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녀(貢女)가 되다
“혼인이라는 말이 뭔지 아느냐?”
“우응, 혼인?”
왕비는 산만하게 움직이는 딸을 연민의 눈빛으로 보았다. 그녀는 속없이 실실 웃었다. 그러나 속은 조소로 가득 찼다. 연민으로 가장한 저 거짓된 표정도 짜증 났다.
“그래, 아느냐?”
“아니, 몰라!”
그녀는 순진하게 소리쳤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혼인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단다. 이제 너도 혼인할 때가 되었단다. 그러니 이제 곧 이 아비와 헤어져야 해.”
이때까지 산만하게 의미 없는 행동을 하던 그녀는 헤어져야 한다는 그 말에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으아아앙! 아바마마가 날 버릴 거야!”
“카, 카니벨라……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뭐야!”
그는 울고, 땅을 뒹굴며 떼를 쓰는 자신의 딸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는 딸이 이렇게까지 왕국을 떠나고 싶지 않아 할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울어 재꼈다. 마치 난 그런 걸 오늘 처음 들었다는 걸 강조하는 것처럼 울었다.
“카벨, 진정하거라.”
왕비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말리려 애썼다. 눈물을 닦아 보기도 하고, 토닥여 보기도 했으나 그녀는 더 발광하며 울었다.
“싫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비의 손은 허공에 떠 있었다. 란시엔은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내버려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괜히 설득하려 했다가는 역효과가 날 것 같아요.”
왕비는 뭔가 말하려 하였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눈빛은 평소보다 더 흐리멍덩해졌다.
“오늘은 일단 공주를 내버려두도록.”
괜히 자극했다가 탈출 소동이라도 일으키면 곤란했다. 그래서 란시엔은 단쿤에게 그녀의 궁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기사들을 치우라고 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녀는 저들의 표정과 말에서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빨리 루카민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이런 낮에 루카민이 그녀의 곁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초조했다. 그래서 산책이라도 하면서 잡념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답답해…….’
그녀는 곧장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자유롭게 걷고 싶었으나 드레스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벗어 버리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복잡한 머리와는 관계없이 주변의 풍경은 황홀했다. 형형색색의 꽃잎들과 향기로운 꽃냄새는 그녀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니벨라?”
“오라버니~”
그녀는 찌푸려지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붙들며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뛰어갔다. 마이클슨은 대외적으로는 어린아이가 된 동생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자애로운 오빠였다(물론 6년 전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뛰어오는 그녀와 가볍게 포옹하며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제발 좀 가지 마라.’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곧 모두의 기척이 사라졌다. 아마 이제 있을 일은 저들에게 보이지 않으리라.
“여기는 왜 왔어?”
혹시나 여기서는 안 그럴까 싶어 작은 희망을 가져 보았지만 어김없이 그는 주먹으로 그녀의 배를 세게 때렸다.
‘윽!’
그의 진짜 무서운 점은 이것이었다. 웃으면서 휘두르는 폭력. 아무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 가하는 무자비한 고통.
그녀는 자신의 불운에 대해 원망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최대한 충격을 간소화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는 어디든 그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힘을 주어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의도하는 대로 맞아 주었다. 그리고 진짜 아플 것 같다면 치맛자락을 밟은 척 피해 냈다.
“아, 아파……!”
“쉿, 이 오라비가 소리 내면 안 된다고 했지?”
그는 그녀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녀는 연기하랴, 몰래 주먹 피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뭐야, 저건?’
멍청한 마이클슨은 동생의 움직임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중간에 몰래 보게 된 란시엔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카니벨라의 움직임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우연을 가장한 회피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원래대로 돌아왔나?’
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의 곁에는 좋은 격투술의 표본들이 많았다. 그래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어떻게 카니벨라가 저런 움직임을?
* * *
카니벨라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오라버니와 함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글생글 웃는 표정은 문이 닫히는 순간 굳어 버렸다. 그녀는 살짝 비틀거리며 침대 위에 앉았다.
‘젠장,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잖아?’
이 상황을 타개할 좋은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기분 전환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 건 루카민의 귀환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군. 오늘은 ‘그곳’에 갈 수 있겠어.’
“마마, 다녀왔습니다.”
