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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화 절망을 보여주마 (4) (230/250)


230화 절망을 보여주마 (4)
2022.09.18.


완안후이와 오룡상장이 쓰러진 이상, 휘나라의 군단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상대가 없어진 연합군의 맹장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와도 같았다.

“모조리 주살하라!”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적병들은 도망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휘나라의 마휼 장군이 제때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소나라의 기마대가 가장 큰 골칫덩이였다. 비록 이천 기밖에 되지 않지만, 그들에 의한 피해가 가장 막대했다.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추격하는 기병들이 가장 큰 공포였다.

“후. 미쳐버리겠군.”

가장 선두에서 도망치고 있는 마휼은 미칠 지경이었다.

퇴각할 때만 해도 삼만이 넘었던 병력이었다. 그러나 낙양성의 코앞까지 무사히 도착한 병력은 고작 오천에 불과했다.

일정한 속도로 경공을 펼치고 있는 그의 옆으로 부관이 다가왔다.

“낙양성이 보입니다, 장군. 이제 우린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문제더냐. 대장군의 고집 때문에 빌어먹을 만큼 일이 꼬였구나.”

일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가장 처참하고 굴욕적인 패배였다. 그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충직한 부하인 부관 염강이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한다면, 폐하께서 지원을 오실 것이다.”

“폐하께서 직접 움직이신단 말입니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마휼은 가까워지는 낙양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전령을 보낸 지 열흘쯤 지났으니, 이미 출진하셨는지도 모르지. 우선 들어가서 대책을 생각해봐야겠다.”

지금은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염강이 성벽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성문을 열어라!”

무심히 지켜보던 마휼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성벽 위에 수비병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와라, 염강!”

성문 앞에 서 있던 염강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돌렸다.

연합군의 대군이 쫓아오고 있었기에 시간이 없거늘, 그의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염강이 환한 얼굴로 마휼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장군! 어서 입성을…….”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성문의 틈새에서 무엇인가가 벼락처럼 튀어나오며 그를 스쳐 지나쳤다.

써컹-!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염강의 수급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방어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도 완벽한 일격.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소나라의 갑주를 입고 있었다.

“나는 소나라의 제독 적운이라 한다. 인상착의를 보니 네가 마휼이로군.”

마휼은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다.

적운의 뒤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무림맹의 고수들. 하나 같이 내로라하는 정파 무림의 기둥들이었다.

무림 십대고수 중에 반절 이상이 이곳에 함께 있는 것이었다.

활짝 열린 성문의 내측으로는 관군과 무림맹의 무사들이 돌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성벽 위에도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활을 겨누었다.

넋을 놓고 있던 마휼은 조금씩 표정을 굳히며 검을 움켜쥐었다.

“양동작전이었단 말인가? 어느 한 곳도 승리하지 못했으니,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순순히 죽어줄 마음은 없다.”

“부질없는 저항을 하겠다는 말이군.”

마휼의 뒤에는 죽기 살기로 이곳까지 도망쳐온 패잔병들이 있었다. 절망에 빠진 그들은 마휼의 마지막 명령을 들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휘나라의 병사로서 명예롭게 죽어라!”

병사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 누가 죽음 앞에서 태연할 수 있겠는가.

이성이 마비된 몇몇 병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시X놈아, 징집당해서 끌려왔는데 명예 따위가 어디 있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려고 이곳까지 달려온 줄 알아?”

“개 같은 자식!”

마휼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하급 병사들이 이렇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대지가 진동하며 중후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투항하는 자는 오늘 이곳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연합군의 사령관 소무였다.

놀랍게도 그는 휘나라 병사들의 틈새에 있었다. 그것도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거닐고 있는 모습이라니. 병사들은 알 수 없는 기세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어코 병사 몇 명이 그에게 다가가 사정하듯 물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전면의 낙양성은 물론이고 후미에도 연합군의 대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오천여 명의 패잔병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로 병사들이 주춤하며 길을 터주었다.

“투항하는 자는 심문과정을 거친 후 개별적인 처분이 결정될 것이다.”

소무는 거짓 없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눈앞의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패잔병들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투욱-!

누군가가 검을 내던지는 소리였다.

“일단 목숨부터 건지는 것이 우선이지 않소?”

“나는 집에 계신 우리 어머니 때문에라도 죽을 수 없소!”

그것이 시작이었다. 병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무기를 내던졌다

툭-! 투툭-! 투투툭-!

어느새 소무의 걸음이 마휼 앞에 멈추었다.

“부하들은 모두 항복했군. 너는 어찌할 텐가.”

마휼은 검을 틀어쥐며 단호히 거절했다.

“비굴하게 살아남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군.”

소무도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단지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그곳에는 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일광이 목을 풀며 다가오고 있었다.

“고맙다. 항복하지 않아줘서.”

“…….”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던 일광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소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성문을 향해 걷었다. 곧이어 마휼을 지나치며 나직이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럼 명복을 빌지.”

맹장(猛將)보다는 지장(智將)에 가까운 마휼은 결코 일광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결과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 등 뒤에서 격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점에서 소무는 적운 제독을 포함한 무림맹의 원로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수고가 많았소, 적운 제독.”

