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만물의 근본이 같다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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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화 만물의 근본이 같다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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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화 만물의 근본이 같다면 (2)
2022.09.23.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겨울이 찾아왔다.
연설화는 소소의 무공 수련을 도와주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으며, 소무는 낙양의 방어선 구축에 여념이 없었다.
낙양의 성벽 적루 위. 소무는 뒷짐을 쥔 채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함박눈이 거침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눈송이는 그의 옷깃에 닿기도 전에 모두 소멸하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무엇이 그리도 그리우십니까?”
옆을 보자 백약 부장이 다가와 기립하고 있었다. 산와족 출신의 무사였으며, 소소의 친구인 백상과 백아의 아비였다.
“눈치가 대단하군. 어찌 알았는가.”
“후후. 얼굴에 다 나와 있으십니다. 장안에 계신 부인과 딸이 보고 싶으시다고 말이지요.”
소무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잘도 놀려대는군.”
“맞습니다. 저도 아이들이 보고 싶지만, 꾹 참고 있습니다.”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고. 모두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일이니.”
“예. 이 지옥 같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만으로 충분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본론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런 얘기나 나누자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용건이지?”
“랑아대의 정찰보고서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한 달 전 일광은 랑아대를 이끌고 정보 수집을 위해 적국으로 떠난 바 있다.
첩보부대가 따로 있지만, 적들의 경계가 워낙 강화되었기에 그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들이 어떤 정보를 보내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희소식이로군. 어서 가서 만나보지.”
소무와 백약은 성벽에서 벗어나 군영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백성들의 모습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는 굶주리는 자를 찾아보는 것이 힘들 정도였으며, 도시는 빠른 속도로 생기를 되찾아갔다.
섬서에서부터 황하를 통해 구호물자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설화가 헌납한 막대한 자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저씨!”
천진난만한 사내아이 한 명이 탕후루 두 개를 들고 뛰어 왔다.
과거 낙양을 정찰할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아이였다.
전란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힘겹게 버텨오던 아이가 이제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오랜만이구나. 뭐가 그리 신이 났어?”
“오늘 평화원에 다녀왔거든요! 용돈도 나눠줬어요. 헤헤.”
평화원은 낙양의 궁성에 새로 설립한 보육시설이었다.
아내에게 받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넘쳤다. 아이들에게 용돈이나 선물을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후후. 좋은 소식이네.”
“아저씨, 이거 하나 드세요. ”
앙증맞은 손이 꼬치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딸이 좋아하는 간식으로 소무 자신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탕후루라…….”
얼떨결에 받아든 그는 한 입을 물어보았다. 산사나무 열매와 함께 버무려진 꿀이 무척이나 달콤했다.
“맛있죠?”
“응. 맛이 괜찮구나”
그때 뒤쪽에 다른 아이들이 놀자고 손짓하며 다가왔다.
“히힛. 나중에 또 봬요, 아저씨! 친구들이랑 궁성을 구경하기로 했거든요.”
소무가 고개를 끄덕일 찰나, 아이는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가벼운 걸음걸이를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뛰어놀아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옆에서 지켜보던 백약 부장이 흐뭇한 미소로 한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이동하시지요. 모두들 장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너무 지체했군. 어서 가지.”
소무와 백약은 한달음에 군영으로 향했다.
군사회의실에 도착하자 연합군의 지휘관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입구 근처에 있던 양강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그를 안내했다.
“오셨습니까, 장군. 어서 앉으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상석에 앉아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국의 장수들은 물론, 포나라와 의용군. 그리고 무림맹의 원로들까지 핵심인물들이 모두 착석해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들 표정이 어둡군요. 무슨 일입니까?”
포나라의 진광 장군이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랑아대의 첩보 내용이 사실이라면 최악의 상황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랑아대의 백부장 현정이 다가와 정찰보고서를 내밀었다.
묵묵히 내용을 살펴보던 그는 황당하다는 듯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용이 변할 리가 없었다.
“각지에서 휘나라의 수도인 개봉으로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가 이백만이 넘는다고……?”
이백만이면 소나라의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숫자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개봉의 정규군은 아무리 많아 봐야 십오만을 넘기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도대체 이만한 병력을 어디에서 끌어모으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자신의 직속 부대인 랑아대에서 거짓 보고를 올릴 리도 없었다.
현정이 굳은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개봉성은 이미 병사들이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이제는 성 밖으로 야전 막사가 끝없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너무나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어딘지 모를 찝찝함이 앞섰다.
“그렇게 많은 병력을 비밀리에 양성할 수는 없어. 자세히 얘기해 봐.”
현정은 심호흡을 한번 내쉬고는 좀 더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대다수가 훈련조차 받지 못하고 강제로 징집된 양민들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병영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포나라의 장수 몇 명이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징집병들이야 아무리 많아도 우리의 상대가 안 됩니다.”