생각하는 사이, 루카민이 다가왔다. 그녀는 연신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억누르며 그를 반겼다. 괜히 아프다는 걸 티 냈다가 루카민이 마이클슨을 죽여 버린다고 날뛸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티 내지 않은 채 그를 반겼다.
“잘 왔어.”
그렇지만 그는 평소보다 그녀의 반응이 조금 느린 걸 보며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애써 외면했다. 말하지 말라는 주군의 암묵적인 지시가 느껴졌다.
“조사는 대충 해 왔으나…… 정보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곳에서는…….”
“그래, ‘그곳’에 가야겠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났다. 루카민은 그녀의 탈의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마이클슨에게 맞은 곳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마마, 참는 것에 버릇 드시면 안 됩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연고는 시원했다. 그는 세심하게 상처에 연고를 바른 후,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녀는 잠자코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말, 괜찮아.”
루카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닳아 버린 작은 주군에게 과연 행복이라는 말이 존재할까. 복수 이후에 삶을 놓아 버리시는 거 아닐까.
평생 사랑받으며 살다가 갑자기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자신의 사람들을 잃었다. 또한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악의 속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다.
당장 삶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속에서 그녀를 붙잡고 있는 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걱정이 되었다.
‘마마…….’
그는 그녀와 같은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린 후, 미련 없이 삶을 놓아 버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걷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신을 믿지 않았지만 간절하게 기도했다. 부디 제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그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던 그녀는 곧장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입으면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옷이었다.
“이제 가자.”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여왕을 생각하였다. 카니벨라의 어머니. 그녀는 커갈수록 여왕을 닮아가고 있었다.
금발 머리는 마치 태양을 연상케 했고, 곧게 솟아 있는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매혹적이었다. 파란색 눈은 마치 맑은 바다를 보는 듯했고, 하얀 얼굴은 그녀의 이목구비를 한층 더 살려 주었다.
레이스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가려졌던 그녀의 단아함은 역설적이게도 볼품없는 검은색 옷을 입었을 때 더욱 빛이 났다. 그는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작은 주군을 바라보았다.
“루카, 안 갈 거야?”
“예? ……아, 네.”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던 그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테라스 아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내려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응? 당연한걸. 날 뭐로 보는 거예요, 스승님.”
그는 상처가 나을 틈도 없이 바로 움직이는 그녀가 안쓰러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재빨리 밧줄을 묶은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 역시 빠른 속도로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재빨리 궁 뒤쪽으로 나 있는 숲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빽빽한 나무들을 헤치고 깊숙이 들어간 그들은 밑의 부분이 모두 사라진 채 덩그러니 남아 있는 통나무 지붕에 도착했다.
“내려가자.”
지붕을 타고 들어간 안은 어두컴컴했다. 루카민이 횃불로 추정되는 것을 더듬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안이 밝아졌다. 한쪽 벽면에는 대륙 지도가 붙여져 있었고, 책상에는 각종 자료가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다.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루카민은 간략하게 보고를 마쳤다. 현재 레미우스 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왕위 싸움, 그리고 가장 밀리고 있는 트리우스 왕자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조소했다.
‘사람 한 명 골로 보내려고 작정했군.’
란시엔의 의도는 너무 뻔했다. 거기 가서 그냥 죽으라는 거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걸까? 예전에 시녀로 활동했던 그때가 지금도 그렇게 굴욕적인 걸까?
그러나 지금은 란시엔에 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번 혼인 경로 및 일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
“이틀 후면 출발할 것입니다. 그쯤에 출발해서 10일 정도를 소요해서 왕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경로는?”
“카이셔스 산맥을 통해서 간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4일 정도를 소요해서 왕국 검문소로 진입해서 남은 하루 동안 궁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카이셔스 산맥이라…….”
카이셔스 산맥은 루미니르 제국과 레미우스 왕국, 그리고 라소니 왕국 사이로 뻗어 있는 큰 산맥이었다. 그리고 또한 매우 험한 산지였다. 그곳을 오르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이건 뭐, 그냥 가다가 죽으라는 소리군.”
그녀는 왕비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끝까지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근에 세 나라에서 그 산맥 통행을 위해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 이곳으로 간다고.”
“…….”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란시엔에게 끌려다니다가 인생을 마칠 수는 없었다.
‘결론은 하나다.’
처음부터 단 하나뿐이었던 정답. 그녀는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카이셔스 산맥에 진입하면 그때, 탈출한다.”