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꼭 그래야만 했니 (3) (226/250)


226화 꼭 그래야만 했니 (3)
2022.09.14.



“이거, 무턱대고 공격했으면 낭패를 당할 뻔했군.”

비웃음이 섞인 마휼의 중얼거림이었다.

그것을 들은 연합군의 장수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군이 준비한 함정들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이다.

목청이 가장 큰 일광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개소리 그만하고 빨리 들어와! 무섭냐?”

마휼은 고삐를 움켜쥐며 코웃음을 쳤다.

“어디 짐승 같은 놈이 주제도 모르고 사람과 대화하려 드느냐? 넌 빠지거라.”

“뭐라고? 이런 개새…….”

어느새 다가온 소무가 일광의 어깨를 잡으며 제지했다.

“상대할 필요 없으니 물러서.”

병사들 앞에서 장수가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군단의 사기가 저하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지휘관들은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며, 병사들에게 전세가 불리하지 않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얼굴이 붉어진 일광은 씩씩대며 등을 돌렸다. 그 와중에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놈은 내가 죽일 테니, 대장은 건들지 마.”

“약속하지.”

일광을 뒤로한 채 소무와 마휼이 마주 바라보았다.

서로가 도발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휼의 말투가 다소 바뀌었다.

“기마대의 진격을 저지할 도랑과 군마를 놀라게 할 화공(火攻)용 짚단 더미. 그리고 바닥에는 밧줄을 매단 목책을 숨겨놓았군. 준비는 매우 훌륭했다.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했겠지.”

상상을 초월하는 눈썰미였다.

함정이 모두 들통났지만, 소무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단지 천천히 검을 뽑아 들고 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났는가.”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달려나가 목을 베어버릴 기세였다. 물론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조심성이 많은 상대에게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고삐를 움켜쥔 마휼은 말머리를 돌리며 마지막 질문을 남겼다.

“궁금하군. 이제 어찌할 텐가?”

마휼은 대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상대의 행동을 묻는다는 것은 뻔히 보이는 함정을 향해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거 일이 어렵게 되어버렸군.’

진영으로 되돌아온 소무는 장수들을 향해 말했다.

“병사들에게 도랑을 메우라 지시하게.”

장수들 중 양강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힘들게 파놓은 땅을 다시 메우다니요?”

“이미 발각된 함정은 가치가 없는 법이지. 이대로 도랑을 메우지 않으면 적들도 공격을 오지 않겠지만, 우리 또한 이동하지 못한다.”

양강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게 우리한테 더 유리한 것 아닙니까? 적운 제독과 무림맹이 낙양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말입니다.”

“공격군은 우리고, 적들은 수비군이란 것을 잊지 마시게. 우리가 시간을 끈다고 느껴진다면, 마휼이 양동작전을 눈치챌 걸세.”

이곳에 집결한 적들의 전력을 보면 아직 양동작전은 발각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워낙 은밀하게 준비하기도 했으며, 한발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적들이 눈치채면 낙양성의 방비가 더욱 강화되어 공략이 어렵게 된다.

양강도 이해했다는 듯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등을 돌린 그는 병사들에게 목청껏 소리쳤다.

“지금부터 모두 도랑을 메운다! 좌군과 우군에도 사령관님의 지시를 전하라!”

소무는 그들을 뒤로한 채 지휘 막사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각이 지난 뒤. 막사에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우군을 맡은 의용군의 대장 악비였다.

“방금 그자는 쉬운 상대가 아닌 것 같군.”

“조심성이 많고, 교활한 전술가입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당장은 적의 공격이 없을 터였기에, 악비의 모습에서도 다급함은 보이지 않았다.

“내 생각도 자네와 같네. 도랑을 메우고 천천히 전진해야겠지. 비록 함정은 무용지물이 되겠지만, 진형을 잘 유지한다면 해볼 만은 할 걸세.”

소무는 탁상 위에 있는 찻주전자를 움켜쥐고 악비와 자신의 잔을 채웠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군의 피해가 클 것입니다. 무의미한 승리는 피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찻잔을 움켜쥔 악비는 소무를 살펴보더니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의 표정을 보니 차선책이 있는 것 같군.”

“물론 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겠군요.”

표정이 밝아진 악비는 내용이 궁금하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내 사제가 자네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네. 그게 무엇인가?”

차를 한 모금 삼킨 소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 부인입니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악비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앞의 소무가 혼인했다는 소문은 얼핏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의 부인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무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짧게 간추려 답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제 아내가 싸움을 꽤 잘합니다.”

악비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무엇인가의 다른 비밀이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 자네한테 다 생각이 있겠지. 하지만 장안성에 있을 그분을 어찌 이곳으로 데려온단 말인가?”

일반인의 걸음으로 열흘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기준이었다.

“밖에 있는가?”

막사를 지키던 병사 한 명이 다급히 뛰어 들어와 소무 앞에 기립했다.

“랑아대에 가서 청해라는 녀석을 좀 불러 주겠는가.”

“예, 장군!”

일광을 제외한다면, 현정과 함께 랑아대에서 가장 경공이 빠른 대원이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백부장의 갑주를 입은 랑아대의 장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대장님.”

“양주산까지 달리면 얼마나 걸리겠어?”

청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전력으로 달리면 아마도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가서 내 아내를 좀 불러다 줘.”

“예……?”

“알다시피 함정도 발각되고 이대로는 좀 힘들게 됐잖아. 그러니까 좀 서둘러줘야겠어. 네게 우리 모두의 운명이 달려있으니까.”

소무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을까? 청해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양주산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었기에 길은 잘 알고 있었다.

