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돌아온 망나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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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화 돌아온 망나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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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화 돌아온 망나니 (1)
2022.09.19.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탄식을 쏟아냈다.
침울해진 분위기 속에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던 악비조차 충격에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잠시 뒤 정적을 깨고 소무가 물었다.
“장군의 전사 소식은 유감이로군.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투 결과를 얘기해주시게.”
어느새 마음이 다소 진정된 호진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적들의 규모는 아군의 두 배였습니다. 열세인 상황에서 한세충 장군께서 쓰러진 이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만 중 일만 병력만이 겨우 살아남아 회군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정도의 인원이 퇴각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군. 기병들로부터 도망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추격이 길지 않았습니다. 정탐해본 결과 저들은 낙양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다시 개봉으로 회군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행군 도중 낙양성이 함락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지켜보던 악비가 분노를 참으며 호진에게 말했다.
“황제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시게.”
“놈은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군께서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현경의 고수인 한세충이 맞수를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분하다는 듯 악비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자신이 복수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 친구야. 나를 살려놓고 어찌 그렇게 혼자 가셨는가…….”
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소무는 악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억울하게 투옥당했던 그를 살리고자, 한세충이 도성으로 찾아와 진회에게 노발대발하던 모습이 생생했다.
어쨌거나 불타올랐던 장수들의 사기가 흔들릴 조짐을 보였기에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놈은 내가 직접 상대할 것이니 다들 염려치 마십시오. 반드시 잡을 것입니다.”
소무가 자신 있게 말했으나, 송나라의 호진 교위는 전혀 표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황제뿐만이 아닙니다. 놈을 보필하는 여섯 명의 괴인이 있었습니다. 필시 군부의 인물들은 아니온데 하나같이 대단한 무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짐작되는 인물들이 있었다. 십중팔구 신마교의 대호법과 다섯 명의 장로들이 분명했다. 이미 그들과 싸워본 전력이 있던 소무였기에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의용군의 장수 장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놈들의 다음 행보가 문제로군요. 이곳 낙양을 탈환하려 할 수도 있으며, 방어가 허술해진 양양성을 함락시키고 송나라로 밀고 들어가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소무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휘나라가 양양을 노린다면, 도성인 개봉이 우리에게 노출되겠지요. 황제는 그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운 제독이 눈빛을 빛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개봉이 우리 손에 떨어진다면, 휘나라는 황하를 기준으로 양분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낙양을 먼저 정리하고자 할 것입니다.”
악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이 시작될 날이 머지않았으니, 시기적으로 출진은 그 이후가 될 것이오. 우리 의용군은 그동안 이곳에 주둔하여 다음 전투를 기다리겠소. 포나라는 어찌하겠소?”
진광 장군은 은근슬쩍 소무의 눈치를 살폈다.
봄이 오기 전까지 개봉에 얼마나 많은 적군이 집결할지 미지수였다.
소나라의 영토에 포함된 낙양을 방어하기 위해선 반드시 연합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무는 진광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 소나라는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오.”
단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앞서 진광이 요구했던 포나라의 내부적 갈등에 대한 묵인이었다.
진광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장기 주둔인 만큼 명분을 위해서라도 추가적인 보상이 필요했다.
“사실 저희도 이번 전투가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반년쯤 더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하지만 보급물자도 떨어져 가고, 파병 병사들에게 추가 녹봉도 지급해야 하는데 형편이 안되어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파병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대가이니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소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좌우를 향해 포권했다.
“모두 함께해준다니 진심으로 고맙소. 군자금은 우리 소나라에서 지원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최후의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대비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군사회의가 끝난 뒤.
소무는 어딘가를 향해 혼자서 걷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뒤쪽에서 일광이 달려왔다.
“대장, 어디가?”
“잠시 도성에 좀 다녀와야겠어. 볼일도 있고, 군자금도 마련해야 하니.”
“집에도 들를 거지?”
소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왜 물어?”
일광은 얼굴을 붉히며 쭈뼛쭈뼛하더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이, 이것 좀 초희 씨한테 전달해줘.”
손때가 진득하니 묻어 있는 서신이었다. 게다가 기밀문서라도 되는 양 밀봉까지.
어떤 서신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소무는 피식 웃으며 서신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러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 처제한테 꼭 전달해줄게.”
갈 길이 멀었다.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려 할 때였다.
“자, 잠깐!”
뒤를 보니 일광이 어색한 모습으로 거대한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한눈에 눈치챈 소무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왜? 답신도 받아달라고?”
“그, 그래 준다면 고맙지…….”
그러자면 시간이 조금 더 소비되겠지만, 얼굴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신 별일 없도록 잘 지키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
볼일을 마친 소무는 등을 돌려 쏘아져 나갔다.
먼 곳에서 우렁찬 일광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럼, 당연하지!”
* * *
아미산 천녀봉(天女峰).
아미파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도사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로 출입이 극히 제한된 곳이다.
지금 이곳을 한 명의 비구니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삼대제자가 말이다.
콰앙-!!!
우뚝 솟은 절벽의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먼지가 걷히자 거대한 구멍이 반장 깊이나 파고들어 있었다.
“후.”
상의를 천으로 칭칭 동여맨 비구니가 기수식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날렵하게 단련된 체형과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어깨의 근육. 열셋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몹시 위협적인 신체였다.
구파일방이 훗날을 대비하여 키우는 비밀병기. 아미파의 화령이었다.
뒤에는 검은 도사복을 입은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놀랍구나. 무극미리장을 열흘 만에 익히다니. 정파 무림의 최고 기재라는 말이 조금의 거짓도 없구나.”
무극미리장(無極迷理掌). 일인전승으로만 이어져 내려오는 공동파 최고의 장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비구니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는 없는지요?”
