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화 광명을 비추다 (1) (237/250)


237화 광명을 비추다 (1)
2022.09.25.


여래신장을 완성한 소소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히히. 이제 됐어.”

힘찬 발걸음은 양주산을 내려가 성내로 향했다.

그동안 정신없이 무공을 수련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지냈다.

친구들을 못 만난 지 무려 반년이 흘렀지만, 마치 열흘도 지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장안성 흑묘파의 본부.

예상대로 안에서는 세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소소는 기쁜 마음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얘들아!”

반가운 목소리에 영영과 백상이 동시에 달려왔다.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방방 뛰며 기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소소야?”

“산에서 무공수련하고 있었다며? 보고 싶었어.”

소소의 얼굴에도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히히히. 나도 보고 싶었어!”

흑묘파의 호법들인 영영과 백상도 놀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갈무리된 안광과 가벼워진 움직임을 보니 그동안 무공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소소와는 경지의 차이가 달랐기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탁상에 앉아있던 총관 양소청도 다가와 소소를 반겨주었다.

“오랜만이야, 소소야. 잘 지내고 있었지?”

“응! 소청 언니도?”

양소청의 나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두 살이 많아 의젓했지만, 체구가 워낙 작았기에 같은 또래로 보였다.

“그럼. 마침 잘 왔어. 다들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

그동안 본부에는 좀 더 많은 물품이 갖춰져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 앉을 작은 탁상까지 있을 정도로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함께 간식도 먹으며 재회를 즐겼다.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양소청이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개방 애들한테 들었는데, 이곳으로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모이고 있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후기지수라니?”

아이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곧 있으면 낙양 부근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거야. 배분이 낮은 제자들이 경험을 쌓기 위해 보조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더라.”

“정말?”

“부럽다…….”

아이들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곳에 있는 자신들의 부모님들을 돕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상의 아버지인 백약 부장이나, 영영이 의부(義父)로 따르는 일광이 소무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양소청이 몸담은 양가장의 남자들도 대부분 그곳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앞으로 벌어질 전투는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우리도 간접적으로 돕는 게 어떨까 해.”

양소청은 중원에서 제일가는 관상과의 딸이었으며, 천문학과 사서삼경을 터득한 천재적인 아이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두 눈에 넘치는 정기는 깊은 호수와도 같았다.

아미파 출신의 영영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우리도 거기 낄 수 있어?”

“흑묘파의 이름으로는 참여할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해?”

“강호에 명망 있는 자를 우리 후견인으로 내세우면 가능할 거야.”

“후견인? 그런 분이 누가 있어?”

양소청은 씨익 웃으며 아이들의 뒤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계시잖아, 우리 문주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칠흑처럼 짙은 흑의를 입은 남성이 입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살왕(殺王) 백리현. 그는 무림의 십대고수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비록 정파의 성향은 아니었지만, 그가 중립을 유지하며 쌓아온 명성은 강호를 떠들썩하게 할 정도였다.

“문주님~!”

“언제 오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소소와 영영, 그리고 백상이 동시에 달려나가 살왕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흑묘파의 아이들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한 명의 어른에 불과했다.

살왕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하는 얘기 다 들었다.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아이들은 그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우리 후견인 해주세요, 문주님!”

“해줄 거죠?”

“우리도 가고 싶어요. 무공수련도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아이들이 떼를 써보았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수련이나 열심히 해.”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후견인이랍시고 무림맹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고집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양소청이 다가오며 말했다.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갈 다음 세대의 인재들이 모여들 테니, 이번 기회에 식견을 쌓을 수 있다면 저희에게 값진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정말 그 이유뿐이더냐?”

양소청은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선 마음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고개를 내젓고는 총명한 눈빛으로 답했다.

“직접적인 전투는 하지 않고 보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니, 위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전장에 있는 저희 부모님들께 이렇게라도 작은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니, 좀 도와주십시오.”

살왕의 눈빛이 이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미세하게 한 번 끄덕였다.

“사고 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방방 뛰며 좋아했다.

“히히. 문주님이 최고예요.”

“빨리 가요!”

“흑묘파가 나가신다~”

신이 난 아이들은 문파의 상징인 토끼가 새겨진 흑의부터 챙겨입었다.

양소청이 깃발을 뽑아 들고 다가와 백상에게 건넸다.

“우리 문파의 상징이니 네가 잘 보관해.”

“누나는 같이 안 가?”

“나는 무공이 약해서 방해만 될 거야. 여기서 정리해야 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양가장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기에 대외적으로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처지였다.

소소도 아쉽다는 표정으로 작별을 고했다.

“언니.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

“그래. 조심히 잘 다녀와.”

* * *

정파 무림에서 소집한 보조 인력의 집결 장소는 전각이 열두 채나 딸린 대형 장원이었다. 무림맹의 재력으로 통째로 임대한 것이다.

장원의 입구에는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 붓대를 움켜쥔 채 앉아있었다. 무림맹의 부당주급 인사로, 정기가 넘치는 눈빛과 절제된 몸짓은 한눈에 봐도 일류의 수준이었다.

그의 역할은 이곳에 자원하는 문파들을 심사하고 명부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는 섬서의 흑묘파에서 왔어요.”

