친 소무는 흡족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일광과 랑아대가 나선다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지휘 막사였다. 그곳은 진영의 중심부에 자리하며, 가장 크고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다들 군단을 점검하느라 바쁠 시간이었기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사령관의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고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다.’

휘나라에서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존재는 단 세 명이었다.

신마교의 교주이자 휘나라의 황제가 첫 번째이며, 두 번째는 고려를 침공해 장기전을 치르고 있는 사묘아리였다. 그리고 또 한 명. 이번에 목표로 설정한 완안후이가 있었다.

그를 죽이게 된다면 무게의 추가 완전히 기울게 될 것이었다.

소무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이런. 내가 눈치 없이 휴식을 방해했군.”

지휘 막사로 찾아온 인물은 의용군의 대장인 악비였다.

반가운 인물이었기에 소무도 일어서서 그를 반겼다.

“아닙니다. 어서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악비는 장양의 동문 사형으로, 수많은 전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백전노장이었다. 그렇기에 소무도 그에게만은 진심으로 예우를 갖춰주고 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소나라의 병사들은 훈련도와 사기가 상상을 초월하는군. 강군을 키워내느라 정말 고생하셨네.”

“저는 별로 한 게 없습니다. 단지 환경을 만들어주었을 뿐, 그들이 스스로 성장한 것입니다.”

“허허허. 총사령관을 맡았음에도 여전히 겸손하시구먼.”

소무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자리는 장군께서 앉아계셔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여 사령관의 자리를 제게 양보하셨습니까?”

“첫째로 나는 정규군이 아니니 자격이 없네. 두 번째는 자네의 능력이 충분하기 때문일세. 그리고 또 한 가지.”

“……?”

소무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에겐 연합군을 하나로 만들어줄 영웅이 필요하네. 자네보다 더한 적임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붕거 앞에서 영웅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字)였다.

악비는 머쓱하게 웃으며 화두를 돌렸다.

“허허, 이 친구 참……. 괜찮다면 나와 함께 진영을 둘러보는 게 어떻겠는가.”

“좋습니다. 가시지요.”

밖으로 나온 둘은 함께 진지를 둘러보며 곳곳을 순시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소나라의 군단이 차지한 중앙군이었다.

진형의 외곽으로는 병사들이 군마를 저지할 수 있는 도랑을 파내고 있었다.

게다가 곳곳으로 배치되고 있는 촘촘한 목책들까지.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특화된 모습이었다.

낙양의 주력은 기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습니까?”

“어느 곳보다 방비가 잘 되어 있군. 아주 훌륭하네.”

악비는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어느새 투석기 부대를 지나치고 있었다. 수레 위에 설치된 간이형 소형 투석기인 선풍포가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좌군과 우군에도 배치되어 있었기에 놀랄 것은 없었다.

악비의 시선을 이끈 것은 진형의 후미에 배치된 기마부대였다.

상대적으로 숫자는 얼마 안 되지만, 아군이 보유한 유일한 기병들이기에 무척이나 소중한 전력이었다.

기마대의 대장인 한백이 소무와 악비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소나라의 기마대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더니, 듣던 대로 대단하구만. 헌데 기수들이 움켜쥔 저 창들은 무엇인가?”

창 한 자루를 건네받은 소무가 구조를 설명해주었다.

“신무기인 화창(火槍)입니다. 창끝에 달린 것은 화약통이고, 줄을 잡아당기면 터지는 구조이지요. 비록 일회성이지만,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악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둘의 관계는 처음보다 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이제는 확신해도 되겠군. 우리 의용군의 목숨을 자네에게 믿고 맡기겠네.”

“모쪼록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송나라의 대장군을 역임한 그의 경험은 연합군의 입장에서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다.

한 시진 동안 순시를 마친 그들은 다시 지휘 막사로 돌아왔다.

어느새 다른 지휘관들도 하나둘씩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전술을 논의했다.

그리고 일과가 거의 끝나갈 때쯤이었다.

돌연 막사의 입구가 찢어지듯 확 걷혔다.

