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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국의 실세 (3/93)

2. 왕국의 실세

카니벨라의 하루는 대체로 이랬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루카민과 훈련을 한 후, 재빨리 씻고 자는 척을 한 후에 늦은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저녁을 먹은 후 잠을 자는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지켜보던 시선 때문에 긴장을 많이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감시는 느슨해졌기에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랬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였다. 그녀는 늘 그랬듯 가볍게 훈련을 한 후, 들어와 이불을 덮어쓴 채 꼼지락거렸다.

“언니!”

그때, 그녀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천사가 강림해서 말을 하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뱀이 온몸을 타고 올라가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

바로 란시엔의 목소리였다. 평소에 미처 다 숨기지 못하는 증오심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 같은 수상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찜찜함을 애써 감추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란시엔!”

“잘 지내셨어요?”

“란시엔이 안 와서 심심했어.”

“그랬군요! 제가 앞으로 언니와 시간을 좀 더 보내야겠네요.”

란시엔은 웃으면서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옆에 있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 안에 적혀 있는 글씨를 흘끗 쳐다보았다.

[‘레미우스 왕국’

트리우스 폰 레미우스

현재 내란이 일어나고 있는 레미우스 왕국의 왕자. 외부에는 매우 예의 바르고 차기 왕의 자리에 오를 만큼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매우 무능하고 정치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적통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중략)……

특이사항: 여색이 매우 심함. 너무 심해서 그의 첩이 되려고 들어간 여식들이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다고 함]

“……!”

그녀는 하마터면 얼굴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저게 무슨 서류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란시엔은 싱긋 웃었다.

“언니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

“제가 언니한테 주는 마지막 선물이거든요.”

마지막 선물? 그게 무슨 뜻이지?

“……!”

그러나 란시엔의 저 웃음을 보자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란시엔은 그녀를 레미우스 왕국에 보내려는 것이다! 이건 그녀를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치워 버리겠다는 유배를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사이, 란시엔은 그녀의 귀에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언니가 여기 있을 동안 제가 많이 찾아올게요.”

“응……?”

그녀는 어리둥절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란시엔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공주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도록.”

“예.”

그럴 능력이야 없겠지만 란시엔은 만약에 대비해서 모든 탈출 경로를 차단시켰다. 이것은 카니벨라를 치워 버릴 기회였고, 란시엔은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라소니 왕국은 기본적으로 모계 국가였다. 여왕이 나라를 통치하였고, 왕국의 주요 보직, 가주의 자리도 여자들이 차지했다. 간혹 남자들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건 진짜 소수였다.

그러나 이번 후계자는 바로 마이클슨이었다. 마이클슨은 카니벨라의 오빠로 왕가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카니벨라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왕위 계승권을 상실하게 되자 왕세자로 지목되었다.

바로 란시엔에 의해서였다. 란시엔은 자신은 여왕에 어울리지 않고, 라카에리는 너무 어리니 마이클슨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녀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무능했다. 모든 것이 가히 엉망인 짐승과도 같은 자. 통치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자였다. 그래서 귀족들은 이 결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여왕은 그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여왕을 꽉 쥐고 있는 자가 바로 란시엔이었다. 란시엔은 이 왕국의 숨겨진 실세였다. 그녀가 마음을 먹었으니 카니벨라는 영락없이 치워질 것이다.

“단쿤 아스트로, 널 믿는다.”

“예, 마마.”

그렇게 말한 란시엔은 단 1초도 더 있기 싫다는 듯 재빨리 사라졌다. 카니벨라는 연신 자신의 몸을 털며 움직이는 란시엔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나저나 다시 감시가 붙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그녀는 어디엔가 숨어 있을 루카민이 빨리 이 심상치 않은 느낌을 알아차렸으면 했다. 밖에 서 있는 저자는 실력이 꽤 있어 보였고, 그녀에게 숨겨 둔 패가 있다는 것을 저들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당분간 루카민한테는 조사나 시켜야겠어.’

방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기척은 없었다. 그녀는 루카민과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글을 써서 천장 사이에 꽂아 놨다.

‘아직 제대로 된 시작도 하지 못했어. 그런데 나보고 이렇게 가라고?’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의 삶을 뒤흔든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여기서 나갈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참고 있는데!’

만약 그녀가 단순히 생존을 목표로 했더라면 루카민이 나타나자 바로 궁 밖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뮤일라 일가의 폭력과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들을 피해 숨어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버텼다. 어떻게든 그 무리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그녀는 악착같이 궁에 뿌리를 박았다.

그때, 그녀의 귀에 누군가가 쪽지를 가져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녀는 슬쩍 위를 쳐다보았다. 작은 구멍 사이로 루카민의 눈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루카민이 사라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이름 모를 남자였다. 그녀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일? 너 누군데?”

