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세월을 낚다 (1)
(249/250)
249화 세월을 낚다 (1)
(249/250)
249화 세월을 낚다 (1)
2022.10.07.
지금 이 순간 소나라에서 가장 바쁜 곳은 장안의 의선당이었다. 적호병단의 난입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며칠을 쉬지 않고 비지땀을 흘리는 인물이 있었다.
“후우.”
무림의 제일 신의로 현재는 소나라의 의료 총책을 책임진 모청의 한숨이었다.
장장 이틀에 걸친 대수술. 그의 옆에는 황금빛 후광을 뿜어내는 한 꼬마가 있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
대꾸를 안 하자 모청이 걱정 서린 눈빛으로 다시 한번 다그쳤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니까. 어서 가서 쉬어라.”
“…….”
소소는 멈추지 않고 백리현의 몸속에 진기를 계속 불어넣고 있었다. 무려 이틀 동안이나 말이다.
수술이 다 끝난 지금도 멈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옆에서 보좌하던 의료부대의 장교가 소소를 살펴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는 것 같은데요?”
모청은 두 눈을 끔뻑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수면 상태에서 진기를 불어넣고 있었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기가 막히는군.”
그들의 뒤에는 또 한 명이 뒷짐을 쥔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또한 이틀간 한숨도 자지 않은 듯 몹시 초췌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어찌 되었는가……?”
모청은 두 손을 모으고는 고개 숙여 말했다.
“단언컨대 제 인생에서 가장 고된 수술이었습니다. 목숨은 겨우 붙여놓았습니다만……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장양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는 모청을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생 많았네. 우선 살아 있어야 저렇게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장양의 말에 모청이 뒤를 돌아보았다.
혼수상태였던 중환자가 무려 이틀 만에 눈을 뜬 것이다. 그의 왼손이 아주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단순한 손짓이었지만 천근만근 힘겨운 듯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따듯하고 투박한 손이 당도한 곳에는, 그를 향해 마주 내뻗어진 밤톨 같은 손아귀가 있었다.
잠이든 소소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쥔 살왕 백리현. 그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우린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좋겠군.”
어느새 장양의 입에서는 웃음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가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오자 돌계단에 두 명의 아이가 쪼그려 앉아있었다.
아이들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
걱정되어 의선당을 맴돌던 영영과 백상이었다.
장양이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으며 지나쳤다.
“너희들이 걱정해준 덕분에 살아났다더구나. 어서 가 보거라.”
“그게 정말이에요, 할아버지!?”
“와아!”
벌떡 일어선 영영과 백상은 안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잠시 후 잠에서 깬 소소의 웃음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허허허. 허허허허.”
장양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의선당으로부터 십여 장이 떨어진 곳. 그곳에서 군사 진유소가 양손을 모으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가.”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일이 잘 풀린 모양입니다.”
“물론일세. 모두가 함께 걱정해준 덕분 아니겠는가. 이제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사람이 아닐세. 몸은 불편하겠지만 얼굴은 더 좋아 보이더군.”
진유소가 그를 보좌하듯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대장군께서 휘나라의 황실을 무너트렸으니, 그들은 곧 붕괴될 것입니다. 이제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어쨌거나 개국 이래 소나라의 가장 기쁜 날이 아니겠는가. 고생한 대장군과 병사들을 위해 축제를 열어주었으면 좋겠군. 어찌 생각하는가?”
“고견이십니다. 백성들도 같이 기뻐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장양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제라니, 또 뭐가 남아 있다는 말인가?”
“대장군께서 사직하셨습니다. 아마 오늘 축제에는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다.”
장양은 걸음을 멈추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떠다니는 구름을 쫓아 누군가를 회상하고 있었다.
“진정한 영웅이란 가장 영예로운 순간에 스스로 물러나는 법이지. 세상을 위한 그의 헌신을 우리 모두 잊어선 안 될 것이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진유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이곳에 그의 동상을 세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양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군. 당장 추진하시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 * *
섬서성 백양현에 위치한 작은 야산의 정상이었다.
양지바른 곳에 앙증맞은 봉우리 하나가 우두커니 솟아있었다.
한 줄기 시원한 봄바람이 소무의 머리칼을 기분 좋게 보듬고 지나갔다.
무엇인가를 회상하던 그는 무덤 위에 눈처럼 흰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축제라 맛있는 음식도 많을 텐데 왜 따라왔어?”
“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어서요.”
“이 녀석. 말솜씨가 많이 늘었구나.”
“히히. 근데 아버지. 이 안에는 누가 있어요?”
잠시 무덤을 바라보던 소무는 뭔가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꽃……. 우리 소소처럼 아름답고 착한 유화꽃…….”
소소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들어오는 꽃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소무는 피식 웃으며 딸을 번쩍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저기 산 아래 보이는 작은 집이 보이지?”
“네, 아버지. 근데 왜요?”
“저곳이 아버지가 운영했던 객잔이란다. 오늘은 저기서 우리 소소에게 맛있는 요리나 해줘야겠구나.”
목말을 타고 있던 소소는 해맑게 웃으며 소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정말요? 그럼 고기국수도 해줄 수 있어요?”
“그럼~. 장을 봐야 하니 우선 시장에 먼저 들러야겠구나.”
기뻐하던 소소의 얼굴에 갑자기 아쉬움이 떠올랐다.
“엄마도 같이 데려올걸.”
모처럼 해주는 아비의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없으니 아쉬운 모양이었다.
소무는 상관없다는 듯 흐뭇한 미소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엄마는 이제 실컷 먹을 수 있을 테니.”
