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0화 같은 하늘 아래서는 (1) (240/250)


240화 같은 하늘 아래서는 (1)
2022.09.28.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십이조의 흑묘파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

어디든 출입이 자유로웠으며, 식사도 가장 먼저 제공받는 등 큰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것에 대해 시기심을 품는 이가 없었다. 폭주한 천살성을 단번에 제압하는 소소의 신위를 모두가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륵의 현신이란 소문까지 파다하게 퍼진 상황이 아니던가.

소소는 불과 며칠 만에 정파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보살님!”

불가 계열에 속하는 문파의 문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소소가 가는 길마다 마주치는 조원들의 눈빛에는 경외심이 가득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곤봉을 움켜쥔 소림사의 승려들이 달려와 그들을 위협했다.

“접근하지 마시오. 깨끗하지 못한 기(氣)를 가까이하면 미륵의 불력(佛力)이 탁해질 수 있다고 하였소.”

구파일방 중에서도 수장급에 해당하는 소림사였다. 어지간한 문파는 그들과 조금의 마찰도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덕분에 귀찮은 일은 줄었지만, 과도한 보호와 감시 탓에 흑묘파의 셋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소소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영영에게 말했다.

“……심심해.”

“나도 그래……. 우리 그냥 집에 갈래?”

각자가 아버지를 돕겠다는 큰 뜻을 품고 왔지만, 십이조에는 어떠한 임무도 주어지지 않았다.

온갖 잡일까지 다른 조원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따분함은 더해만 갔다.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할 찰나, 돌연 소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지휘부의 전각에서 흥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얘들아, 이쪽으로 와봐.”

소소의 신호에 따라 영영과 백상이 동시에 보법을 밟았다.

자신들을 뒤따르던 소림사의 승려들을 따돌리기 위해 살문의 암보(暗步)를 펼친 것이다.

잠시 후 높이 날아오른 세 마리의 참새가 전각의 지붕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지금 정파의 주력은 관군과 함께 있었기에, 이곳에는 은신을 눈치챌 만큼 대단한 고수가 없었다.

“낙양에서 연합군이 출진을 개시했다는 말입니까?”

“예. 지금쯤이면 낙양과 개봉의 중간쯤에서 휘나라군과 대치하고 있을 겁니다.”

“드디어 결판의 순간이 왔군요. 하오면 우리들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에서 두 가지 지시를 내렸습니다. 첫째는 관군의 보급부대를 호위하여 미양현까지의 수송을 돕는 것입니다.”

“미양현이면 최전방도 아니로군요. 소나라의 영토에서 움직이는 것이니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걱정되는 것은 두 번째 임무입니다.”

무척 흥미로운 대화 내용이었다.

흑묘파의 아이들은 숨죽이며 귀를 쫑긋거렸다.

“첩보에 따르면 휘나라의 특공대인 적호병단이 행적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수가 무려 오백 명을 넘는다고 하더군요.”

붉은 갑주를 걸친 적호병단의 악명은 무림인들조차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나하나가 무림의 일류고수에 비견될 만큼 일당백의 전투력을 지녔으며, 명령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살육기계들이 아니던가.

“어디 매복이라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그게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맹에서는 놈들이 이 틈에 소나라의 민공을 노릴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가용한 전력을 동원하여 지원하라는 전보가 내려온 상태이고요.”

“그럼 설마 우리보고 궁성 수비에 힘을 보태라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이곳에 모인 아이들은 결코 적호병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전각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원로들은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정파 무림의 주력은 무림맹을 필두로 연합군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후기지수들만 모였을 뿐이었다.

“물론 우려가 현실이 된다면 우리 아이들이 모조리 살해당하겠지요. 그럼 정파의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오?”

“본맹에서는 단지 연합군의 요청이 있었으니, 융통성 있게 잘 대응하면 된다고만 하였습니다.”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었지만, 명확한 의미가 내포된 한마디였다.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발을 빼라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관군의 눈치를 살피며 시늉만 하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그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자 원로들 간의 긴장이 다시금 완화되었다.

한편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흑묘파의 아이들은 은밀히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져나왔다.

어둠 속에서 백상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팔짱을 낀 소소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할아버지가 위험할 수도 있대.”

“괜찮을 거야. 우리 문주님이 지켜주시잖아.”

아이들은 자신들의 문주인 살왕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심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장안의 주둔군은 대부분 빠져나간 상태였으며, 궁성을 지키는 근위병들도 인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소가 진지한 얼굴로 영영과 백상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우리가 도와줄까?”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도와주긴 뭘 도와주려고?”

살왕의 전승을 이어받은 자신들에게 이목을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인물. 진일심소곡을 이용해 탈마의 벽을 뚫은 연설화였다.

그녀는 웬일인지 등 뒤에 칠현금을 메고 단아한 경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문주님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위험해요.”

