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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화 광명을 비추다 (2) (238/250)


238화 광명을 비추다 (2)
2022.09.26.


“흑묘파라고?”

청색 경장을 차려입은 무사 한 명이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바짝 뒤따르던 소소가 옆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는 하북 출신의 팽무후라 한다. 너희들을 보니 정파의 앞날이 밝은 것 같아 안심되는구나.”

그는 하북 팽가의 일원으로서 활동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또래의 아이들부터 약관을 갓 넘긴 정파의 새싹들이 바글바글했으며, 복장이나 무기도 제각각이었다.

대부분이 경험이나 훈련을 목적으로 소집된 인원이었으며, 관리감독을 위한 일부의 원로들만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팽무후는 가장 외곽에 있는 작은 전각 앞에 멈추어섰다.

“너희들은 십이조다. 임무가 정해질 때까지 우선 이곳에서 머물고 있거라. 다른 문파 애들이랑 다투지들 말고.”

“네, 고맙습니다~”

소소와 백상, 그리고 영영은 깍듯이 인사하며 그를 배웅했다.

그가 사라지자 셋은 설레는 마음으로 전각으로 다가갔다. 이미 안에서는 수십 명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

백상이 앞장서며 문을 열었다.

드르륵-!

큰 방안에 이미 여러 문파와 세가의 일원들이 뒤섞여 있었다.

인원은 대략 오십여 명. 관심을 보일 만도 했건만 아무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모두의 정신이 한 곳에 팔려있었기 때문이다.

“곤륜파 애들이 그냥 당했다고?”

“한 명한테 개 패듯이 맞았대. 몇 명은 아직도 의식이 없다더라.”

“어휴, 창피해서 고개를 어떻게 들고 다니려나. 비구니한테 처맞고 다니다니.”

“직접 보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올걸?”

소소와 친구들은 구석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영의 표정은 몹시 어두워졌다.

“화령 언니도 이곳에 왔나 봐. 소소야, 우리 그냥 돌아갈까?”

예전의 소소가 아니었다. 두 눈에 힘을 주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 영영아. 내가 지켜줄게.”

“……괜찮을까?”

“응. 이제 아무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조원들이 드디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흥미로웠던 얘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너네는 어디서 온 문파야?”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살수들이나 입는 짙은 흑의에 토끼 문양이라니. 호기심이 이는 게 당연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소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우린 흑묘파야. 반가워 얘들아.”

도사복을 입은 또래 조원 한 명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흑묘파? 들어 본 적 있는 사람?”

“정파에 그런 문파가 있었어?”

“나도 처음 들어.”

조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정파 무림의 쟁쟁한 문파만 모여있는 와중에 듣도 보도 못한 문파가 끼어있으니 가소로워 보일 수밖에.

키가 큰 도사가 다가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낄 생각 하지 말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태극 문양이 새겨진 도사복을 입은 무당파의 도사였다. 그는 같이 섞여 있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백상이 앞으로 나섰다. 소소와 영영과는 달리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 아이였다.

“우리한테 왜 그래요?”

“말투 봐라. 눈에 힘 빼.”

그냥 물러설 백상이 아니었다. 그것을 눈치챈 영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뜯어말렸다.

“……그냥 참아, 상아. 문주님이 다른 애들 때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 말은 곧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 때려눕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영의 말은 오히려 무당파의 도사들을 노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반면 지켜보던 다른 문파의 조원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하하!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무당파를 어디 동네 삼류 문파로 봤나 보네.”

영영과 백상의 앞에 서 있던 무당파의 도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넌 지금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단지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거늘. 소소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빽 내질렀다.

“때리면 우리도 안 참을 거예요!”

“그럼 참지 말아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사의 왼손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측면에서 나타난 손바닥이 뱀이 똬리를 틀 듯 곡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명백히 백상과 영영의 뺨을 동시에 때리려는 의도였다.

모두가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둘의 신형이 연기가 흩어지듯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휘이익-!

헛손질한 무당파의 도사는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소소가 왼손을 내뻗고 있었다.

오므려진 검지가 활짝 펼쳐지며 도사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땅콩 같은 손가락이었지만, 마치 쇠망치로 내려친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꽈앙-!

허공으로 붕 떠오른 도사는 이 장을 날아 동료들에게 부딪쳐 쓰러졌다.

“크악!”

“윽!”

차원이 다른 무력이었다.

지켜보던 조원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금붕어처럼 입을 뻥긋하며 손가락만 내뻗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조원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정적을 깼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런 미친…….”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두 명의 아이는 위치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양손을 허리춤에 얹은 소소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무당파의 도사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때릴 거에요?”

지금의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도사들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들은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모습을 한 무림의 기인이라 지레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럴 리가요.”

“저희가 어떻게 감히…….”

소소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 친구예요?”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사들. 그리고 다른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영영과 백상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험악했던 분위기도 잠시. 십이조의 모두는 입을 다물고 흑묘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방 안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한 셋은 둘러앉아 간식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벌컥-!

문이 벌컥 열리며 입구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빨리들 나와봐! 팔조에서 싸움 났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거리가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는 말이 있다. 조원들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싸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팔조에는 소림사 애들이 있잖아?”

