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돌아온 망나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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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화 돌아온 망나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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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화 돌아온 망나니 (3)
2022.09.21.
영영은 온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그토록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화령이 한 발자국씩 다가올수록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네, 영영이. 잘 지내고 있었지? 더러웠던 얼굴도 이제 예뻐졌고 말이야.”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더욱 무서웠다. 아미파에서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언니? 아미파에 언니라는 말도 있었나?”
“아니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지만, 도망칠 수가 없었다. 다리가 움직여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코앞까지 다가온 화령은 상체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영영은 마치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얼굴에 흉터 보여?”
한쪽 뺨에 길게 자리한 자상의 흔적. 귀밑에서 턱까지 내려와 있는 자국이 어찌 보이지 않겠는가.
“……네.”
“원래 있던 상처인데 환골탈태를 겪으니 없어지더라고. 잊지 않으려고 내가 다시 그었어.”
“……?”
화령은 방긋 웃으며 손을 천천히 내뻗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영영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손아귀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에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전신이 오싹해질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네 친구. 지금 어디에 있는지 좀 말해 줄래? 내가 널 죽이기 전에 말이야.”
“몰라요.”
단호한 대답에 화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겠네.”
영영은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화령의 동작이 압도적으로 빨랐다.
붉게 달아오른 손아귀가 섬전처럼 움직이며 영영의 머리를 후려쳤다.
콰앙-!
이 장을 튕겨 날아간 영영은 벽에 등을 부딪치고는 축 늘어졌다.
“으윽.”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한쪽 뺨을 적셔왔다.
처음으로 느껴본 죽음의 공포. 그것은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든 고통이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나 어떡해.’
생각과는 달리 온몸에 힘이 풀려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양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도망가고 싶지? 어디 한번 시도해봐. 다리를 잘라 줄 테니.”
어느새 영영 앞에 우뚝 선 화령은 천천히 손바닥을 치켜세웠다.
“혹시라도 중간에 말하고 싶어지면 한 손을 들어 올려.”
말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때린다는 말이었다.
“안 무서워요. 죽어도 얘기 안 할 거예요.”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치켜세워진 손바닥은 망설임 없이 영영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영영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각오를 다졌다.
퍼억-!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지만,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눈을 살며시 뜬 영영은 웃고 있는 화령의 얼굴을 보았다. 마치 악귀의 미소 같은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내 친구 괴롭히지 말라고 했죠!”
소소가 나타난 이상 영영은 이제 화령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제 발로 찾아왔네. 나 기억하지?”
벽면에 기대어 쓰러진 영영의 모습에 소소는 화가 났다. 미간이 가운데로 모이며 내 천(川)이 그려질 정도로 말이다.
“기억나요. 못생긴 악당 언니.”
화령과 마주 선 소소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초인의 경계선이라고 불리는 화경(化境)을 넘어선 것을 직감한 것이다. 화령도 소소가 같은 경지라는 것을 아는 듯했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잠시 뒤면 살려달라고 울부짖게 될 거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령의 전신이 붉은빛에 휩싸였다. 청성파에서 전수받은 적문신공이었다.
소소는 묵묵히 양손을 들어 올리며 파산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때 뒤에서 백상의 전음이 들려왔다.
- 소소야. 영영이가 많이 아픈 것 같아.
창백하게 질린 영영의 얼굴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소소도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 내가 싸우고 있을 때 업고 도망쳐.
- 알았어. 의선당에 가서 할아버지한테 도와달라고 할게.
삼 장 간격으로 마주 선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격돌을 준비했다.
“시작해볼까?”
화령이 턱짓으로 다가오라고 도발했다.
서로가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타앗-!
동시에 쏘아져 나간 두 개의 신형은 마치 자석처럼 붙으며 폭음을 일으켰다.
콰앙-!
그것이 시작이었다. 둘은 정신없이 공수를 주고받으며 난타전을 벌였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천부적인 무(武)의 자질을 타고난 아이들이었다. 목숨을 건 무림의 고수들이 펼치는 생사결보다 치열했다.
일합을 주고받을 때마다 폭죽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뿜어져 나왔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자 백상이 영영을 안아 들고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달아났다.
아미파의 비구니들도 휩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쩌엉-!
거센 굉음과 함께 소소의 신형이 지면을 끌며 주르륵 밀려났다. 힘에서 밀린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해 화령이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황금빛 기류에 휩싸인 오른손이 소소의 전면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개방의 방주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항룡십팔장의 초식 중 항룡유회(亢龍有悔)였다.
이에 맞서 소소도 내력을 모아 주먹을 내뻗었다. 파산권 중 위력이 가장 강한 초식인 폭렬신격(爆裂迅擊)이었다.
콰아아앙-!
격돌과 동시에 소소는 또다시 뒷걸음치며 물러섰다.
“윽!”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밀려난 것이다.
당황스러웠으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문주님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밀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소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고 화령이 검지를 재빨리 내뻗었다. 아미파의 절학인 불광일선지를 펼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손가락 끝에서 쏘아진 붉은 빛줄기가 소소의 복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푸욱-!
화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공격이 허상을 가른 것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교 최강의 경신법인 천마환영보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던 순간이었다.