“걱정할 것 없어. 너희들의 대장은 천 명이 덤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래도…….”

설화는 확고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만류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 소소는 엄마랑 어디 좀 가야 해.”

“저랑요?”

“응. 지금 바로.”

“엄마랑 있는 건 좋지만…….”

소소는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이곳에서 친구들이랑 헤어지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엄마의 모습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설화가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 보러 갈 거야. 소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빨리 와달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소는 움찔거렸다.

아버지가 언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던가.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력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없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인사도 없이 떠날 수는 없었다. 친구들을 바라보는 소소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얘들아…….”

“괜찮아, 소소야. 우리 아버지도 거기 있으니까, 잘하고 와야 해.”

“여긴 우리한테 맡겨. 문주님을 도와서 할아버지를 꼭 지킬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이 급했기에 지체할 수가 없었다.

“빨리 갔다 올게. 금방 올 거니까 둘 다 다치면 안 돼. 알았지?”

“걱정하지 마. 예전의 우리가 아니야.”

“응. 잘 다녀와, 소소야…….”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소소는 진지한 얼굴로 설화의 손을 잡았다.

“이제 우리 딸도 다 컸네. 시간이 없으니 황하 위를 달려서 가야겠구나. 할 수 있지?”

“네, 엄마. 어서 가요.”

* * *

진양평원(晉陽平原). 개봉과 낙양의 중간지점인 이곳은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멀찍이 좌우로 보이는 산맥은 산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나와 장관이었다.

평상시 고요와 적막만이 가득했던 이곳이었지만 지금은 거센 긴장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각국의 관군과 의용군, 그리고 정파 무림의 정예까지. 십만에 이르는 대군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중 반수 이상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고려하면 무시무시한 전력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초라하게만 보였다. 맞은편에 자리한 적군의 규모 때문이었다.

무려 이백만에 육박하는 사상 최대의 병력. 머릿수로 따지자면 연합군의 스무 배였다.

탁 트인 평야가 비좁아 보일 정도로 바글바글한 적군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진세의 움직임을 보니 며칠 내로 적군의 공격이 개시될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연합군의 진영 중심에 설치된 야전 사령부. 그곳에서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저들 중 최소 팔 할 이상이 갓 징집된 자들입니다. 그들을 먼저 내보낼 것입니다.”

“문제없습니다. 병장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들이니 일거에 섬멸할 수 있습니다.”

정명 방장이 답답하다는 듯 연신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무고한 중생들을 어찌 이렇게 다 죽인다는 말입니까. 정녕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포나라의 진광 장군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는 무림에서 추구하는 것처럼 협과 낭만이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승자가 곧 정의가 되는 세상이지요. 흔들리지 마시고, 다가오는 적은 누구든 베십시오. 그들을 베지 않으면, 당신들의 가족들이 그 고통을 대신하게 될 것이니.”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입니다.”

무고한 자들을 학살하는 건 정파 무림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휘관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공통점은 누구 하나 표정이 밝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 악비의 표정의 가장 어두웠다.

“희생을 동반하는 대의는 그저 허울에 불과할 뿐이오. 나는 이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내키지 않는구려.”

“그럼 회군이라도 하자는 말이오? 적들이 회룡포를 손에 넣은 이상 수성전은 더욱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지 않소?”

악비는 한숨을 내쉬고는 누군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사령관께서 결정할 문제인 것 같소.”

모두의 시선이 소무를 향했다.

그는 탁상 위에 깍지를 낀 채 미동조차 없었다. 한눈에 봐도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아무도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무엇 때문에 검을 잡았는가.’

소무는 자신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전란 속에 무자비하게 죽어간 아이들의 가여운 죽음. 그리고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자들의 모습을 말이다.

참혹한 전란의 고리를 끊겠다는 각오로 검을 잡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집행자가 되어 있었다.

지금 만큼 괴로웠던 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면서 얻는 승리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들 또한 누군가의 아비이고, 자식이고, 형제이다. 감히 누가 그들의 목숨이 하찮다 할 수 있겠는가…….’

소무의 시선이 탁상 위에 펼쳐진 전술지도로 향했다. 주변 지형은 허허벌판의 좌우로 자리한 두 개의 험산이 전부였다.

아무런 특이점이 없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굳게 닫혔던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더는 전쟁을 길게 끌고 갈 수가 없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가 회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방비를 철저히 하고 적을 맞을 준비들을 하시오.”

악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사령관께서 좀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할 줄 알았소. 그냥 이대로 전투에 돌입하겠다니…….”

악비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는 장양과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동문 사형으로,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장양과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무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 않소? 어쩌면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적이라면……?”

소무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끝낼 기회가 올지도 모릅니다. 곧 있으면 제 아내가 도착할 테니, 그때 함께 의논해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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