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0화 세월을 낚다 (2) 完 (250/250)


250화 세월을 낚다 (2) 完
2022.10.08.



“형님, 저희 왔습니다!”

“소무 대장님!”

고요만 가득한 산속 외진 마을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십수 명의 손님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손에는 도축된 돼지 한 마리와 술 단지가 잔뜩 들려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집 앞의 마당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다들 목소리가 우렁차네. 귀청 떨어지겠어.”

뒤쪽에서 과일 바구니를 움켜쥔 여인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은 반가운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앗, 누님!”

“하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우와. 그간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비결이 뭡니까?”

십 년 만에 마주한 랑아대의 대원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설화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서렸다.

“다들 여전하네. 곧 있으면 다들 올 거니까 잠시들 기다려. 돼지 손질 좀 해놓고.”

“예, 누님!”

대원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장작을 준비했으며, 돼지를 손질하고 식재료를 씻는 등 모처럼 곳곳에 활기가 넘쳤다.

연설화는 마루 맡에 앉아 칠현금을 연주했고, 대원들은 음에 따라 콧노래를 불어댔다.

그렇게 반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뭐가 그리들 기분이 좋아?”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대원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밀짚모자를 쓴 소무가 바지를 무릎 위까지 올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영락없는 농부의 복장이었다.

“앗, 대장님!”

“농부가 되신 거예요?”

소무가 밀짚모자를 벗어 한쪽에 걸어두며 말했다.

“그냥 소일거리지 뭐. 그나저나 다들 어쩐 일이야? 복장을 보아하니 너희들도 은퇴한 것 같은데?”

복장도 전부 제각각이었다. 현정과 청해는 다시 화산파로 돌아갔는지 도복을 입고 있었으며, 무사나 상인의 의상을 차려입은 대원들도 보였다.

“네. 아직 군에 남아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퇴역한 대원 중에서 연락이 닿은 애들만 모여서 온 거예요.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가장 우측에 있는 대원을 바라보았다.

“잘들 왔어. 철두, 할머니는 건강하시지?”

“하하. 그럼요. 대장님 덕분에 동네에서 가장 장수하시는 분으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할머니를 모시고 둘이 살고 있어요.”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약값을 벌겠다고 군에 자원했던 그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부하의 행복한 모습에 소무의 마음도 흐뭇해졌다.

“할머니 모시느라 일도 못 할 텐데,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나? 힘들면 내려갈 때 쌀 한 가마니 가져가.”

철두는 다급히 양손을 손사래를 쳤다.

“어휴. 공을 세운 퇴역 장교에겐 나라에서 보상금이 나와서,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세상 많이 좋아졌군. 다들 먼 길 오느라 배고플 텐데 저녁들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예, 준비 금방 끝납니다!”

오랜만에 부하들을 보게 된 소무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몸을 씻으러 향할 무렵 이곳으로 이웃집 손님이 찾아들었다.

“이 녀석들 봐라? 형님을 보고 인사도 안 하네.”

거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등 뒤에 아기를 업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옆에는 초희가 다소곳이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일광 형님! 잘 지내셨어요?”

“형님을 닮아서 그런지 아기가 튼실하네요.”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일광이 고개를 돌려 아기에게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예쁜 아들 봤어? 딸이지!”

“하하. 그래도 얼굴만큼은 엄마를 닮아서 다행이네요. 큰일 날 뻔했어요.”

아기를 향해 입술을 내밀던 일광이 그 상태로 눈을 부라렸다.

“이 녀석들이? 다들 모처럼 한번 맞아 볼 테야?”

겁을 먹는 대원들은 없었다. 말과는 달리 예전부터 그에게 두들겨 맞은 대원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 그럴 리가요?”

“불은 어디다가 피울까요, 형님?”

일광은 손짓으로 모아놓은 장작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기 굽는 건 내 전문이잖아. 너희 두 명은 따라와.”

한 시진 후.

모두는 원두막 근처에 설치된 장작불 주위로 둘러앉아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어느 순간 소무가 대원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검후라고 아는 녀석이 있나?”

며칠 전에 받은 도전장 때문이었다.

무림의 정세에 어두운 그와는 달리 무림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대원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화산파로 돌아간 현정과 청해였다.

청해가 현정을 바라보며 대답을 양보했다.

“장문 사형께서 말씀해주시는 게 좋겠어요.”

“장문인이라니?”

일광은 물론 소무조차도 놀란 표정이었다. 복장으로 보아 화산에서 요직을 맡고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장문인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마도 멸문의 위기를 겪었을 당시 화산파의 원로들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리라.

“저보다 배분이 높은 분들이 계시지만, 모두 장로직으로 물러나고 제게 이 자리를 맡기셨어요.”

“뭐 그럴 수도 있겠군. 근데 검후라는 자가 누구야?”

현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히려 되물었다.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죠? 삼 년 전에 혜성같이 나타나 무림의 십대고수를 모조리 꺾고 만인지상에 오른 지존을?”

“무림에 관심을 끊은 지 십 년이 넘었어. 그사이 새로운 절대고수가 나타났나 보군. 뭐 꽃이 지면 다시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것이 세상 이치지.”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일광이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우린 뒷방으로 밀려난 은거기인 신세지 뭐.”

그런데 현정과 청해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둘은 눈빛을 교환하며 전음을 나누고 있었다.

- 정말 모르시나 본데?

- 그러게요. 얘기를 해줘야 할까요?

- 뭐 때문인지 한번 물어봐봐.

청해가 은근슬쩍 소무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갑자기 검후는 왜 찾으세요?”

