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돌아온 망나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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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화 돌아온 망나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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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화 돌아온 망나니 (2)
2022.09.20.
장안성 살문의 본부.
아무것도 없는 어두침침한 창고였지만, 지금은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집무용 탁상과 지도. 무공 수련을 위한 훈련 도구들. 게다가 가장 안쪽에는 검은 토끼가 그려진 깃발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모두가 총관으로 임명된 양소청의 작품이었다.
패거리 중 나이가 가장 많았고, 살왕조차 놀랄 정도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아이였다.
양소청은 오늘도 본부에 나와 문파의 발전을 꾀하고 있었다. 이곳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있는 아이였다.
“앞으로는 살문의 이름을 절대 얘기하면 안 돼. 알았지?”
탁상에 앉아 있는 양소청의 앞에는 토끼가 새겨진 흑의를 입은 아이 둘이 마주 서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대련 수련을 준비하는 영영과 백상이었다.
“소청 언니. 그럼 우릴 뭐라고 불러야 해?”
양소청은 탁상 옆의 깃발을 살펴보고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소소네 엄마가 지어 주신 것으로 하자.”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영영과 백상도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이곳을 염탐하러 왔던 연설화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가곤 했다.
그때마다 장난처럼 부르던 이름이 있었다.
“흑묘파!”
“그래, 맞아. 언니 말 명심해야 해. 살문은 강호에서 원수가 많은 문파니까, 준비될 때까진 정체를 드러내선 안 돼.”
영영과 백상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총관 언니. 근데 밖에 누가 온 것 같아.”
양소청은 누군지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이 밝아진 얼굴로 문 앞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들어와, 얘들아!”
끼이이익-!
꾀죄죄한 몰골의 어린 거지 두 명이었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였으며, 허리춤에는 매듭이 한 개씩 묶여 있었다.
개방의 최하급 방도들인 일결제자들이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오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고개를 끄덕인 양소청은 거지들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러더니 탁상 밑에서 미리 준비해둔 만두 두 개를 꺼내 하나씩 나눠주었다.
“잘 찾아왔어. 배고프지?”
언제나 굶주려 있는 아이들이었다.
히죽 웃으며 게걸스럽게 만두를 해치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영영과 백상도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정도였다.
“근데 소청 누나. 우리한테 왜 잘해주세요?”
“이유가 있어야 해? 그냥 친구나 하자는 거지 뭐.”
개방의 거지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헤헤. 좋아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는 먹을 걸 주는 친구래요.”
양소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슬쩍 물었다.
“오늘은 재밌는 소식 없었어?”
개방의 어린 거지들이야말로 흑토끼파의 유일한 정보망이었다.
고작 일결제자들이 아는 정보가 얼마나 있겠는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였다.
일단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헤헤. 물론 있었어요. 오늘 시장에 어린 비구니들이 나타나서 상인들을 때리고, 음식을 훔쳐 달아났어요.”
비구니는 불도를 수련하는 여스님을 뜻한다.
어린 여스님들이 상인들을 폭행하고 도둑질까지.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무엇인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별일이 다 있네.”
“미친 비구니들이었어요. 관군들이 쫓아갔는데도 못 잡았대요.”
양소청은 깔깔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별 웃기는 일이 다 있네. 앞으로도 재밌는 소식 있으면 흑토끼파로 놀러와. 알았지?”
“네, 누나. 우리 이제 가볼게요. 일하러 가야 해요.”
개방의 거지들이 사라지자마자 양소청은 깍지를 끼고 고민에 잠겼다.
‘어린 비구니들이 상인을 때렸다는 것은 무공을 수련했다는 얘기인데. 관군까지 따돌릴 정도라면 확실해. 그것도 단체라면 대상은 한정되어 있겠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양소청은 영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영아, 뭐 짐작되는 거 없어?”
영영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소소와 함께 아미파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가 아니던가.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영영은 더는 도망치지 않았다.
“누군지 알 것 같아, 언니.”
이런 미친 짓을 벌일 만한 비구니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는가. 영영은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아미파지?”
“화령 언니 패거리…….”
“전에 네가 얘기했던 못된 아이들이구나.”
영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응. 소소를 잡으러 온 거 같아.”
잠시 고민하던 양소청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너희 둘은 지금 소소에게 가서 조심하라고 전해줘.”
“응. 알겠어.”
“금방 다녀올게, 총관 누나.”
* * *
집 마루에 앉아 있는 연설화는 과도를 움켜쥐고 복숭아를 조각내고 있었다.
“저녁에 또 넘어가야 한다고?”
그녀의 앞에는 소무가 가부좌를 틀고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최근 장안과 낙양을 정신없이 오가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전서구를 보내도 되었지만, 직접 움직이는 것이 수십 배나 빠르고 확실했기에 급할 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응. 갔다가 내일 또 와야 해.”
“뭐 때문에 그렇게 바쁜데?”
소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파병군들을 일 년은 붙잡아놔야 하는 상황이야. 그러자면 군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네.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야.”
소나라의 재정상태는 풍족한 상태였지만, 최근 구호 활동으로 지출이 많았던 탓에 관련 기관에서 승인이 지연되고 있었다.
설화가 꽃봉오리 형태로 조각낸 복숭아를 건네주며 물었다.
“얼마면 돼?”
“……응?”
“얼마가 필요하냐고. 군자금.”
소무의 목소리는 어둡기만 했다.
“은자 일만 냥 정도는 필요할 거야. 근데 왜?”
“난 또 뭐라고. 저녁에 양주산으로 올라와. 내가 줄 테니까, 일만 냥.”
“농담할 상황이 아니야.”
