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만물의 근본이 같다면 (1)
(234/250)
234화 만물의 근본이 같다면 (1)
(234/250)
234화 만물의 근본이 같다면 (1)
2022.09.22.
일가족은 양주산의 수련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엔 혼인 전까지 연설화가 거주했던 원목 집이 있었다.
소무는 조용히 아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벽면을 더듬거리는 모습을 말이다.
이미 기(氣)의 흐름으로 안쪽이 비어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일만 냥이 필요하다고?”
“……응, 그렇긴 한데.”
“기관이 고장 났나 보네.”
소무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아내가 벽장을 뜯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부아아악-!
찢겨나간 벽면 내부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설화가 손가락을 튕기자 가장 상단에 있던 상자의 윗면이 동시에 열렸다.
벌컥-!
그 순간 소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상자마다 은자가 수북이 가득 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산량이 많지 않아 구경조차 힘들다는 금자 상자까지.
“도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
산전수전 다 겪어온 일평생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돈은 본 적이 없었다. 나라의 국고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설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슬쩍 으쓱했을 뿐이었다.
“전에 얘기했잖아. 투자해서 좀 벌었다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
분명 몇 번 얘기한 적은 있었지만 한 귀로 흘린 기억이 있었다.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소무는 상자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군자금이 문제가 아닌데? 이 돈이면 장안성의 구호자금에 보태고도 남겠어.”
“집안의 재산을 막 가져다가 거덜 내려고 하네.”
소무가 이렇게 흥분해서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말과는 달리 설화도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미소짓고 있었다.
“베푸는 미덕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덕목이잖아. 이제 연매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고민했던 일이 한순간에 해결되었으니 마음이 개운할 수밖에. 소무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건 어떻게 가져갈 거야?”
“추밀원에서 관원들 올려보낼 테니까 내어줘. 난 어서 장안으로 올라가 봐야겠어.”
더는 이곳에 머무를 여유가 없었다. 비록 소강상태이긴 했으나 사령관이 자리를 이탈하는 것 자체가 큰 위험요소였으니.
“바로 올라갈 거야?”
“처제한테 잠시 들렀다가. 받아갈 게 있거든.”
일광에게 가져가 줄 답신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설화는 깔깔 웃었다.
“얌전한 것들이 할 건 다 하고 있네.”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딸이나 한번 안아주고 출발해야겠어.”
소무와 설화는 집 밖으로 나와 소소를 찾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나무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다리를 오므리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토록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일까? 어느새 다가온 산군이 혀로 전신을 핥아주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간 소무는 딸아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딸. 필살기를 배우고 싶다고?”
“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소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친구가 못생긴 언니한테 두들겨 맞았는데, 혼내주지도 못하고 도망쳤어요…….”
흉수가 누구인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소소가 감당하지 못할 상대가 장안에 누가 있겠는가. 무림맹의 고수들은 대부분 낙양성에 있었다.
무림의 인물이 아니라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설마 살왕이?’
소무는 고개를 내저었다. 능력은 있었지만, 그가 아이를 때릴 성품이 아니란 것쯤은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새로운 인물이라고 봐야 했다.
어쨌거나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좀 더 강한 호신용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필살기(必殺技)는 제외하고 말이다.
“필살기는 사람을 죽이는 기술인데?”
“나는 안 죽이고 쓸 수 있어요.”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 무엇이 되었든 그냥 강한 무공을 배우고 싶은 것이리라.
뒤를 돌아보니 설화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적당한 게 있을까?”
막상 물어보긴 했지만, 그녀가 아는 상승 무공은 대부분 마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잔재주를 알려 줘봐야 성에 차지도 않을 터였다.
“있지.”
“마공은 안 돼…….”
설화가 생각하는 무공은 마공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어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든 소무는 책의 표지를 살펴보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래신장? 이런 가짜 서적을 왜 가지고 다녀?”
소무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조차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손오공을 제압하기 위해 석가여래가 펼쳤다는 전설상의 무공이었으니.
“진본이야.”
소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내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책장을 한 장씩 펼쳐보며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잡상인한테 사기당한 모양인데, 여래신장이 정말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
순간적으로 소무의 몸이 흠칫했다.
책에 적힌 글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기 때문이다.
현경의 깨달음을 가진 그는 구결만으로도 무공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무공서적에 적힌 글귀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소무가 말문을 열지 못하자 설화가 바짝 다가서며 설명해주었다.
“소림사에서 얻었어. 대웅보전의 부처상 속에 숨겨져 있더라.”
이런 절세의 무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무공에 관심을 끊은 그녀라지만,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걸 왜 이제 얘기해?”
“장롱 위에 올려놓고 잊고 있었지 뭐. 어차피 우린 익히지도 못해.”
잊고 있었다는 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소림사에 돌려주자고 할까 봐 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소무는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여래신장을 살펴보느라 온 정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존재할 수 없는 무공이야. 정말 이것이 가능하다면 현세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을 제압할 수 있어.”