“……단쿤 아스트로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단쿤은 천장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는 긴장했다. 혹시 루카민의 존재를 눈치챈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움이 불쑥 솟았다. 그러나 단쿤은 이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하며 말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

그녀는 천진하게 웃었다. 단쿤은 영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자는 누구지? 저런 실력자가 있다니.’

란시엔의 측근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이때까지 그녀를 감시하던 자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쥐어짜 내면 이길 수 있는 자였지만 저자는 달랐다.

이때까지 봤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 루카민이 와도 이길까 의문이 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격차가 느껴졌다.

“…….”

위험한 자였다. 저런 자가 란시엔의 곁에 있다면 언제든 그녀는 죽을 수도 있었다. 복수는커녕 비명횡사할 것이 분명했다.

‘젠장.’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란시엔은 혼인을 빌미로 카니벨라를 재빨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이상, 언제든지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란시엔 본인이 카니벨라를 보기 싫었다.

그래서 란시엔은 재빨리 레미우스 왕국 측에 혼인을 제안하는 서신을 써서 올렸다. 그리고 마침 이 골칫거리 아들을 어디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레미우스 국왕은 당장 긍정의 답신을 썼다.

이것은 카니벨라를 레미우스 왕국으로 보내 버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란시엔을 필두로 모든 왕족 및 사용인들은 물밑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궁은 바쁘게 움직였다. 모두들 카니벨라 몰래 준비하기 위해 진땀을 뺐다.

당연히 이 사실을 카니벨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란시엔이 가져온 서류를 보았다. 그리고 저렇게 궁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데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젠장.’

그러나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카민은 레미우스 왕국의 상황과 트리우스 왕자에 대한 조사를 위해 보내 버렸다. 게다가 밖에는 단쿤 아스트로라는 실력자가 그녀의 방문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상 감금이었고, 이런 상황이니 그녀는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란시엔…….’

그녀는 미칠 정도로 짜증이 났다. 그녀는 란시엔이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그런 서류를 일부러 펼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 강박적인 철저함을 가지고 있는 란시엔이.

‘아마 내가 글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겠지.’

그녀는 란시엔의 노골적인 도발에 화가 났지만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걸로 이때까지 쌓아 왔던 어린아이 연기를 무너뜨릴 수도 없었고, 지금은 루카민도 없었다. 그러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떠오르는 방법 따윈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손톱을 물어뜯는 것뿐.

“마마, 이제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점심시간이었다. 평소라면 대충 치장해 주고 말 시녀들이 오늘은 웬일인지 힘을 주어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를 묶어 주었다.

‘그래도 이놈의 레이스 취향, 좀 없애 줄 수 없나?’

오늘도 역시 과한 레이스가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양갈래 머리까지. 그녀의 속은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다.

“가자!”

그러나 오늘도 역시 그녀는 참았다. 만약 사람의 마음을 타오르는 초로 비유한다면 그녀의 초는 이미 다 녹아 바닥에 눌어붙어 있을 것이 뻔했다.

‘저 인간들이랑 한자리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니. 토할 거 같군.’

분명히 이틀 후에 레미우스 왕국으로 출발해야 하기에 명목상 마지막에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딱히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보자마자 주먹이라도 날리지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역겨운 웃음을 날리는 여왕, 흐리멍덩한 눈깔로 그녀를 바라보는 왕비, 숨기려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볼 게 뻔한 마이클슨, 모든 것에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니는 라카에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게다가 언제나 자신을 깔아뭉개는 표정을 짓고 다니는 란시엔까지.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났다.

그녀는 그들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런 저들과 함께 있어야 할 이 시간이 벌써 지옥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발걸음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착하였습니다.”

그 말이 들리자 그녀는 재빨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거느리고 있는 시녀들도 딱히 없었기에 표정을 감추고 있지도 않았다.

“카니벨라 공주님 입장하십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엄청난 만찬. 그녀는 피어오르려는 조소를 억눌렀다. 이건 마치 돼지를 도살하기 전에 질 좋은 풀을 먹이는 것과 똑같았다.

‘이것들이.’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왕비에게 달려가 머리를 비볐다.

“아바마마아~”

“카벨, 오늘따라 참 예쁘구나.”

“헤헤.”

“어서 앉거라. 이제 점심을 먹어야지.”

그녀는 왕비의 말에 재빨리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질 좋은 음식이 그녀의 접시에 잔뜩 있었다. 평소에 주던 싸구려 고기와는 질이 달랐다.

“나 저거 먹고 싶어.”

식사는 시작되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음식을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비가 그녀의 음식 시중을 들었다. 잘 발린 생선살과 소고기가 그녀에게 대령되었다. 그녀는 왕비의 눈에서 미안하다는 기색을 읽었다.

‘웃기는군.’

이딴 촌극에 동참한 주제에 뭐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건지. 그녀는 역겹기만 했다.

“사랑하는 내 딸아, 할 말이 있다.”

“우웅? 뭔데요?”

“혼인이라는 말이 뭔지 아느냐?”

드디어 저자의 입에서 그녀가 가장 듣기 싫었던 소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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