적운은 예우를 갖추며 나직이 말했다.

“성내에 주둔한 병력이 많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그의 뒤쪽으로 늘어서 있는 무림맹의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그는 먼저 무림맹주인 정명 방장에게 포권을 건네었다.

“적어도 우리 소나라는 무림맹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선 모두가 힘을 합쳐야지요.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협조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의기가 넘치고 있었으나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전쟁에는 철저히 방관해왔던 무림맹이 아니던가. 이번이 공식적인 첫 번째 참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군부와 무림이 이해관계가 서로 맞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내비칠 수는 없었다.

“협력적인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랍니다. 무림맹은 이제 어쩌실 계획인지요?”

정명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부상을 입은 맹원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니, 당분간은 이곳에 함께 머물며 정비를 할 생각입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포나라의 지원군과 의용군은 곧 회군하려 할 터. 방어적으로 취약한 상황에서 무림맹의 전력이 이곳에 주둔한다는 것은 환영이었다.

“잘 되었군요. 그럼 모두들 안으로 드시지요.”

연합군의 지휘관들과 무림맹의 원로들은 소무를 따라 성내로 입성했다.

모두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을 수밖에 없었다.

큰 피해가 없이 낙양성을 함락시켰으니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이룬 것이다.

포나라의 진광 장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장군께서는 어찌 그리 표정이 어두우신지요?”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낙양(洛阳). 수많은 왕조가 수도로 택했을 만큼 대도시였으나, 과거의 영광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굶주린 백성들만이 거리로 몰려나와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온갖 착취 속에 노예 생활을 했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정찰을 목적으로 이곳에 방문하여 경험해 본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소무는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합군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입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줄지어 늘어선 병참 수레들. 전투가 일찍 끝났기에 병량의 절반도 비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머지않아 장안에서 구호대와 보급물자가 당도할 것이다. 그러니 병량을 아낌없이 풀도록 하라!”

“예, 장군!”

백성들에게 군단의 병량을 풀어 배고픔을 달래줄 생각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백성들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서렸다. 지금에서야 성주가 바뀐 것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좋아했다.

“드디어 해방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제 소나라의 백성이에요!”

“우와아아아!!!”

이제야 마음이 조금 풀린 소무는 걸음이 가벼워졌다.

대열의 선두에 서서 한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

군중들의 틈새에서 들려온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바로 옆에서도 듣기 힘들 정도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소무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마치 개방의 거지라고 해도 될 만큼 꾀죄죄한 몰골. 소소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가까이 다가간 소무는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이 녀석, 잘 버텼구나. 아주 장하다.”

지난해 홀로 낙양성을 정찰하는 과정에서 인연을 쌓은 아이였다. 당시 헤어지면서 육포를 주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했다.

“아저씨가 구해주러 온다고 했잖아요. 믿고 기다렸어요.”

“이제 걱정할 것 없다. 원한다면 언제든 쉴 수 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정말요?”

“그럼. 이곳에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헤헤. 빨리 보고 싶어요.”

소무는 아이를 내려놓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디 한번 지켜보아라. 이번에도 아저씨가 약속을 지키는지.”

“네!”

소무는 다시 연합군단의 지휘관들과 궁성으로 향했다.

구호 활동과 포로들에 대한 처리 문제, 그리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문제까지. 정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낙양성 대 군사회의실.

이십여 명에 이르는 연합군의 장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본국으로 회군하겠습니다.”

포나라의 진광 장군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미 의용군 또한 회군을 통보했던 참이었다.

상석에 앉은 소무가 진심을 담아 모두에게 포권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번처럼만 의기투합한다면 언제든 외세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악비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들 불러주시오. 백성들을 지키는 길이라면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있으니.”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표정에 모두가 경의를 보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마지막 회담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돌연 군사회의실로 장교 한 명이 다급히 찾아들었다.

“송나라의 호진 교위께서 당도했습니다. 급한 용무라 합니다.”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호진 교위라면 한세충 절도사의 휘하에서 무력이 가장 뛰어난 장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곳에……?”

송나라의 한세충은 개봉에서 넘어오는 지원군을 막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그의 유능한 부하가 이 시점에 무슨 일로 찾아왔다는 말인가. 영문을 짐작할 수 없었다.

소무가 장교에게 지시했다.

“어서 들어오라 하게.”

잠시 후 처참한 몰골의 장수 한 명이 절뚝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걸레 조각이 되어버린 갑주와 산발한 머리칼.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상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호진의 얼굴은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묵묵히 좌중을 훑어보더니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그와 동시에 충격적인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세충 장군께서…… 크흑……. 장군께서 전사하셨습니다.”

타앙-!

악비가 탁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와 한세충은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유명한 관계였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한 장군이 전사하다니,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게야!”

한세충이 누구인가. 혼자서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송나라 역대 제일의 무관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양쪽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호진의 모습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석에 앉은 소무는 양손에 깍지를 끼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분이 어찌하여 그리도 허망하게 전사했다는 말인가.”

들려온 대답은 역시나 소무의 예상대로였다.

“휘나라의 황제와 싸우다 결국……. 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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