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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절망을 보여주마 (1) (227/250)


227화 절망을 보여주마 (1)
2022.09.15.


불과 하루 사이에 휘나라의 군단은 몸집이 더욱 불어났다. 행군속도가 느린 보병대와 보급부대가 합류한 것이다.

연합군의 사기가 저하될 만도 했지만, 오히려 전날보다 더욱 불타올랐다. 밤사이 아군에도 든든한 지원군이 당도했기 때문이다.

크르르릉-!

무시무시한 호랑이 한 마리가 연합군의 진지를 터벅터벅 활보하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와 터질 듯한 등 근육, 그리고 송곳 같은 발톱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특수제작된 의상을 벗은 산군의 외형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그 모습을 본 의용병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들은 과거 유광세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이었으며, 산군을 적으로 맞아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재앙이었다.

“저, 저게 왜 여깄어?”

“미친…….”

“휘나라에서 끌고 다니던 거 아니었어?”

병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소나라의 병사들은 뿌듯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댈 뿐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산군은 단지 소소가 끌고 다니는 장안의 재롱둥이였다.

반면 포나라와 의용군은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산군의 눈동자와 마주친 병사들은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병사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위에 저 꼬마는 뭐야?”

산군의 등 위에는 여자아이가 올라타서 고삐를 움켜쥐고 있었다.

병사와 눈이 마주친 소소는 보조개를 피어 올리며 웃었다.

“저는 소소예요. 아버지 만나러 왔는데, 놀다 가도 된대요. 히히히.”

부모님들이 좀 더 있다가 가라고 한 상황이었기에 마냥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아버지가 누군데?”

소소의 검지가 꼬물꼬물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중앙군의 선두에서 뒷짐을 쥔 채 전황을 살펴보는 장군이 있었다.

“저기 있어요!”

긴장이 조금씩 풀린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속닥였다.

“사령관님의 딸인가 본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소나라의 랑아대에서 산군을 데려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그럼 저 엄청난 게 이제 우리 편이란 말이지?”

“와……. 휘나라 녀석들 뒈졌다, 이제.”

병사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소소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좌군, 우군 할 것 없이 이쪽저쪽 활보하며 병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소무가 의도한 것이었다.

꿈에서조차 만나고 싶지 않은 무시무시한 생명체. 만약 이 공포스러운 영물이 듬직한 아군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울려 펴졌다.

뿌우우우웅-!

곳곳에서 북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려왔다.

“진군이다!”

“대열을 갖추어라!”

분주해지는 병사들. 갑자기 진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때였다. 어리둥절한 소소의 앞으로 봉황의를 입은 여인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자, 엄마를 따라오너라.”

“네, 알았어요!”

행군이 시작됨과 동시에 모녀는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진형의 선두 부근.

그곳에서는 사령관 소무가 전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진세를 유지한 채 천천히 이동하라.”

“예, 장군!”

연합군은 메워진 도랑을 넘어 행군을 개시했다.

진의 가장자리는 장창병과 방패병들의 차지였다.

안쪽으로는 궁수들과 보병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병참 수레들은 가장 깊숙한 곳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공격하던 쉽게 무너트릴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모습이었다.

“적들이 과연 공격해올까요?”

질문한 인물은 산와족 출신의 장수인 백약이었다. 그는 월도를 움켜쥐고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소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우리가 낙양까지 당도하겠지. 적들은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네.”

연합군의 병참수레에는 회룡포를 조립하기 위한 재료가 적재되어있었다. 낙양성의 성벽을 무너트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언제쯤 오겠습니까?”

소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백약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예?”

“우리가 함정을 포기한 이상, 적들도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움직임을 잘 보시게.”

아군이 전진을 시작함에 따라 휘나라의 군단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결코, 진을 후퇴시키려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대열을 갖추며 돌진태세를 준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겹겹이 늘어서서 기염을 토해내는 기마병들의 모습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저들만으로 우리의 창진(槍陣)을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물론.”

소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마부대의 틈새로 일단의 무리가 등장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병들이었다. 말에도 단단해 보이는 마갑이 씌워져 있었다.