여자아이 하나가 탁상 앞에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년인은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애들이 장난치는 곳이 아니니 어서 돌아가거라. 혼나기 전에.”

“왜요?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부문주 소소예요.”

붓대를 움켜쥔 그는 소소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열 살 정도나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폭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 네가 부문주면 나는 무림맹주다. 이 녀석, 날 웃겨서 봐주는 거다. 장난치지 말고 어서 돌아가!”

“정말이에요. 저 싸움도 잘해요.”

중년인은 배꼽을 잡고 웃다가 붓대까지 놓쳐버렸다.

본디 무공을 익힌 자라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무공의 수준이 반박귀진의 수준에 이르지 않은 이상 말이다.

지금껏 무림의 역사상 이토록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수준을 이룬 아이는 없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호통을 치려다 말고 멍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기척도 없이 두 명의 아이가 더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류고수만이 가질 수 있는 깃털 같은 발걸음과 중후하게 느껴지는 내공까지. 명문세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자제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중년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증발하며 진지함이 떠올랐다.

“너희들은 어느 문파에서 왔느냐?”

“저희는 흑묘파의 호법들이에요. 돕고 싶어서 왔어요.”

강호에서 일평생을 보낸 그조차 흑묘파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무슨 문파의 간부들이 죄다 어린아이들이란 말인가.

황당한 표정으로 붓대를 돌리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한들 아무 문파나 합류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식견만큼은 강호에서 나를 따를 자가 없다고 자신한다. 안타깝지만 너희들의 사문은 들어본 적이 없구나. 명성을 더 쌓고 오거라.”

명백한 축객령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이들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중년인의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서 묵직한 음성이 작게 들려왔다.

“과연 자네가 양음서생 동학승이 맞는지 의심스럽군. 그분의 딸아이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말이야.”

동학승은 벌떡 일어서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누, 누구냐?”

“누구인 것 같은가.”

자신의 바로 등 뒤 나무 그늘 밑. 그곳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검은 인영의 모습을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일류를 넘어선 특급살수. 아니 그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사내였다.

그의 인상착의를 살펴보던 동학승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살, 살왕이 어찌 이곳에…….”

전설적인 살수가 눈앞에 있었다. 강호에서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할 상대 중 첫째로 꼽히는 인물. 명성이 자자한 강호의 거물급 인사였다.

“나라를 돕기 위해 모이는 일에 사문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확실한 신원이 있거늘.”

“……이 아이들과 무슨 관계입니까?”

“그저 인연이 있는 사이라 해두지. 흑묘파는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겠네.”

동학승은 다시 한번 눈앞의 여자아이를 살펴보았다. 무공을 수련한 흔적은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부처의 온화함과 자비로움 같은 신비한 느낌이었다.

“이 손을 한번 잡아보겠느냐.”

“손이요?”

소소의 작은 손이 동학승의 손바닥과 겹쳐졌다. 그 순간 그의 동공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마치 심연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중후한 내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소한 화경(化境)이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너, 너의 이름이 무어라 했느냐?”

“저는 소소예요.”

그러고 보니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장안에서 가장 유명한 꼬마장수의 이름을 말이다.

“이곳에 이름을 적고 들어가거라. 저쪽에 서 있는 분이 머물 곳을 안내해 줄 것이다.”

“헤헤. 고맙습니다, 아저씨~”

소소와 친구들은 입이 귓가에 걸렸다.

그는 신이 나서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찾아왔던 살왕은 어느새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때 멀찍이서 지켜보던 무사 한 명이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형님, 듣도 보도 못한 문파를 왜 합류시킨 것입니까? 이번 취지는 우리 정파의 어린 후기지수들에게 경험을 쌓아주기 위함이 아닙니까?”

동학승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대장군의 딸을 내쫓을까? 감당할 수 있어?”

“예……? 대장군의 딸이라니요?”

“확실해.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정파 명부에 흑묘파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그는 눈앞의 무사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머리는 두었다가 뭐에 써먹으려고? 만약 대장군의 딸이 있는 흑묘파가 우리 무림맹에 가입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앞으로 관군의 견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아……. 그럼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로군요. 거기까지 내다보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명목은 살왕의 보증으로 처리하고, 저 애들이 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게 대해 줘.”

“예, 형님. 그리고 긴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붓대를 움켜쥔 동학승은 명부에 흑묘파의 이름을 적으며 중얼거렸다.

“빨리 얘기해. 바쁘니까.”

“조금 전에 문파 간에 마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직 혈기왕성한 나이들이니 다투기도 하는 게 정상이지. 어디 애들이 사고를 쳤어?”

각파에서 몰려든 무림의 새싹들이 이미 오백 명에 육박한다. 크고 작은 다툼 정도는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발생한 일은 상식적인 부분을 넘어서 있었다.

“곤륜파의 도사들이 아미파의 비구니 한 명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중상을 입어 의식이 불명입니다.”

동학승은 붓대를 내려놓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냥 넘길 수준의 다툼이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설마 그 아이인가?”

“예. 짐작하시는 아이가 맞습니다.”

“후. 이거 일이 커지겠는데. 아미파는 인솔자로 금혜 장로께서 오셨지? 저녁에 좀 보자고 해. 정식으로 항의해야겠으니.”

“알겠습니다, 형님.”

1664088267543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