부아악-!

누군가가 호흡을 거칠게 내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적호병인지 뭔지 붉은 갑옷을 입은 새끼들이 흉수였소!”

소나라의 장수 일광이었다. 그가 입고 있던 흑갑은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양쪽 손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지휘관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이윽고 근처에 있던 장수 한 명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정찰을 나간 첨병들을 살해한 놈들 말입니다. 랑아대에서 다 때려죽였으니 이제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적호병이라면 일반 병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골칫덩이를 랑아대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해결한 것이다.

지휘관들이 갈채를 보내며 기뻐했다.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허허! 고생이 많으셨소.”

“이제 우리 첨병들이 마음 놓고 정찰할 수 있겠구려.”

분위기가 밝아지자 상석에 앉은 소무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는 정찰부대를 대대적으로 편성하여 운용할 것이오. 모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리 준비하지요.”

“적군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 * *

소무는 일과의 대부분을 지휘 막사에서 보냈다.

물샐틈없는 감시망이 형성되면서 유의미한 정보가 계속 수집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사흘째가 되던 날. 드디어 기다리던 내용이 당도했다.

랑아대의 철두가 다급히 찾아와 소리쳤다.

“대장님, 반 시진 후면 적군이 당도합니다!”

겨우 반 시진 전에서야 적군의 근접을 알게 된 것이다.

정보전달이 느려서가 아니었다. 휘나라의 진군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소무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병들이겠지?”

“예. 기마부대가 먼저 도착하고, 보병들은 보급부대와 함께 저녁쯤에야 도착할 겁니다.”

“수고했어. 당황할 필요 없으니 훈련한 대로만 준비해.”

철두가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소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영의 곳곳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병사들의 기척들이 감지되었다.

소무는 마시던 찻잔을 다시 움켜쥐고 천천히 들이켰다.

‘완인후이. 이제 못다 한 승부를 가릴 때가 왔구나.’

적군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행동에는 여유가 넘쳤다.

잠시 후 지휘 막사를 벗어나 중앙군의 선두로 나아가자 장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침묵을 지키며 다가오는 적군을 기다렸다.

그렇게 일식경이 지났을 즈음 돌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마치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듯 무엇인가의 잡음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의 심장박동 소리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보다 못한 소무가 중후한 내공을 뿜어내며 소리쳤다.

“동요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라! 그리고 옆에 있는 동료를 믿어라! 우리는 적들보다 강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중앙군은 물론이고, 좌군과 우군까지 메아리치며 뒤흔들었다.

가공할 기세를 느낀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공포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우아아아!!!”

“와아아아아!!!”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는 함성에 묻혀 더는 들려오지도 않았다.

잠시 뒤 전면으로 희뿌연 먼지와 함께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열을 갖춘 기마병들이 끝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추 보아도 오만이 넘는 대 군세였다.

기세를 몰아 바로 공격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그들은 삼백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아군의 방어 태세를 보고 쉽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리라.

적장의 얼굴을 살펴보던 소무는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중앙군은 완안후이로군. 우익은 백묘진. 그리고 좌익의 대장은…… 마휼?”

마휼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군단의 깃발에 새겨진 문양으로 유추한 것이다.

그가 지휘하는 군단과는 함곡관에서 싸워봐서 잘 알고 있었다. 백묘진보다 교활한 전술가인 마휼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무슨 계책을 준비하던 놈의 눈을 속이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양측 진영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한참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장창을 움켜쥔 누군가가 말을 타고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왔다. 군단장 마휼이었다.

그는 아군의 진형을 쓱 훑어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소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생각 같아선 낚아채서 죽이고 싶었지만, 그의 뒤에는 완안후이를 비롯한 고수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신으로 다가와 여유롭게 염탐하는 놈의 모습이 어찌 고와 보이겠는가. 일광이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도발했다.

“뭘 봐, 이 고라니같이 생긴 새끼야?”

마휼의 시선이 일광을 향했다. 뒤이어 그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재밌군. 아주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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