“암요. 게다가 어마어마한 병참이 소요될 테니, 오히려 시간을 끌면서 버티면 알아서 굶어 죽을 겁니다.”
우두득-!
누군가가 주먹을 움켜쥐는 소리였다.
의용군의 대장 악비.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양손까지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백성들이 다 죽고 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대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말 한마디 없이 지켜보던 소림사의 정명 방장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저희 무림맹도 악비 장군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무차별적인 학살에 무슨 정의가 있겠습니까.”
포나라의 대표인 진광 장군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럼 이대로 앉아서 당하겠다는 말이오?”
연합군의 진영들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것을 감지한 소무가 내용을 일단락지으며 화두를 돌렸다.
“물론 죄 없는 백성들을 이렇게 죽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니, 방도를 찾아봅시다. 그리고 정찰보고서에 적들이 회룡포의 기술을 다시 손에 넣었다는 내용이 있군요.”
회룡포는 서역의 기술로 만들어진 신형투석기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위력은 다른 장수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악비의 부관인 장헌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관문이나 성벽도 소용이 없겠군요. 고립된 곳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정면에서 한판 대결을 벌이는 것이 더욱 유리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고려해보고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 대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무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문 앞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밖에 무슨 일인가?”
잠시 후 군사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장교 한 명이 나타났다.
“장군. 누가 찾아왔는데, 자신이 고려에서 온 관원이라 합니다. 단신으로 휘나라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왔다고…….”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송나라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운 이웃 국가였다. 오랜 기간 고려의 서해를 통해 무역이 이루어져 왔으나, 임안이 함락되며 해상 무역이 단절된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곳의 소식이 궁금했기에 돌려보낼 이유가 없었다.
“배포가 대단한 인물이군. 평범한 관원이 아니니 어서 안으로 모셔라.”
잠시 후 장교가 고려의 장수 한 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장대한 기개와 범상치 않은 눈빛. 그리고 등 뒤에는 거대한 양손검이 있었다.
그는 기라성같은 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이곳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화경(花境). 그것도 극을 이룬 최상급의 수준이었다.
그는 입구에 서서 당당히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백두병단의 대장인 문수라 하오.”
백두병단(白頭兵團). 모두가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다.
쌍수검(雙手劍)을 움켜쥔 고려군의 특별공격대. 그들은 전장에서 무적이었고, 적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포나라의 진광 장군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고려 또한 지금 휘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소? 전장에 있어야 할 고려의 제일 무장께서 어찌 이곳까지 왔는지요?”
“반드시 전해야 할 소식이 있기에 찾아왔소. 그리고 고려의 제일 무장은 내가 아니오.”
“……?”
문수는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 고려군의 선봉장이신 척준경 장군께서 사묘아리를 쓰러트렸소.”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에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사묘아리가 누구인가. 수년 전부터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사령관이 바로 그자였다.
또한 현경의 고수로 알려져 있으며, 완안후이와 함께 휘나라의 양대 맹장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서로를 향해 눈을 끔뻑이던 지휘관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동시에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하하하하!”
“고려가 해낼 줄 알았어!”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장내의 분위기가 몹시 밝아졌다.
잠시 후 소란이 사그라들자 소무가 고려의 장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고려는 어찌할 생각이오?”
“선봉장께서 비록 사묘아리를 쓰러트리셨으나, 부상이 심해 당분간은 운신이 힘들 것 같소. 또한 오랜 전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우니, 요동성을 기점으로 방어에 전념하라는 방침이 내려졌소.”
고려는 열세인 상황에서 한 치의 밀림도 없이 치열한 접전을 계속해왔다. 현재 상황에서 역공을 가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기대 이상으로 제 역할을 다 한 셈이었다.
“하지만 고려를 지탱하던 맹장이 부상당한 이 틈에 휘나라가 재침공을 감행한다면 위험하겠구려.”
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각적으로 답했다.
“나는 말을 돌려 하는 성격이 되지 못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부탁드리겠소.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당신들의 전쟁을 끝내주시오.”
휘나라의 양대 맹장이 모두 쓰러진 상황이었다.
궁지에 몰린 황제는 어느 곳이든 서둘러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척에 있는 낙양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으며, 후방의 고려를 먼저 정리하려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전에 연합군에서 행동을 개시해달라는 의미였다.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대범함이 소무를 감탄시켰다.
“휘나라의 화살이 고려로 돌아간다면 전쟁은 다시 장기전이 되지 않겠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치 마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소.”
문수는 소무의 확고한 표정에서 진심을 읽었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긴장이 조금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전할 소식은 그것뿐이오.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는 처지이니 그만 조국으로 돌아가야겠소.”
“고맙소. 우리 또한 당신들 덕분에 한시름을 놓게 되었으니.”
연합군의 장수들과 고려의 장수는 서로 포권을 건네며 짧은 만남의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