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1. 왕국의 골칫덩이
꿈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 행복한 광경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혼내면서도 웃음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악몽이야.
꿈은 그녀가 가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때를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그 행복한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워하기만 하면 되는 그 어릴 적.
그랬기에 이것은 악몽인 것이다. 이제는 절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꼭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도 여지없이 꿈은 여기까지 진행이 되었다. 그녀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제발, 제발, 내가 깨어날 수 있게 해 줘!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
그녀는 매우 신이 났다. 유난히 날씨가 맑고 불어오는 공기도 시원하였다. 그녀는 시녀들의 치장을 받았다. 비록 그들은 머리를 아프게 묶었고, 옷도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건 상관이 없었다.
오늘은 아바마마가 돌아오시는 날이야!
“다 끝났어?”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시녀들을 보챘다. 시녀들은 대놓고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이에요. 공주님, 치장 덜 끝났으니까 가만히 있으세요.”
“빨리해! 나 아바마마 보고 싶단 말이야~”
그녀의 징징거림에 시녀들은 표정을 찌푸렸다. 그들은 수군거리며 재빨리 아무 신발이나 골라 신겼다. 마침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주마마, 왕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응! 나 가 볼게!”
그리고 그녀는 재빨리 달려 나갔다. 뒤에서 시녀들이 제발 뛰지 말아 달라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그걸 무시하고 궁 문 앞으로 나갔다.
“아바마마!”
그리고 마침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한 중년 남자를 향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남자는 그녀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남자는 그 떨림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카니벨라, 이 아비가 없는 동안 어디 아픈 곳은 없었느냐?”
그녀는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소녀, 아픈 곳은 없습니다.”
남자 왕비(편의상 이후부터는 왕비라 지칭)는 그런 카니벨라의 얼굴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볼 뿐이었다.
‘사고로 인해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가련한 아이.’
현재 그녀의 위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표정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때 마침 두 명의 소녀가 나타났다.
“란시엔입니다, 이번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다녀오셨습니까.”
카니벨라의 의붓동생들인 란시엔과 라카에리였다. 그녀들은 멀찍이서 왕비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곁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몰라 하는 카니벨라와는 정반대였다.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클슨은 어디에 있느냐?”
“오라버니께서는 현재 출타 중이십니다, 내일이면 오실 것입니다.”
“쯧쯧, 이 아비가 돌아오는데 궁 안에 있지는 못할망정 밖에나 싸돌아다니다니……. 그런 놈이 이 나라의 왕세자인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왕비는 혀를 찼다. 란시엔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어마마마께서 식사를 명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식당으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고맙구나, 란시엔.”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란시엔의 의젓한 말에 왕비는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카니벨라의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는 안내에 따랐다. 이곳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번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참으로 재미있었다오. 다음에도 또 가고 싶을 정도였소.”
문을 열자 상석에 뮤일라 루 라소니, 라소니 왕국의 26대 여왕인 그녀가 앉아 있었다. 남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제는 50대를 넘어선 왕비와 대조적으로 싱그럽고 한창 피어나는 꽃과 같았다.
“어마마마, 소녀 왔습니다.”
카니벨라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가지런히 인사를 했다. 그녀의 등을 보며 여왕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경멸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을 능숙하게 숨겼기에 왕비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서 식사를 가지고 오너라.”
여왕의 명에 신하들은 여러 가지 음식을 대령하였다. 그러나 카니벨라의 눈에는 고기 요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시녀들에게 손짓했고, 시녀들은 그녀가 가리키는 음식들을 포크에 꽂아 입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그녀는 옆에 있던 시녀에게 가자고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시녀는 다른 왕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퇴장하였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에게 말했다.
“공주님, 방은 저기서 쭉 가면 있으니 알아서 찾아가세요. 아셨죠?”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일을 하러 사라졌다.
“응!”
그녀는 대답했고, 곧장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혹시나 누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거울 앞으로 가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대놓고 대충 묶었는데.”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낮은 목소리,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말투까지. 그 모습은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성숙했다.
그녀는 화장대에 앉아 머리 방울을 풀고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레이스가 너무 많아 불편하기까지 한 옷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거울로 그녀의 등이 보였다. 몽둥이로 맞은 듯한 흉터들이 잔뜩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열여덟 살한테 이런 레이스 가득 달린 옷이라니. 때려치우고 싶군.”
그녀는 자신이 바닥에 내팽개친 드레스를 서늘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허공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루카민. 거기 있나?”
그러자 누군가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기사였다. 그는 복면을 벗어 그녀에게 인사했다. 얼굴에 박혀 있는 그의 눈빛은 사나웠고 코는 누군가를 찌를 수 있을 만큼 뾰족했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인 그는 누군가가 다가가기도 힘들 정도로 무섭게 생겼다.
“공주마마.”