숨을 몰아쉬던 조원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팔조에서 아미파를 험담하다가 걸렸나 봐. 낮에 곤륜파랑 붙었던 비구니가 혼자서 다 때려눕히고 있어.”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구경하러 가자!”

십이조의 조원들은 앞을 다투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안에는 흑묘파의 아이들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그냥 여기 있을까?”

영영은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백상의 마음은 달랐다.

“그래도 궁금한데……. 멀리서 지켜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결정은 소소의 몫이었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이날만을 기다려왔으니.

“가자, 얘들아.”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러운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백 명이 넘는 구경꾼이 빙 둘러싸고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자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신음하는 팔조의 조원들.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소림사의 무승들이 몰려와 대항하고 있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한 번에 공격해!”

곤봉 한 자루가 비구니의 등 뒤를 향해 나아갔다. 평소 같았으면 비겁하다고 비난받을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찰나의 순간 우측으로 기울어지는 고개. 그리고 뺨을 스쳐 지나가는 봉자루의 손목을 화령이 낚아챘다.

“겨우 이 정도인가?”

우두둑-!

손목이 꺾이는 소리였다. 봉자루를 놓친 무승은 거센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악!!”

뒤이어 날아든 손바닥이 무승의 뒷덜미를 가격하며 기절시켜버렸다.

보다 못한 다섯 명의 무승이 진법을 펼치며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상대를 더욱 화나게만 할 뿐이었다.

화령의 손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한 명씩 팔다리가 꺾이며 나가떨어졌다.

콰직-! 쾅-!

“끄으윽!”

“크악!”

아무도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한 명의 무승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다리가 풀렸는지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화령은 왼쪽 손바닥을 무승의 머리 위에 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구경하던 다른 조원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 이글거리는 살기(殺氣)는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죽임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화령을 말리기 위해 아미파의 인솔자인 금혜사태가 달려왔지만,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소리쳤다.

“멈, 멈추어라!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냐!”

뱀처럼 찢어진 두 눈이 금혜사태를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온 그녀는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기어코 천살성(天殺星)이 모습을 드러냈구나.’

살기가 더욱 강해지기 전에 막지 못한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무림맹 소속의 간부 한 명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양음서생 동학승이었다.

“장로께서는 어서 안 말리고 뭐 하는 것이오!?”

아미파의 장로인 그녀가 고작 사문의 삼대제자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게 못마땅한 듯했다.

이미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어 미동도 못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동학승이 붓대를 움켜쥐고 화령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날카롭게 선 붓대의 끝은 내기를 가득 머금고 무쇠처럼 단단해졌다.

“어리다고 오냐 오냐 해줬더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네까짓 게 행패를…….”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화령의 손이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며 그의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컥!”

화령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목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말해줄래? 잘 안 들리니까.”

“…….”

무림맹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동학승은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차기 무림을 이끌 지존이랍시고 무림맹에서 집중적으로 키워낸 아이가 이런 미친 정신상태였다니.

아미파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었지만, 당장은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목을 틀어쥔 손아귀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어서 이거 놓거라…….”

화령은 대답 대신 왼손을 치켜들었다.

펼쳐진 손날에 붉은 강기가 타오르는 것을 보니 여차하면 죽일 심산인 듯했다.

때맞춰 각파의 책임자들이 몰려오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네 이년,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당장 그 손 내려놓지 못할까!”

각파의 원로들은 분노하면서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경인 것도 모자라 정파무림의 절학 중 상당수를 이어받은 아이였다. 자신들이 떼로 덤비더라도 상대할 수 없는 상대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설상가상 화령은 살심(殺心)이 극에 달했는지 점차 동공까지 풀려가는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시끄럽네. 입을 찢어 버릴까.”

원로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배분으로 따지면 사손뻘도 안 되는 삼대제자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불도를 수련하는 입이 어찌 저렇게 경박할 수가…….”

화령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선 눈앞의 동학승부터 죽일 심산인 듯했다.

“아무도 가까이 안 오겠다네? 그럼 죽어야지”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흉기처럼 치켜세워진 손날의 끝이 동학승의 목을 조준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또랑또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왔어요.”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살수처럼 짙은 흑의를 입은 꼬마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등 뒤에 새겨진 토끼 문양이 꽤 인상적이었다.

소소를 알아본 화령은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동학승 따위는 더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이 그의 앞가슴을 강타하며 먼 곳으로 날려버렸다.

뻐억-!

“크악!”

삼 장을 날아 바닥에 쓰러진 동학승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켜보던 자들은 걱정과 호기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청성파의 도사 한 명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쟤는 누구야? 몇 조야?”

그 순간 십이조 조원들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들 중 영향력이 가장 큰 무당파의 도사가 무게가 잔뜩 실린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십이조의 흑묘파야. 조금 전 나하고도 합을 맞추었어.”

“무당파하고? 강해?”

대답을 고민하던 무당파의 도사는 좀 더 과장을 보탰다.

“반로환동한 무림의 은거고수인데 심심함을 달래려고 여기 온 거래. 저 미친 비구니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분을 상대로는 어려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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