“응. 도전장이 날아왔어. 다짜고짜 천하제일의 자리를 놓고 싸우러 오겠대.”

그 순간 술잔을 들이켜던 현정과 청해가 동시에 술을 뿜었다.

“풋!”

“푸핫!”

일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다그쳤다.

“이것들이 밥상 앞에서 미쳤나? 왜들 그래?”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데 날짜가 언제예요?”

“아마 내일일걸?”

청해가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며 현정에게 말했다.

“장문 사형, 하루 더 머물다 가요.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잖아요.”

“나도 그러려고 했어.”

일광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인물은 연설화였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부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고요만이 가득한 시간 속에 바쁘게 움직이는 인물이 두 명이나 있었다.

타타타탁-! 타타탁-!

부엌에서 나는 소리였다.

“다 됐어?”

“응, 받아!”

소무가 손을 휙 휘두르자 잘게 썰린 채소와 양념 가루가 허공을 수놓듯 떠올랐다.

설화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왼손을 슬며시 내뻗었다. 그러자 허공을 배회하던 식재료들이 한곳으로 모여들며, 솥단지를 향해 차곡차곡 투하되기 시작했다.

“불이 약해 보이는데?”

설화가 손바닥을 내뻗자 아궁이의 불이 화르르 타올랐다. 미지근했던 물은 순식간에 펄펄 끓어오르며 거센 수증기를 뿜어냈다.

이미 뒤쪽에는 각종 요리가 수북이 준비되어 있었다. 황제의 만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진수성찬이었다.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지켜보던 설화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너무 많이 한 거 아닐까?”

“아니야. 오랜만에 우리 딸이 온다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먹성도 더 좋아졌을 거 아냐?”

“그런가?”

“응. 그래도 시간 맞춰서 딱 끝난 거 같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준비를 마친 소무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본 딸아이의 모습이 반가웠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엿해진 딸의 모습은 절세미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지만, 앳된 모습이 여전히 얼굴에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소무의 눈에는 여전히 아이로만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소소는 소무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어이쿠, 다 큰 처자가 이렇게 촐싹거리면 쓰나.”

“헤헤. 아버지, 나 안 보고 싶었어요?”

“후후.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나도 안 변했구나.”

배시시 웃던 소소는 다시 부엌에서 나오는 설화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엄마.”

“우리 딸 이제 다 컸네.”

원두막에서 퍼질러자던 대원들도 모조리 달려왔다.

“우리 소소 왔구나! 다롱이도 왔네?”

산군도 기분이 좋은 듯 낯익은 자들에게 가서 그르렁거리며 장난을 쳐댔다.

“이 녀석이 오랜만에 봤다고 놀아달라네.”

적막이 가득했던 촌락에 어제보다 더 큰 활기가 타올랐다.

모두의 얼굴엔 해맑은 웃음꽃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때 설화가 부엌문을 활짝 열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뜩 차려진 십수 가지의 음식들. 하나같이 소소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입이 벌어진 소소는 코를 킁킁거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 맛있겠다!”

“조카 덕분에 우리까지 이런 진수성찬을 먹는구나.”

대원들은 설화의 지시에 따라 음식을 원두막으로 옮겼다.

원두막의 크기가 꽤 넓었기에 모두 함께 들어가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둘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삼십여 장이 떨어진 들판을 부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버지, 편지 잘 받았어요?”

“요즘 무림에서는 도전장을 편지라 부르는가 보구나.”

“헤헤.”

일곱 살부터 자신이 천하제일 소소라고 장난치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것이 꿈이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내 딸답구나. 아버지가 검을 놓은 지는 좀 되었지만, 만만치 않을 거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네. 아버지도요?”

각오는 무슨 각오란 말인가. 소무는 피식 웃으며 들판에서 갈대 한 줄기를 뽑아 들었다.

검술이 입신의 경지에 오른다면 무엇을 움켜쥐든 상관이 없는 법이다.

소소 또한 갈대를 뽑아 들어 다듬었다.

지켜보던 소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법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소소의 절기는 손바닥으로 펼치는 여래신장이었다. 갈대를 움켜쥔다는 것은 검술을 펼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초식을 변형해서 검법으로 바꾸었거든요.”

절세무공을 변형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라니. 그렇다면 만만히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이미 소소가 맞은편에서 포권지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검후 소소예요.”

소무도 갈대를 늘어트리며 나직이 답례했다.

“농부 소무다. 선공은 양보해줄 테니, 어서 오너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소의 발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허공을 밟고 쏜살같이 다가오는 움직임이라니. 딸의 무공실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이거 봐줄 상황이 아니로군.’

곧이어 두 자루의 갈대가 맞물리며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 검결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이다.

비록 화려함은 없었지만,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는 수만 가지 변화를 담고 있었다.

지켜보는 자들의 눈에는 마치 신선들이 내려와 춤을 추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에 연설화의 칠현금 소리가 더해지자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일광이 신이 난다는 듯 술잔을 들이켜며 소리쳤다.

“하하하! 좋구나! 우리 소소 이겨라!”

넋을 놓고 지켜보던 대원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부녀가 함께 펼치는 단순한 동작에는 우주 만물의 변화가 담겨 있었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 것만 같았다.

반 시진이 지나도록 아무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를 무렵, 두 자루의 갈대가 동시에 꺾여나갔다. 결투가 끝이 난 것이다.

지켜보던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정말 최고였어요!”

어느새 다가온 소무와 소소도 원두막으로 올라가 자리했다.

“누가 이긴 거예요?”

청해의 물음에도 소무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늘만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승패의 결과는 오직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말을 아꼈다.

잠시 후 소소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것은 소소의 일생에서 가장 해맑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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