중앙군은 물론이고, 좌익과 우익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 전열을 차지했다.

“……철갑기병대입니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휘나라의 기마대는 모두 경장기병대였다.

중무장한 철기병을 준비해 전열에 세우다니. 아군의 진형을 부수기에 특화된 최악의 상대였다.

휘나라의 대열이 돌격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한 소무는 오른손을 올려 보였다.

그 순간 장교들이 깃발을 휘두르며 명령을 보냈다.

“멈추어라!”

연합군은 동시에 행군을 멈추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양측의 거리 백오십여 장. 기마대가 돌격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간격이었다.

끝없이 늘어서는 휘나라 기병들의 위엄은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소무는 병사들이 동요하기 전에 다음 명령을 내렸다.

“선풍포를 준비하라.”

지휘부에서 붉은색 깃대가 솟아올랐다. 투석기 부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수레에 장착된 간이형 투석기가 일렬로 늘어서며 조준을 마쳤다.

양측이 격돌할 준비를 마치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병사들은 손에 땀을 쥐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장수들도 무기를 움켜쥔 채 비장한 얼굴로 호흡을 고르며 있었다.

잠시 후 전장의 중심으로 한 줄기 바람이 휭 하고 불어닥쳤다. 그리고 그 순간. 휘나라의 진형에서 외마디 외침이 뿜어져 나왔다.

“돌격하라!!!”

전열에 자리한 육중한 철갑기마대가 지면을 박찼다. 그들의 뒤로 경장기마대가 대열을 갖추고 돌진을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말발굽에 지면이 요동치며 거센 먼지가 피어올랐다.

장창과 대부 따위를 움켜쥔 기수들이 눈에 불을 켰다. 그들의 기세는 마주보는 보병들을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였다.

“선풍포 발사!”

깃발을 흔들 필요도 없었다. 중후한 내공이 실린 소무의 음성이 연합군의 전체에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진형의 후미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투콱-! 콰콰콱-!!!

주먹보다 작은 무수한 석탄들이 보병들의 머리를 넘어 기마대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첫발은 산탄(散彈)이었다.

쾅-! 콰콰콰쾅-!!!

기수든 군마든 단 한 발이라도 적중당한다면 즉사였다.

수백여 명의 기병이 쓰러졌지만, 적들은 진격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궁수 발사!”

전열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궁수들이 동시에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파팟-! 파파팟-!!!

하늘을 가득 메운 화살들이 곡선을 그리며 기수들의 가슴을 후벼팠다.

특히나 소나라의 궁수들은 절반 이상이 목표에 적중할 정도로 정확도가 엄청났다.

문제는 철기병들의 갑주를 뚫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탕-! 타타타탕-!!!

맥없이 떨어져 내리는 화살들과 함께 병사들의 사기도 추락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기마대와의 간격이 오십여 장 이내로 좁혀졌을 때였다.

“강노 준비!”

전열의 병사들이 엎드리자 어깨 위로 강노를 움켜쥔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발사 명령을 기다렸다.

“발사!”

활은 곡사였다면, 강노는 직사였다. 게다가 화경의 호신강기를 뚫을 만큼 강력한 무기였다.

파팟-! 파파팟-!!!

이천여 발의 화살이 전면을 휩쓸기 시작했다.

강노의 위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끝이 뭉툭한 화살촉이 철갑을 사정없이 관통해버렸다.

푹-! 푸푸푹-!

강노에서 쏘아진 화살은 동시에 두세 명의 기병을 관통하며 고꾸라트렸다.

한 번의 일제사격으로 천여 명이 넘는 기병이 쓰러진 것이다.

그런데도 기마대의 기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근접전투뿐이었다. 휘나라의 기수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합군과 기마대의 거리 삼십여 장.

돌연 연합군의 진형에서 한줄기 회오리가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쳐올랐다.

그 순간 소무의 거센 기성이 다시 한번 연합군을 향해 뿜어졌다.

“지금이다!”

중앙군의 전열을 지키던 병사들이 다급히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자 산군의 등을 타고 진지를 활보하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옆에서는 봉황의를 입은 여인이 아이의 눈에 검은 안대를 채워주고 있었다.