“그런 것 같더라. 익히기만 한다면 대적할 자가 없을 거야.”
그때였다.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소소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한 것이란 걸 직감한 것이다.
“정말이에요? 얼마나 센 무공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했던 아이가 아니던가.
큰 눈을 끔뻑이면서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답하는 소무는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희대의 절세 무공이야. 하지만 우리 소소는 익힐 수가 없겠구나.”
익힐 수 없다는 말에 소소의 얼굴이 금세 울상으로 변했다.
“왜요? 나도 배우고 싶어요, 여래신장…….”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소무는 서책의 첫 장을 펼쳐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여래신장 앞에서는 그 어떠한 악(惡)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불심으로 쌓은 내공으로만 익힐 수 있으며, 순백(純白)의 마음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무공을 펼칠 수가 없다.』
“우리 소소의 마음씨는 눈처럼 깨끗하지만, 불가의 심법으로 내공을 쌓지 않았기에 펼칠 수가 없어. 안타깝지만…… 아버지가 보기에도 틀림이 없는 것 같구나.”
무리해서 익히려고 했다간 주화입마에 빠져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일까? 소소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흐이잉. 아버지, 나빠요…….”
자신의 허리춤에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우는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니.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다른 것 알려줄까? 비룡검법(飛龍劍法)은 어때? 양화권법(陽化拳法)도 있어.”
소싯적 배워두었던 잔기술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쉽게 속아 넘어갈 소소가 아니었다.
“싫어요. 나 여래신장 배우게 해주세요. 히잉…….”
그때 설화가 다가와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한테 방법이 있어.”
“정말요?”
고개를 끄덕인 설화는 소매에서 작은 옥함을 꺼냈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작은 구슬. 수행의 경지가 등선할 정도에 이르러야 몸속에 생긴다는 불사리(佛舍利)였다.
“소림사가 바로 보물창고더라. 이런 진귀한 것도 굴러다니고 말이지.”
“잠깐만.”
설화가 의문이 가득한 눈초리로 소무를 바라보았다.
“왜?”
“그걸 복용한다면 불가의 내공을 얻을 수 있으니 익히는 것은 문제없을 거야. 하지만 소림사의 물건을 우리가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서. 주인에게 돌려줄지 생각 좀 해보는 게 좋겠어.”
부부가 언제나 다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티격태격도 하는 법. 설화도 이번만큼은 전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생각은 무슨 생각? 서책에도 적혀있잖아. 인연이 되는 자가 익힐 수 있게 모두 안배해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 소소가 주인이야.”
소무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야 말았다.
이미 소소가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서 아내는 이미 딸의 작은 목구멍을 향해 구슬을 밀어 넣고 있었다.
“아~~.”
아버지가 빼앗기라도 할까 봐 소소는 재빨리 삼켜버렸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웅장한 황금빛 기(氣)가 전신을 감싸며 아지랑이 피기 시작했다.
소무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못 살겠군. 어서들 앉아 봐.”
이렇게 된 이상 불사리의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려야 했다.
현경과 탈마가 동시에 운공을 도와준다면 확실히 십 할의 약효를 그대로 얻을 수 있을 터. 부부는 가운데 소소를 두고 앞뒤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은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눈치 빠른 산군이 호법이라도 서려는 듯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일식경이 지났을 즈음 소무가 탄성을 내뱉었다.
“불사리의 주인이 대단한 고승이었나 봐. 내공이 삼 갑자는 불어나는 것 같아.”
“이 정도면 미래의 천하제일고수는 따 놓은 당상이겠어. 앞으로 딸한테 맞기 싫으면 잘 보여야겠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소소는 이미 기분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운공을 하는 와중에도 보조개를 피어 올리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거사가 마무리되자 소소는 양팔을 벌리고 풀밭을 방방 뛰어다녔다.
“히히히.”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 소소가 지나는 자리로는 풀떼기 하나 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개가 매우 달라져 있었다.
기존의 성질은 무(無)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웅장하고 장엄한 기운이 은은히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으며, 포근하고 자애로운 느낌이었다.
소무는 무공비급을 설화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소소가 이해하기 쉽게 구결을 해석해주면 속성으로 익힐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설화는 소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 이제 여래신장 익힐 준비 되었어?”
소소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불타올랐다.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다가오며 힘차게 소리쳤다.
“네, 준비되었어요!”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던 소무는 모녀에게 다가가 작별을 고했다.
“당분간은 오지 못할 거야. 겨울 동안 대비해야 할 일이 많거든.”
“겨울이 지나서 온다는 얘기로 들리네.”
“어떻게든 다음 전투에서 끝장을 볼 계획이야. 그때부터는 우리 가족이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어.”
항상 함께 지낸다는 말에 소소는 무척 기뻐했다.
“정말이에요, 아버지? 그럼 이제 매일 아버지랑 놀 수 있어요?”
“그럼~. 우리 소소가 원한다면 말이지.”
“히히. 너무 좋아요.”
소무는 아내와 딸을 한 번씩 안아준 이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전장으로 나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