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절망을 보여주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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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화 절망을 보여주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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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화 절망을 보여주마 (2)
2022.09.16.
연합군의 보병들이 혼란에 빠진 기마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와아아아아!!”
곳곳에서 함성이 메아리치며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쳤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기수들이 가장 먼저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푸욱-! 푹-! 푹-!
“큭!”
“커억!”
보병들의 검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쓰러진 기수들은 사자후에 맞은 후유증으로 반격할 기운조차 없었다.
가장 용맹한 병사들은 소나라가 맡은 중앙군이었다. 그들은 기마대의 전열을 삽시간에 쓸어버리며, 깊숙이 전진했다.
날뛰는 말에서 내린 기수들이 하나둘씩 대열을 갖추고 대항해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대형을 형성하여 밀고 들어오는 보병들을 어찌 막겠는가.
좌익을 맡은 포나라가 다소 주춤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지원군이 있었다. 연합군의 진형 후미. 한백 부장이 이끄는 이천 기의 기마대가 좌측으로 반월을 그리며 질주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휘나라의 지휘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마휼은 충격을 크게 받은 듯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고 있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서 대비했다고 생각했다. 아군의 기마대가 웬 여자아이의 사자후 한 방에 무력화될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장군.”
마휼은 고개를 돌려 완안후이가 지휘하는 중진을 살펴보았다. 그 또한 충격이 적지 않은 듯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무엇이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보병들을 모두 투입하라.”
“예, 장군!”
잠시 후 진군을 알리는 북이 울리며 휘나라의 좌익이 먼저 꿈틀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중앙군과 우익에서도 보병들을 투입시켰다.
총 삼만에 이르는 보병들이 진격을 개시하고 있었지만, 열세를 극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마휼은 말에서 뛰어내린 후 완안후이가 있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경공을 펼쳐야 할 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완안후이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해본 적이 없었다. 몽골초원을 굴복시키고, 서하를 점령할 때도 말이다. 도대체…… 도대체 우리가 무엇에 당한 것이란 말이냐.”
진지에 남아있던 완안후이는 볼 수 없었지만, 마휼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
“반로환동한 기인의 사자후(獅子吼)입니다. 과거에도 보고를 한번 받은 적이 있었지만, 무심히 넘긴 제 실책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완안후이는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속은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완안후이의 웃음이 멈추자 마휼이 분하다는 듯 한탄했다.
“교단의 지원까지 받는 것이 좋았을 뻔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느새 완안후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증발해있었다.
“마 장군.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사령관을 잡는 것만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완안후이와 마휼은 전장을 응시했다. 목표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단신으로 진형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인물. 무차별적으로 보병대의 진을 무너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흡사 야차처럼 보였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병사들의 수급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마침 혼자 있군요.”
고개를 끄덕인 완안후이는 허리춤에서 검을 천천히 뽑아 들며 말했다.
“오룡상장을 소집하라. 지금부터 소나라의 사령관을 저격하겠다.”
무력이 뛰어난 다섯 장수로 구성된 오룡상장(五龍上將). 그들은 오직 완안후이의 명령만을 받고 움직인다.
마휼도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각오를 다졌다. 어지간해선 전투 현장에는 참여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으로 용맹한 장수들이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무서운 기세를 뽐내는 맹장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오십여 장이 떨어진 전장의 한복판.
서걱-! 촤아악-! 푸욱-!
섬전처럼 움직이는 소무의 검은 눈으로는 쫓을 수가 없었다.
어떤 병사도 그의 일 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가 지나온 자리로 수백 명의 시신이 즐비했다.
보병대의 대열을 무너트리느라 정신이 팔린 듯 보였지만, 소무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예상대로군.’
소무의 목표 또한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휘나라의 대장군 완안후이. 그의 주변으로 자신을 잡기 위한 척살대가 구성되었음을 감지했다.
푸욱-!
소무가 움켜쥔 검 끝이 보병 장교의 갑주를 관통하는 소리였다.
검을 뽑는 그의 상체가 우측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파앙-!
돌연 서늘한 검강이 그의 갑주를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절묘한 회피였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강기다발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습적인 협공이 시작된 것이다.
회피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소무의 검날에서도 밝은 빛이 마주 뿜어나왔다.
쾅-! 콰콰콰쾅-!!
폭죽을 연상케 하는 굉음. 그리고 밝은 빛무리가 연달아 번쩍였다.
한 차례의 격돌이 끝난 후 소무는 뒷걸음질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일곱 명의 장수가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장이니 비겁하다 원망하지 말거라.”
완안후이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현경을 필두로 여섯 명의 화경이 한자리에 모였다. 휘나라의 맹장들이 모조리 몰려온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단신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여전하군.”
소무는 얼굴을 굳히며 검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연합군에도 이름난 맹장들이 있었지만, 지척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단신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잘 가시게.”
휘나라의 입장에서는 전황이 불리했기에 시간을 오래 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공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번쩍-!
눈부신 섬광과 함께 소무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오룡상장의 틈새에서 다시 나타났다.
동시에 벼락처럼 움직이는 검이 빛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섬전비영보와 함께 펼친 탈혼검법의 일 초식, 탈혼일섬(奪魂一閃)이었다.