일을 마친 설화는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서며 전면을 바라보았다.

‘주제도 모르는 녀석들. 어디 절망이 무엇인지 한번 경험해보아라.’

잠시 후 소소의 전신을 휘감던 거센 기(氣)의 회오리가 단번에 증발해버렸다.

십성(十成) 용격사자후. 절세의 광역 무공이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근처의 병사들은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귓속에 마개를 쑤셔 넣었다.

그 순간 휘나라의 장수 중 한 명이 뭔가를 눈치채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모두 귀 막아!!!”

이미 소용이 없었다. 무기를 움켜쥔 기수들이 무슨 수로 양쪽 귀를 막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군마들의 귀는 어찌한단 말인가.
기마대의 선두와 연합군의 거리가 십여 장 이내로 가까워졌을 때였다.

활짝 열린 소소의 입에서 사자의 포효가 신의 징벌처럼 뿜어져 나왔다.

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뒤쪽에 있던 소나라의 병사들이 후폭풍에 튕겨 날아갔다.

“크윽!”

“큭!”

그것이 시작이었다.

쩍-! 쩌저저적-!!!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듯 거미줄처럼 지면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동시에 전면으로 뿜어져 나간 음파가 마주 오던 기마대를 휩쓸어버렸다.

그 순간 돌진해오던 전투마들의 고막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기수들과는 달리 내공을 익히지 않은 말들은 음파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히잉-! 히이이잉-!

앞쪽에 자리한 수천 마리의 전투마들은 단번에 다리가 풀리며 고꾸라지려 했다.

그러나 신의 징벌은 말들이 쓰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곧이어 바람의 후폭풍이 그들을 덮쳤기 때문이다.

그 위력은 너무나도 파멸적이었다.

콰쾅-!!! 콰콰콰콱-!!!

앞쪽에 자리한 천여 마리의 군마가 기수를 태운 채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렸다.

“크악!”

“컥!”

“끄윽!”

전투마는 모조리 즉사한 상태였으며, 기수들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간쯤에 자리한 기병들은 대다수가 넘어진 상태였으며, 후미에 있던 기수들도 말들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자세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휘나라의 지휘관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뭐야?”

“도대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잠시 후 높이 떠오른 육중한 말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이어 혼란에 휩싸인 기수들을 마구잡이로 덮쳤다.

쿠웅-! 쿠쿠쿠쿵-!!

가속력을 받은 말의 무게는 무공을 익힌 기수들조차 단번에 뭉개버릴 정도였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연합군의 병사들도 멍한 얼굴로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수고했어, 우리 딸.”

설화는 소소를 번쩍 들어 산군의 등 위에 올려 묶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그사이 잠이 든 것이다.

편히 잘 수 있도록 안대는 풀어주지 않았다.

“다롱아, 소소 언니 태우고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할 수 있지?”

산군은 수컷이었지만, 소소는 항상 자신을 언니라 부르고 있었다.

그르렁거리는 것을 보니 자신 있는 모양이었다.

설화가 산군의 엉덩이를 툭 치자 거대한 앞발이 지면을 박찼다.

진형의 후미를 향해 벼락처럼 내달리는 산군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한시름 놓은 설화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소무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용격사자후의 위력에 몹시 놀란 모습이었다. 휘나라의 기마대가 사자후 한 방에 무력화가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뭐해? 안 싸울 거야?”

적들이 다시 대열을 갖추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설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소무의 주의로 기(氣)의 파동이 일어나며, 갑주 위로 붉은 피풍의가 휘날렸다.

“병사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지금부터 적들을 짓밟아줄 것이다! 우리의 분노를 보여줄 것이다!!”

소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십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아!!!”

“끄아아악!!!”

“우와아아아!!!”

병사들의 고함에는 지금껏 억눌려온 모든 한(恨)이 서려 있는 듯했다.

연합군에서 울린 포효는 휘나라의 지휘부까지 뒤흔들 정도였으며, 그들을 움츠리게 했다.

그 순간 내공이 가득 실린 소무의 명령이 쩌렁쩌렁 메아리치며 공격의 시작을 알렸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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