당돌하게 물어오는 화령의 모습에 태허진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어라 물었느냐?”
“제게 더 가르쳐줄 것이 없느냐 물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와 분위기였다. 무공을 완성하자마자 이렇게 돌변하다니.
태허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것이 눈에 살기가 그득하구나. 장문인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네게 공동파의 절학을 전수했지만, 난 지금도 이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화령의 한쪽 뺨에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가 꿈틀거렸다.
“그래서요?”
태허진인은 대답할 가치도 못 느낀다는 듯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운룡개의 말이 사실이로구나. 쯧쯧. 모두가 네게 속은 것이다.”
운룡개는 개방의 방주로 태허진인과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앞서 화령에게 개방의 최고 절학인 항룡십팔장을 전수한 바 있었다.
“대답하세요. 무엇을 속았다는 거죠?”
공동파의 태상장로를 향해 고작 아미파의 삼대제자 따위가 추궁하는 상황이었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태허진인도 지금은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훈육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화령은 무림맹의 역사에서 최연소로 화경을 이룬 천재적인 무골이었으며, 각종 영약과 함께 각파의 절기를 전수받은 상태였다.
“아미파의 장문인을 만나봐야겠다. 네가 영원히 강호에 나올 수 없도록 조치할 것이다.”
“그렇게 하시지요. 장로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화령의 말투가 또다시 변했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표정은 마치 다른 사람과도 같았다.
“……?”
“지금까지 각 문파에서 여섯 가지의 무공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제게 전수할 무공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요?”
“그 누구도 더는 네게 무공을 전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라.”
태허진인은 뒷짐을 쥔 채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막 한 걸음을 뗐을 때였다.
푸욱-!
무엇인가 화끈거리는 통증이 등 뒤를 파고들었다.
“크윽!”
태허진인은 복부 아래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아미파의 절학인 불광일선지에 당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은밀하고 빠른 기습이었다.
상처 부위가 붉게 달아오르며 그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네가 기어코…….”
순순히 죽어줄 태허진인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손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화령의 이마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쩌엉-!
이마를 후려친 오른손이 종소리와 함께 튕겨 나왔다.
마치 손목이 떨어질 것 같은 통증. 동시에 붉은 기운이 화령의 전신을 감싼 것을 보았다.
‘적문신공?’
청성파에서 전수한 절세신공으로 그 위력은 화산의 자하신공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자신의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 화령이 벼락처럼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금빛 기류에 휩싸인 오른손. 개방의 항룡십팔장이었다.
부상을 입은 그가 온전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대한 황금빛 용이 순간적으로 그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콰앙-!!
“쿠억!”
몸이 새우처럼 구부려진 태허진인은 입에서 핏물을 폭포수처럼 게워냈다.
“X팔, 늙은이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아? 더럽게 시끄럽네.”
기다렸다는 듯이 화령의 앞발이 그의 무릎을 꺾어버렸다.
콰직-!
“끄아악!”
화령은 강제로 무릎 꿇린 태허진인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동시에 오른쪽 손바닥을 사선으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일격에 끝장낼 심산인 듯했다.
“우리 손으로…… 악마를 만들었구나.”
그것이 그가 이승에서 뱉은 마지막 한마디였다.
퍼억-!
* * *
아미파의 공식전(共食殿).
삼대제자들의 전용 식당인 이곳에 때아닌 한기가 불어닥쳤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뭐야? 오랜만에 봤는데 아는 체도 안 하네.”
조금 전 태허진인의 시신을 유기하고 넘어온 화령이었다.
밥을 먹던 삼대제자들은 젓가락을 움켜쥔 채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비구니 넷이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화령아, 어떻게 된 거야?”
“특별훈련을 받는다며? 벌써 끝난 거야?”
화령은 자신을 따르던 패거리들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응. 성과가 좋다고 하산까지 허락받았어.”
아미파의 삼대제자가 하산을 허락받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덩치가 가장 큰 비구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산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 경험도 훈련이라 하더라. 무공만 강해서는 진정한 무인이 될 수 없다나.”
“누가 그러셨어……?”
“태허진인께서.”
태허진인이란 말에 비구니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공동파의 명망 있는 최고 원로였다. 아미파의 삼대제자들도 스승으로부터 그 이름을 들어봤던 터였다.
“와. 부럽다!”
“좋겠다. 잘 다녀와.”
말과는 달리 부러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비구니들은 더욱 무서워진 화령이 어서 사라지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부러워할 필요 없어. 너희들도 같이 갈 거니까.”
비구니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했다. 그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도 같이 가다니?”
“진인께서 기다리고 있어. 친구들도 데려와도 된다고 하더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비구니는 없었다.
상식에 벗어나는 말이었다. 아무리 명망 있는 무림맹의 원로라 할지라도, 아미파에서 허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배분이 높은 사부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잠깐만, 화령아. 사부님께 허락받아야 하잖아?”
그 순간 미소짓고 있던 화령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나와.”
독기 서린 눈빛으로 다가오라고 턱짓하는 모습은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거절한다면 험한 꼴을 당한 것이 불 보듯 뻔한 일. 비구니들은 하는 수 없이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러자 정색하고 있던 화령의 얼굴이 다시 방긋 웃었다. 게다가 다정한 목소리라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다들 아미파에 온 뒤로 처음 하산하는 거지?”
화령을 따라나서는 네 명의 비구니들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적이 드물어지자 키가 가장 큰 비구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진인께서는 어디에서 기다리셔?”
앞장서서 걷는 화령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팔까지 흔들어댔다.
“그분은 나중에 만날 거야. 그 전에 먼저 갈 때가 있어.”
“어, 어딜?”
“장안. 거기 있다더라.”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