콰앙-!
두 명의 장수가 비틀거리는 순간 소무가 다시 한번 보법을 밟았다. 돌파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놓아줄 완안후이가 아니었다.
한줄기 섬광이 소무의 등 뒤를 향해 빛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찰나의 순간 펼쳐낸 초식이었지만, 막대한 내기를 머금은 강력한 일격이었다.
이를 악다문 소무는 재빨리 상체를 회전하며 공격을 받아냈다.
콰아앙-!
불완전한 자세에서 막아낸 일격이었다. 전투화가 지면을 끌며 주르륵 밀려 나갔다.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삐져나왔다.
“큭.”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약간의 내상까지 입었으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은 자신이 유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포위망에서 좀 더 멀어질 수 있었다.
후방으로 미끄러지던 소무는 지면을 박차며 속도를 더욱 올렸다.
“잡아!”
완안후이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미 몸을 돌려 달아난 소무는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벗어나 있었다.
이렇게 놓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휘나라의 맹장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죽기 살기로 뒤쫓았다.
“놈이 내상을 입었으니, 잡을 수 있다!”
도망치는 소무의 경공이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거리는 조금씩 좁혀졌으며,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런데 완안후이의 뒤를 빠짝 따르던 마휼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지금 우리는 전장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아군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해도 모자랄 판에 반대편으로 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완안후이는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자신들의 전력이라면 어떤 변수가 있더라도 무너트릴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어떠한 함정이 있더라도 우릴 막지 못한다!”
무엇보다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잠시 후 전장을 완전히 벗어나 병사들의 함성조차 들리지 않았을 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청량한 칠현금의 음률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띠리링-! 띠리리링-!
물결처럼 끝없이 뻗어 나가는 음률에는 막대한 내공까지 담겨있었다.
마휼의 심정은 점점 불편해졌다. 그는 자신들이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완안후이를 말릴 수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저는 전장으로 돌아겠습니다.”
완안후이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마 장군!”
마휼은 이미 대열을 이탈하여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전음으로 일방적인 통보를 전해왔다.
- 만약 대장군께서 일각 안에 복귀하지 못하신다면, 전군 낙양성으로 후퇴시키겠습니다
완안후이의 이마에 핏대가 곤두섰다.
감히 자신에게 항명하다니. 괘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적장을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휼 한 명이 빠진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다섯 명의 화경, 오룡상장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들은 기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지평선 너머의 평야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 한 여인이 그늘에 다소곳이 앉아서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질주하던 소무는 정확히 그녀의 옆에서 멈추었다.
곧이어 연주가 멈추며 연꽃잎 같은 입술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시간 딱 맞춰왔네.”
완안후이와 오룡상장은 무기를 움켜쥔 채 둘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순간 그들은 처음으로 불길한 마음을 느꼈다.
자신들이 포위하려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룡상장 중 한 명이 완안후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마교의 전대교주인 옥화신녀인 것 같습니다. 무자비한 년이라는 소문이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나도 알고 있다.”
소나라의 위험인물은 이미 모두 파악해놓은 상태였다.
정보에 의하면 극마 중에서도 최상급의 수준을 지닌 고수였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자꾸 그의 오감을 자극하며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극마와는 다른 뭔가 이질적인 기운.
완안후이가 머뭇거리자 설화가 칠현금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왜? 뭔가 이상해?”
“…….”
조금도 겁먹은 말투와 표정이 아니었다.
불안감이 엄습해온 휘나라의 맹장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설화가 양손을 서서히 올리며 중얼거렸다.
“무자비한 X이라……. 그렇게 원한다면 지금부터 원 없이 보여주마.”
그 순간 그녀의 소매에서 수십 개의 비침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곧이어 뱀이 똬리를 틀 듯 그녀의 전신을 천천히 휘감기 시작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비침들이 하나같이 모두 강기(剛氣)를 머금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지를 돌파한 이후 한층 더 진화한 그녀의 절학. 진 마화비전(眞 魔華飛電)의 발출 태세였다.
완안후이는 눈앞의 상황을 보고는 단번에 직감했다.
“탈마(脫魔)…….”
“눈치는 있네.”
소나라에 탈마가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였다. 그렇기에 상상도 하지 못한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 내상을 입은 듯 연기했던 소무의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룡상장의 얼굴에 몹시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완안후이는 소무의 앞에 우뚝 서서는 오룡상장을 향해 말했다.
“이길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이놈은 내가 맡을 테니, 너희는 저 악귀 같은 년을…….”
그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뒤쪽에서 싸늘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라니 같이 생긴 녀석은 어디로 튀었어?”
연합군에서 가장 거대하고 탄탄한 체구를 지닌 장수. 소무의 부관인 일광이였다. 미리 약속된 작전에 따라 때맞춰 당도한 것이다.
그의 두 주먹에서 뼈마디가 풀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오룡상장 중 넷만으로 탈마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는 유리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완안후이와 오룡상장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때 지켜보던 설화가 짜증 섞인 말투로 그들을 재촉했다.
“시간 없으니 선공을 양보해줄 때 빨리 들어와. 우리 딸 밥해주러 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