겨우 피해낸 소소는 호흡을 고르며 허리춤에서 날이 없는 소검(小劍)을 뽑아 들었다.
화령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작은 소소였다. 당연히 팔도 더 짧았기에 근접전투는 타격 거리가 짧아 불리했던 것이다.
검을 움켜쥔 모습에 화령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검법으로 하자고? 뭐 이것도 재밌겠지.”
검을 어깨 위로 치켜세운 소소는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살문의 절학 중 하나인 추혈살무(追血殺舞)였다.
검을 뽑아든 화령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검 끝이 태극(太極)을 그리며 소소가 움직이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구파일방의 검술 중 최고로 쳐주는 검법으로 무당파에서 전수받은 태극혜검이었다. 아직 화후가 극성에 이르진 못했지만, 제법 그럴싸한 수준이었다.
태극 안에서 죽음의 춤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합에 수십 번이나 공수를 주고받으며 격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쏴아아악-!
그리고 다시 빛이 사그라질 때에는 그 자리에 단 한 명만이 서있었다.
“미쳐버리겠네.”
화령은 검을 검집에 꽂으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비구니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화령아, 어떻게 된 거야?”
“놓쳤어. 도망치는 기술만큼은 지존이네.”
“그 짧은 순간에?”
검성의 절기인 섬전비영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할 상황이었다.
짧은 격돌이었지만,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절세무공들이 무수히 등장했다. 그것도 아이들의 손에서 말이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는 명확히 갈려 있었다.
“오늘은 이쯤 해두지.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럼 이제 돌아가는 거야?”
“일단은. 어서 갈 준비나 해. 관군이 오고 있으니까.”
“알았어.”
소나라 관군의 호각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화령과 비구니들은 자리를 벗어나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소소가 도착한 곳은 궁성의 의선당(醫善堂)이었다.
영영은 가장 안쪽의 병상에 몸을 뒤집고 누워있었다. 의료부대의 모청 대장이 직접 침을 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영영이 괜찮은 거죠?”
“제때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조치를 마쳤으니,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게 깨어날 게다. 그런데 대체 너희들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게냐?”
아이들이 다칠 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도가 지나친 흔적이었다.
이번 기회에 엄하게 교육을 하리라 다짐한 모청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들, 한 번만 더 이런…….”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이미 소소가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의선당에서 백여 장이 떨어진 골목길.
어깨가 축 늘어진 소소는 터벅터벅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처음으로 맛본 패배가 너무나도 억울했기 때문이다.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믿었던 살문의 비기마저도 말이다.
잠시 후 가까운 곳에서 노점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자주 사먹었던 단골 가게였다.
탁상에 자리를 꿰차고 앉은 소소는 우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저씨 우유 한잔 주세요!”
“오냐, 조금만 기다리거라.”
중년인에게서 큰 우유 잔을 건네받은 소소는 목이 탄다는 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곧이어 단숨에 비운 잔을 탁상에 쿵 내려놓고는 연신 씩씩댔다.
“분해……. 너무 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마음을 굳힌 소소는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도착해서는 문을 벌컥 열었다.
콰앙-!
마루 맡에 앉아서 다정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울먹이는 소소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기가 가득 들어찬 눈망울은 언제든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우리 딸, 왜 울어?”
“무슨 일 있었니? 어서 엄마한테 얘기해 보거라.”
소소는 한달음에 달려가 설화의 품에 안겼다.
서럽다는 듯이 펑펑 울어댔다.
“흐이잉…….”
지금껏 딸이 이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인데?”
한참을 흐느끼던 소소는 분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나 무공 알려주세요…….”
옆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소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갑자기 무공이라니?”
소소는 다시 아버지한테 가서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약한 거 말고 쎈 걸로요…….”
소무와 설화는 황당하다는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아이가 익힌 무공 중에 약한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뭘 알려줄까? 각법이든 권법이든 말만 하거라.”
그런 것 따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소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필살기…….”
난데없이 필살기를 알려달라니. 황당함이 끝이 없었다.
딸의 등을 토닥여주던 소무는 아내의 전음을 들었다.
- 아무래도 누구한테 당한 모양이야.
-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소소가 누구한테 두들겨 맞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무림십대고수나 되어야 도달할 수 있는 화경에 도달한 아이였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 확실해.
중요한 것은 흉수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지만, 부모로서 그냥 두고만 볼 수도 없지 않은가.
소무는 아내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아이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딸. 누가 때렸어? 누가 우리 예쁜 소소를 이렇게 때렸을까나.”
“히잉……. 말 안 할래요.”
소소는 무척 자존심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무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설화에게 물었다.
- 연매 의견은 어때?
- 무공을 알려달라는데, 알려줘야지 뭐. 배우다 보면 분이 풀릴 거야.
- 적당한 게 있어?
그렇다고 자신의 절기인 탈혼검법이나 파천검법을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대를 죽이는 데에만 특화된 살상력이 강한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무와는 달리 설화는 무엇인가 방도가 있는 듯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 우리 바쁘신 낭군님이 딸한테 무공 알려줄 시간이 어딨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맡겨줘.
그녀는 은근슬쩍 반쯤 열려 있는 소소의 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롱 위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