상체를 숙여 보인 그는 비장한 눈빛으로 마지막 구호를 외쳤다.

“충(忠)!”

그가 사라지고 난 뒤.

소무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는데 반나절이라……. 오는 데는 반 시진이면 충분하니, 내일 아침이면 도착하겠군요.”

악비의 머릿속에는 의문만 더해갔다.

“양주산이면 장안의 인근에 있는 산이 아닌가? 이곳까지 반시진이라니? 현경(玄境)이 아니라면 그러한 속도로 오는 것은 불가능할 걸세.”

“실망하실지 모르겠지만, 현경은 아닙니다.”

현경과 동급으로 여겨지는 탈마(脫魔)였다.

뒤이어 설명하려 했지만, 악비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이면 알게 될 텐데 급할 건 없겠지. 같이 나가서 진세 좀 살펴보지 않겠는가?”

“그러시지요.”

둘은 밤늦게까지 아군의 진형을 점검하고 적진을 살폈다.

예상대로 적군은 먼 곳에서 감시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아군이 도랑을 메우고 행군을 시작한다면 무엇이든 빈틈이 생길 터. 그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튿날 아침.

소무는 막사 밖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도움은 필요 없다며?”

귀에 익은 옥구슬 같은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설화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등에는 사선으로 매어진 칠현금이 보였다.

봉황의를 입은 그녀의 의상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럽고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어서 와.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는걸?”

“보자마자 아부하는 거 보니, 낭군님께서 무엇을 또 부려먹으시려는 걸까.”

소무는 양손을 슬쩍 올려 보였다.

“아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연매한테 섬서제일미(陝西第一美)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모르나 보네.”

이따금 지역에서 유명한 절세미인들에게는 별명이 뒤따른다.

물론 소무가 지어낸 것이지만, 그녀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절세미인이라는 데 싫어할 여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내는 애써 내색을 안 하고 있을 뿐, 좋아하는 티가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뭐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뭘 도와주면 돼?”

“음, 뭐 간단한 문제야.”

소무는 상황을 설명하다 말고 얼굴이 굳어졌다. 무엇인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문을 알고 있던 설화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딸내미도 같이 왔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울더라고. 얼굴만 보고 돌아간다고 하는데 말릴 수가 있어야지.”

자신의 몸은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아이였다.

강호에서도 무림십대고수 정도는 되어야 도달할 수 있다는 화경이 아니던가.

다가오는 속도를 보니 산군을 타고 있는 듯했다.

‘뭐 잠시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잠시 후 아군 진형의 후미에서 돌풍이 불어닥쳤다.

무엇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빛의 속도로 다가왔다.

병사들은 제지할 엄두도 못 내고 몸이 굳어버렸다.

“아버지!”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소무가 양팔을 벌리자, 소소가 산군의 등을 밟고 하늘 높이 도약했다.

참새처럼 날아오른 아이는 십여 장을 전진해 소무의 가슴에 안착했다.

“어이쿠. 딸, 여긴 어떻게 왔어?”

소소는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 보고 싶어서 왔어요. 힝.”

“요녀석, 어디 아픈 데는 없지?”

화경에 도달하면 만독불침(萬毒不侵)을 이루게 되며, 몸은 금강불괴보다 단단하게 된다. 아플 수가 없는 신체였다.

“……네. 아버지, 집에 언제 올 수 있어요?”

“음. 오래 안 걸릴 거야. 열 밤 안에 돌아갈 거야.”

“정말요?”

“그럼~ 끝나면 어머니랑 같이 물고기 잡아서 구워 먹을까?”

“히히. 좋아요.”

소무는 연신 딸아이를 토닥거려주었다.

잠시 후 재회가 끝난 소소는 산군에게 다가가 고개를 올려 눈을 마주쳤다.

“이제 돌아가자, 다롱아. 엄마랑 약속했거든.”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산군이 납작 엎드렸다.

소무와 설화는 흐뭇한 미소로 아이가 돌아가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순히 지시를 잘 따르는 모습이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소소, 이제 다 컸구나.”

“헤헤. 저 갈게요, 아버지!”

손을 흔들려던 소무는 잠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잠깐만. 소소의 용격사자후가 십성(十成)에 도달했다고 했지? 위력이 어느 정도나 돼?”

설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구성(九成)이었을 때와 비교하면 위력이 다섯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아. 마지막으로 펼쳤을 때는 양주산의 일부가 함몰되었어.”

“산의 일부가 함몰되었다고?”

“나중에 돌아가서 봐봐, 나도 믿기지 않을 정도니까. 그래서 다시는 사용하지 말라고 교육하고 있어. 근데 왜?”

용격사자후는 준비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전 후에는 탈진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위력만큼은 비교 대상을 찾아볼 수 없는 최강의 광역 무공이었다.

어쩌면 무력화된 함정의 위력을 사자후가 대신해 줄 수도 있을 터.

잠시 고민하던 소무가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갈 때 가더라도 사자후 한 방 날려주고 돌아가면 좋잖아?”

위험할 것은 없었다. 발출 직후에는 산군의 등에 업혀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니.

설화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나는 여기 안 와도 됐던 거네.”

“그럴 리가 없잖아. 연매가 없으면 전투의 승패를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흥. 어디 두고 보겠어.”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쪼그리고 앉아서 딸에게 손짓을 보냈다.

“소소야, 잠시 이리 와봐.”

16631920476505.jpg/20220914154005034690_EC868CEBACB4ECA084EAB8B0+ED919CECA780+2ECB0A828EC98A4E.png al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