그녀는 그 즉시 커튼을 쳤다. 그리고 책상에 앉았다. 루카민 역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성과가 있었나?”
“송구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범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네 탓이 아니다. 나 역시 몰래 조사를 하였지만 자료가 너무 적어. 마치 누가 고의로 숨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뮤일라 일가가 너무 의심스럽습니다.”
“나 역시도 그래. 어마마마가 돌아가신 이후…… 너무 자연스럽고 빠르게 왕위를 차지했어. 마치 준비라도 한 것 같아.”
“혹시 왕비마마께 알리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내가 지금 뭐 하는지도 모르는 그 양반한테 알리자고? 그 생각, 개한테나 줘. 그 인간이 얼마나 비겁한 인간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녀의 반응은 헤실헤실 웃으며 아버지에게 안겼던 아침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깊은 증오와 냉소.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그 인간이야 앞으로도 관심 가질 생각 없으니 어마마마를 죽인 범인이나 찾자고.”
그녀는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복면 무리. 6년 전, 그녀의 인생을 바꿔 버린 화재 사건.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자신을 향해 칼을 찌르려고 했던 복면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으득.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목적으로 복면인들이 여왕궁을 습격해 모녀를 죽이려고 했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래서 루카민을 시켜 최대한 자료를 모으라 명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범인들이 누구인지는커녕 어떻게 보안이 철통같다고 알려진 여왕궁에 들어왔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사는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범인을 찾아야 하는데 자신은 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신세. 아니, 궁 밖은커녕 방 밖으로도 잘 나가지 못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 생활도 이제 힘들군. 활동에 제약이 생기니 짜증이 날 지경이야.”
“조금만 참으십시오, 함부로 움직이셨다가는 저들에게 마마를 이 왕궁에서 쫓아낼 빌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나도 알아. 뮤일라가 날 쫓아내고 싶어 한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어. 게다가 지금은 딱 좋은 타이밍이지.”
그녀는 가끔 여왕에게서 피어나오는 숨기지 못하는 경멸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언제 자신의 자리를 뺏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간파하고 있었다. 여왕은 명백하게 그녀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뮤일라는 어머니의 왕좌를 차지한 파렴치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여왕의 자리가 본래의 자기의 것인 양 행세하는 모습에 역겨움이 차올랐다.
그녀는 뮤일라 일가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범인이라고 하기에 뮤일라는 자신의 표정조차 숨기지 못하는 너무나도 멍청하고 무능한 군주였고, 증거 또한 없었다. 증거는 처음부터 연관이 전혀 없었던 듯 존재하지 않았다.
‘저 인간들만 아니었어도 굳이 내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는데…….’
카니벨라는 6년 전의 그 화재 사건으로 인해 충격으로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바로 뮤일라 일가의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수도 없이 맞았다. 회초리로 맞고, 몽둥이로 맞았다. 그리고 강제로 잠을 자지 못하거나 하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벌을 받아야 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요?>
<이렇게 말대꾸를 하는 것이 잘못이란다.>
<네?>
<그러니 맞아야겠구나. 종아리를 대렴.>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가지각색의 이유를 빌미로 맞기를 수십 번, 처음에는 폭력의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들의 위협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유일한 적통이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왕위 계승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녀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더라면 흩어진 귀족들은 다시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를 때리고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무자비한 폭력을 겪으며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곧 절망감과 증오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의지할 곳이 없어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아바마마라면 날 이 고통 속에서 꺼내 주실 거야…….’
왜 이때까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냐는 원망은 그녀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곧 아버지가 그녀를 이 지옥 속에서 꺼내 주리라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날이 밝음과 동시에 아바마마의 침소로 향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편지 한 장이었다.
[여행을 갈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찾아오지 말라.]
처음에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 기다렸다. 그러나 그 희망이 꺼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곧 지나지 않아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녀의 얼굴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편이 되어야 하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 채 그저 궁 밖을 나돌기만 하는 아버지가 미워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외로운 싸움. 그녀는 계속 말라가고 있었다.
사실 왕비는 여왕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좀 더 빨리 대처하지 못해 여왕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니벨라가 커 가면 커갈수록 자신의 아내를 닮아가자 그는 견디지 못했다. 죽은 아내가 나타나 ‘왜 나를 살리지 못했어!’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른 나라로 자꾸만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사실은 딸에게 닿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를 포기했다.
‘이대로는 안 돼.’
세월은 점점 더 흘러갔고, 그녀는 결정을 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며 하루하루 목숨을 위협당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왕위 계승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밑에서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을 것인가.
답은 금방 나왔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가 왕위를 포기한다고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위협이었다.
“어린아이인 척 연기를 해야겠어.”
그녀는 3년 만에 나타난 루카민에게 말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하는 어린 주군의 표정이 너무나도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지 며칠 후, 그녀는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를 부딪쳤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뮤일라 일가의 관심은 멀어졌고, 그녀는 그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녀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들과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