* * *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것이 시간이요, 급류처럼 멈추지 않는 것이 세월이다.
전란이 끝난 날로부터 어느새 십 년이 지났다.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 한쪽에는 냇물이 흐르고 있고, 아담한 축사와 밭이 있었다.
자연의 모습이 가득한 이곳에는 집 두 채와 창고. 그리고 원두막이 전부였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원두막 위에서는 기분 좋은 칠현금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한쪽에는 다소곳이 앉아 그림을 그리는 초희의 모습도 보였다.
“지금 갑니다!”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요란스럽게 달려오고 있었다. 술과 손질한 고기가 잔뜩 올려진 술상이었다.
등 뒤에는 우람한 체구의 아기가 목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우리 낭군님은 어디 갔어?”
일광은 상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낚시하러 갔으니 금방 올 겁니다, 처형.”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먼 곳에서 작은 점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소무는 들고 있던 두레박을 구석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섯 마리 잡았어. 저녁에 같이 구워 먹자.”
일광이 호탕하게 웃으며 소무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역시 해낼 줄 알았어! 세 마리는 내 거지?”
“후후. 그러시든지. 자, 한잔들 해.”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산지 수년째였다. 자급자족이 가능했기에 마을에 나갈 일도 없었다.
술이 그들을 취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발달된 미각은 더욱 깊은 술맛을 느낄 수 있는 법. 작은 원두막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이곳에 손님이 찾아들었다.
허름한 장삼과 낡은 지팡이. 그리고 작은 봇짐을 매고 죽립을 눌러쓴 모습은 정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누구지? 올 사람이 있었어?”
설화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켜보면 알게 될 터. 모두가 오랜만에 보는 이방인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가 다가오자 소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물 한잔만 주시구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소무와 일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무는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후후. 물이 아니라 음식을 대접해드려야지요. 민공께서 언제 나그네가 되신 겁니까?”
그가 죽립을 벗자, 모두는 낯익은 장양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혈색은 오히려 더욱 좋아 보였다.
“허허.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네.”
“괜찮은 사람입니까?”
“백성들이 원하는 자가 민공이 되었으니, 그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마음에 들더군.”
장양의 안목을 잘 아는 소무였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궁금했던 소식이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소소는 어찌 지냅니까? 아무리 나랏일이 바빠도 그렇지, 몇 년째 연락도 없고 걱정이 되는군요.”
장양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얘기 못 들었는가? 소소 대장군은 삼 년 전에 사직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났네.”
소무와 연설화는 황당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따로 시간을 내서 알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을 듯했다.
그때 지켜보던 일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우리 첫째 딸은 어찌 지냅니까?”
“허허. 영영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네. 소소의 자리를 이어받아 대장군이 되었지. 군사인 양소청과도 호흡이 잘 맞고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백상이란 아이도 있었지.”
장양은 초희가 건넨 물잔으로 목을 축이고는 그간의 일을 얘기해주었다.
아이들이 주축이 되었던 흑묘파는 살왕의 뜻을 이어받아 민공의 호위를 전담하는 문파가 되었다. 그리고 소소가 대장군이 된 시점에는 백상이 문주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살왕 백리현은 아직 잘 걷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흑묘파의 장로가 되어 신규 문도들의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그렇게 되었군요. 타국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송나라는 인구 감소와 황실의 폭정으로 국력이 무척 쇠약해졌네. 이후 진회와 황제가 암살을 당하고, 후계를 이어받은 자가 우리 소나라에 합병을 요청했네. 경제적으로 더는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
소무는 진회의 호위무사인 암영추혼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암살할 수 있는 인물이 극히 제한되어 있을 터였다. 무엇인가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송나라하고는 예전부터 국경이 열려있었으니, 흡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겠군요.”
“맞네. 단지 송나라의 황실이 사라지는 것뿐이지만, 백성들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 걸세.”
“좋은 소식입니다. 포나라와 휘나라는 어떻습니까?”
“포나라는 황제가 바뀐 후부터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이네. 군사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우리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지. 그리고 휘나라는 다섯 개의 국가로 나누어졌네. 현재는 각국이 맺은 조약에 따라 독자적인 군사를 보유할 수 없도록 승전국들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네.”
승전국들이란 소나라와 고려를 뜻하는 말이리라.
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만 빼면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었다.
일식경에 걸쳐 수다를 떨던 장양은 다시 지팡이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소무의 만류에도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죽립을 눌러쓸 뿐이었다.
“이미 먹은 것으로 해두세. 죽기 전에 소나라의 모든 곳을 돌아보고, 문제점과 개선되어야 할 부분을 책으로 남겨볼 생각이네. 그러자면 갈 길이 멀구먼. 허허허.”
원두막에 자리한 그들은 멀어져가는 장양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외로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돌연 소무의 안색이 굳어졌다. 동시에 그의 손이 어딘가를 향해 뻗어 나갔다.
툭-!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작은 암기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멀어져갔다.
한눈에 봐도 절정을 이루지 못한 수준이었기에,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저 녀석이 감히?”
일광이 일어서려 하자 소무가 다급히 제지했다.
“그냥 놔둬.”
자신들을 해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보내준 것이다.
암기로 날아든 비도(飛刀)에는 종이가 묶여 있었다.
그것을 펴서 읽어보던 소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설화가 궁금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
종이를 받아든 설화도 소무와 같은 반응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전장……? 천하제일의 자리를 놓고 도전하러 오겠다고?”
잠시 후 넷은 동시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일광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눈물까지 흘렸다.
“하하하! 도전자가 누구입니까?”
“글쎄? 검후(劍后)라고만 쓰여있네. 무림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