그는 아직도 아내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중원 제일의 갑부가 눈앞에 있음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아놓은 자금이 조금 있는 줄만 알았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낭군이 원한다면 언제든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굳이 숨길 의도는 아니었지만, 말할 필요도 없었기에 묻어두고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설화가 다시 무어라 얘기할 찰나였다.
벌컥-!
돌연 마당 앞의 대문이 열리며 낯익은 아이 둘이 나타났다.
토끼가 새겨진 흑의를 입은 영영과 백상이었다.
“우리 흑토끼들, 여긴 무슨 일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백상이 소무에게 다급히 물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소소 어디 갔어요?”
“시장에 갔을걸? 조금 전에 탕후루 사 먹으러 간다고 나갔어.”
“정말요?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눈을 마주친 백상과 영영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소무가 재빨리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놀아!”
이미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영영과 백상은 경공까지 펼치며 시장으로 달렸다.
“어떡하지? 괜찮을까?”
백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요즘 소소 엄청 강해졌잖아. 문주님이랑 대련해서 반각이나 버텼어.”
“정말이야?”
“응.”
살수들의 싸움은 찰나의 순간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살왕이 봐줬겠지만, 반각이나 버텼다는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그리고 영영이 기억하는 비구니들은 소소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소소가 강해진 만큼 화령 또한 강해진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시장에 도착한 둘은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머지않아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상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태웅방 위에.”
이 층 전각의 지붕 위.
비구니 넷이 팔짱을 낀 채 포진해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살펴보던 영영이 말했다.
“맞아. 쟤네들이야.”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는데?”
“저기엔 화령 언니가 없어서 그래.”
“얼마나 센데?”
“아미검수들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대.”
영영이 기억하는 화령은 아미파의 최정예 검수들도 몸을 사릴 정도였다.
지금은 장로급이 아니라면 통제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텐데.”
잠시 고민하던 영영이 결심을 굳혔다.
“내가 유인할게. 너는 소소를 찾아서 본부로 먼저 돌아가 있어.”
“괜찮겠어?”
“응. 걱정 마.”
신호를 주고받은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로변으로 나온 영영은 은근슬쩍 자신의 기(氣)를 드러내놓고 다녔다.
그것은 곧바로 지붕 위의 비구니들에게 포착되었다.
보는 눈이 많아서일까? 반응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챈 영영은 시장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것 봐라? 머리도 길렀네.”
뒤를 돌아보자 비구니 넷이 도망칠 만한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담벼락을 도약해서 넘으면 그뿐이지만, 영영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미파를 탈출하기 전까지 자신을 폭행하던 얼굴들을 말이다.
“아미산에서 같이 도망쳤던 꼬마년 어딨어?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화령이 무지 화가 나 있거든.”
“내 친구는 왜 찾아요?”
체구가 가장 큰 비구니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몸집이 영영의 두 배나 되었다.
곧이어 돼지 족발 같은 손아귀가 머리를 틀어쥐기 위해 다가왔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영영이 아니었다.
휘익-!
상체를 슬쩍 비틀자 퉁퉁한 손가락이 한 치 차이로 비껴 지나갔다.
“어쭈, 피했어?”
다시 한번 시도해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영영의 움직임은 무척 달라져 있었다. 살문의 보물인 생유환을 복용하고 환골탈태를 이룬 아이였다.
비구니들의 공격은 너무나도 느릿하게 보였고, 곳곳엔 허점투성이였다.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영영이 주먹을 움켜쥐고 때리는 시늉을 했다.
“히익!”
반사적으로 나오는 상대의 방어 동작. 그러나 이어지는 공격은 없었다.
의지와는 다르게 때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당해오며 생겨난 공포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해? 한 번에 덮쳐.”
사방에서 비구니 넷이 한 번에 달려들었다.
수세에 몰린 영영은 양팔로 얼굴을 방어하며 정신없이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퍽-! 뻐억-!! 퍼퍽-!!!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무도 검을 뽑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좌우에서 주먹과 발이 무차별적으로 날라왔다.
이렇게 맞는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육체적인 통증보다는 떠올리기 싫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영영의 기억은 곧이어 아미파로 찾아온 소소를 떠올렸다.
‘그만하고 싶어, 소소야. 나 어떻게 해야 해……?’
어느 순간 소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눈빛이 변한 영영은 작은 음성을 천천히 토해냈다.
“나쁜 악당들은 두들겨 맞아야 한다고 했지…….”
그 순간 작은 주먹이 처음으로 움직임을 발했다.
콰앙-!
체구가 가장 거대한 비구니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단 한 방이었다. 입술과 코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기절했는지 동공이 풀려있었다.
정신없이 공격하던 나머지 셋이 화들짝 놀라 한 걸음을 물러섰다.
“너, 너 뭐야?”
“지금 어떻게 한 거야? 미쳤어?”
방어 자세를 푼 영영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그 이후는 거리낄 게 없었다.
“소소 말이 맞아요. 언니들은 좀 혼나봐야 해요.”
그 순간 영영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그 움직임은 활에서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작은 손바닥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며, 가까이 있는 비구니의 턱을 강타했다.
콰앙-!
상대는 비명조차 없이 다리가 풀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의 비구니가 쓰러지기도 전에 좌측에서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다.
여유롭게 손목을 낚아챈 영영은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꺄악!”
새우처럼 구부려진 상체. 그리고 자라처럼 빠져나온 목을 손날이 강타했다.
쾅-!
마지막 남은 비구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너, 너 지금 뭐야. 우리가 누군지 몰라?”
“잘 알아요. 그동안 나를 매일 때리고 괴롭혔잖아요.”
영영이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눈앞의 비구니도 함께 뒷걸음질 쳤다.
쿵-!
담벼락에 등이 부딪친 소리였다.
잠시 후 비구니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그것은 결코 눈앞의 영영 때문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얼어버릴 듯한 숨 막히는 살기.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 영영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지랄들 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